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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명예교수 해주 스님

“확고한 믿음은 보리심 이끌고, 보리심은 성불로 이어져”

▲ 해주 스님은 “바다에 온갖 물상이 다 들어가도 바닷물이 더러워지지 않듯 부처님의 보리 마음은 육도 중생들의 물든 마음이 비춰져도 물들지 않는다”며 “부처님처럼 되겠다는 원을 세우고 끊이 없이 정진한다면 마침내 부처님 같은 마음을 갖게 된다”고 강조했다.

‘화엄경’ 약찬게는 ‘화엄경’ 선지식이 모두 계시고 화엄성중이 외호하고 계시기에 한 번 읽으면 ‘화엄경’을 다 읽은 공덕과 같다고 해서 독송을 하기도 하고, 풀어서 내용으로 깊게 들어가는 분들도 많습니다. 오늘은 약찬게의 마지막 부분인 유통송(流通頌), 즉 유통의 말씀을 주제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중생 성품은 본래 부처님 성품
분별하는 마음이 중생 만들어
부처님 말씀을 열심히 듣고도
일상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수행 많이해도 번뇌 줄지 않아

약찬게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초발심시변정각, 처음 발심한 때가 문득 정각이라고 하는 말씀은 약찬게 뿐만 아니라 의상 스님의 법성게(法性偈)에도 나옵니다. 약찬게는 ‘대방광불화엄경’ 80권을 압축한 것이고, 법성게는 ‘화엄경’ 60권의 핵심을 엮어 놓은 것인데, 두 게송에서 모두 말씀하실 만큼 중요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발심은 처음 발심한다는 말입니다. 스님들의 출가를 ‘발심출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발심은 마음을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인가, 바로 보리(菩提)의 마음입니다. 보리는 무엇일까요? 단적으로 말하면 깨달음입니다. 궁극적으로 부처님의 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입니다. 이것을 풀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 되고 줄이면 발보리심, 더 줄이면 발심이 됩니다. 그러니까 초발심시변정각은 발심을 하자마자 깨닫는다는 의미입니다.

발보리심하면 성불한다는 말입니다. 절에서 인사를 할 때 “성불하세요” “성불합시다”라고 말하지만, 금생에 ‘성불할까’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않고 살아가게 됩니다. ‘초발심시변정각’으로 보면, 성불하기 위해서는 보리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전제가 바로 신심(信心)입니다. 확고한 믿음이 있으면 보리의 마음이 일어나고, 보리의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 부처님처럼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화엄경’ 전체에서 믿음에 대해 강조하고 이끌어주시는 분은 문수보살이십니다. 입법계품에서도 선재동자가 선지식으로부터 해탈법문을 듣고 화엄법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신심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신심이 있다, 없다는 무엇으로 구분하는 것일까요?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은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참회하고 발원하고 예불 잘하고 보시 잘하고 공양 올리는 것은 신심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공덕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화엄경’에서의 신심, 초발심 할 수 있는 신심은 바로 ‘우리 중생들이 본래는 부처님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인과법에 의해서,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말과 같은 이치입니다. 모내기철이 다가오면 벼를 심습니다. 벼는 모종을 심는데 그 모종은 볍씨에서 싹이 나온 것입니다. 모종이 자라 가을이 되면 벼를 수확하는데 그 수확물은 볍씨의 벼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옛날 가난하고 힘들 때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옛 어르신들은 이 시기에 배가 아무리 고프더라도 종자 씨앗은 남겨놓아야지 그것까지 먹어버리면 농사는 끝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부처의 종자이기 때문에 성불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본래 부처였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많은 경전에서도 오직 부처님뿐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부처님 마음 하나뿐이며 중생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부처님 마음을 불성(佛性)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중생의 성품은 곧 부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고 했습니다.

