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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밧다 ④

기자명 김규보

“내면의 번뇌 물리쳐야 참 승리자”

밧다는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고 알듯 말듯 한 미소를 지었다. ‘유명하다는 스승들과 논쟁을 벌여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나에게 감히 도전하겠다니. 그것도 고작 아이들을 시켜 나뭇가지를 짓밟게 했단 말인가. 어쭙잖은 지식을 과시하고 싶은데 겁은 났던 모양이군.’ 밧다의 얼굴 표정에 교만함이 한가득 떠올랐다.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외쳤다.

사리풋타에 질문 퍼부은 밧다
차분한 그의 대답에 말문막혀
붓다 만나 연기의 이치 깨달아

“사리풋타라는 어리석은 자와 나와의 논쟁을 보십시오. 나를 따라오면 사리풋타라는 어리석은 자가 무릎 꿇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순식간에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을 이끌고 사리풋타가 있다는 나무 아래에 도착했다. 사리풋타는 한 무리의 수행자에 둘러싸여 있었다. 밧다가 다가가 물었다.

“내가 세워 둔 나뭇가지를 무너뜨리게 한 게 당신입니까.”
“그렇습니다.”
“나와 논쟁을 해서 이길 자신이 있는 자만 나뭇가지를 무너뜨리라고 하였습니다. 알고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당신은 나와 논쟁을 해야 합니다. 누가 묻고 누가 대답을 합니까.”
“그대가 잘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면 무엇이든 묻도록 하시오.”

밧다는 수많은 상대를 굴복시킨 언변을 발휘해 질문을 퍼부었다. 업, 윤회, 불살생, 해탈 등의 개념과 의미를 차례로 물어보았는데, 그때마다 사리풋타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한 말투로 답변을 내놓았다. 논쟁이랄 것도 없었고, 오히려 말문이 막히는 쪽은 밧다였다. 사리풋타를 얕잡아 봤던 만큼, 밧다가 느끼는 수치심도 컸다. 더 이상 질문할 게 남아있지 않자 남은 것은 침묵밖에 없었다.

“밧다여. 나도 그대에게 한 가지 묻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편안케 할 수 있는 그 하나가 있습니까.”

눈앞이 컴컴해졌다. 하나라니, 도대체 무얼까. 남편을 절벽에 떠민 뒤부터 수행하고 세상을 유랑했지만, 결국 지식만 쌓아왔을 뿐이었다. 불쑥 튀어나오곤 했던 욕망을 남몰래 꾹꾹 눌러 담고는, 마치 밝은 지혜를 얻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밧다는 알고 있었다. 자신을 그토록 괴롭혀온 질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그간 논쟁에서의 승리는 지식을 상대방보다 조금 더 길고 오래 늘어놓은 것에 불과했다.

“사리풋타여. 당신에게 귀의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저에게가 아니라 붓다에게 귀의하십시오. 더없이 존귀한 분입니다.”

사리풋타의 말에 따라 붓다를 만나기 위해 기원정사로 향했다. 가는 도중 언덕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사리풋타와의 대화를 떠올리자 마음에 머물렀던 교만함이 한순간에 떨어져 나갔다. 기원정사에 닿아, 멀리서 붓다가 설법하는 것을 보았다. 감격에 겨워 오체투지를 하고 뒤로 물러나 선 채로 붓다를 응시했다. 밧다는 아직 인지하지 못했지만 교만함 사라진 자리에 지혜가 들어섰고, 눈은 별빛처럼 영롱하게 반짝였다. 설법을 하던 붓다가 이 사실을 알고 밧다에게 말했다.

“의미 없는 천 개의 게송보다 평화롭게 만드는 한 구절 게송이 낫다.”

붓다는 밧다에게 모든 존재는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는 연기의 이치를 들려주었다. 밧다는 붓다의 말을 듣는 순간 모든 번뇌가 사라졌다. 욕망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밧다는 비로소 알았다. 욕망을 손바닥으로 감싼 채 그것을 없애겠다며 묻고 따지고 방황했다. 평온에 휩싸인 밧다를 보며 붓다가 말했다.

“강도를 몰아내는게 아니고 내면 번뇌를 물리치는게 승리인 것이다.”

붓다는 그를 ‘재빠른 이해력에 있어서 최고의 비구니’라고 칭찬하였다. 아라한의 경지를 성취한 밧다는 이후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사람들을 수행자의 길로 이끌었다. 열반에 들 때까지 50년 넘는 세월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수많은 이에게 전해 주었다. <끝>

김규보 법보신문 전문위원 dawn-to-dust@hanmail.net
 


[1438호 / 2018년 5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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