조금 전에 부처님의 성품은 하나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똑같은 평등세계의 부처님뿐이어야 하는데 왜 나타나는 현상은 다를까요? 이렇게 의심이 있으면 신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둘러보고 둘러봐도 평등세계가 아닙니다. 잘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난 사람도 있습니다. 성격이 원만한 사람도 있고 찌그러진 사람도 있고 괴로운 사람도 있고 행복한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고양이나 개, 미물도 존재합니다. 모두 불성이 있는데 왜 다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원래 부처님 성품은 하나뿐인데 인연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법회에 참석한 인연, 참여하지 못한 인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은 인연 따라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그 사람의 얼굴이 예뻐서 좋아하면 그 사람이 늙어 예쁜 모습이 사라진 이후에도 좋아하게 될까요? 그 사람의 돈이 많아서 따라다닌 경우라면 그 돈이 다 사라진 이후에는 싫어져서 따라다니지 않을 겁니다. 아름답게 핀 꽃이 부처님 도량을 장엄하고 있지만 이 꽃들도 시간이 지나고 물이 마르면 결국 아름다움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조건 따라 생겨나는 것에 대해서 너무 분별하거나 너무 휘둘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만 원래 성품은 부처님 성품 하나뿐이라는 진리를 철저하게 믿어라. 그리고 조건 따라 생겨나는 것은 참나가 아니라 ‘무아(無我)’라고 경전에서는 당부합니다. 내가 없으니까 내 것도 없을 텐데 어째서 누군가는 즐거운 과보를 받고 누군가는 괴로운 과보를 받는가, 그것은 업에 의한 과보 때문이며 본래는 무아, 그래서 업을 잘 짓는 것은 곧 마음을 잘 쓰는 것이 됩니다.

부처님 공덕은 한량이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공덕은 한량이 없기에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덕과 복덕을 주시는 밭과 같다고 해서 ‘복전(福田)’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복전 중에서도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시한다고 해서 ‘공양(供養)’이라고 합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시를 한다고 해서 공양을 올리는 분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결국 누구는 복을 많이 받고, 누구는 복을 적게 받는지에 대한 의심이 없어져야 신심이 돈독해집니다. 논밭은 똑같은데 어떤 밭에서는 곡식이 풍성하게 잘 열리고 어떤 밭에서는 곡식이 풍성하게 열리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씨앗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씨앗이 달라서 밭은 같아도 곡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곧 부처님의 복전은 똑같은데 공양 올리는 사람의 마음 따라 받는 복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중생 마음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본래 마음, 부처님의 마음으로 살자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부처님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들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괴로움이 아닙니다. 영원한 행복, 즐거움을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불자님들이 법당에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집으로 가면 또 괴로운 일이 생기고 싸울 일이 발생합니다. 법당에서는 모두 용서를 했지만 다시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 속이 불편해집니다. 부처님 말씀을 열심히 들었건만 왜 번뇌는 끊어지지 않고 다시 생겨날까요? 그 이유는 부처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전에서는 비유하기를, 마치 하루 종일 남의 돈을 세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루 종일 돈을 세었지만 자신에게 남은 돈은 없습니다. 아픈 사람이 약 처방을 받고도 약을 먹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약 처방은 알고 있지만 실천을 하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듯 보시하고 공양올리고 인욕하고 정진하면 해탈하는 줄 잘 알면서도 불자들은 실천을 하지 않습니다. 실천하지 않는다면 복은 나오지 않겠지요. 증장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부지런히 실천하고 싶지만, 어떤 이는 해야지 하면 하는데, 어떤 이는 그조차 잘 되지 않습니다. 실천이 안 되면 게을러집니다. 다시 말해 정정진(正精進)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진하는 것이 바른 정진일까요? 꾸준히 하지 않으면 정정진이 아닙니다. 법당 안에서 열심히 기도하다 보면 부처님 마음이 저절로 나올 것 같고 부처님의 참 제자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멀어지면 되지 않습니다. 정정진과 관련해 한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불을 피울 때 부싯돌을 치거나 나무를 비볐습니다. 나무에 불꽃이 일어날 때까지 비벼야 하는데 힘들다고 쉬고, 힘들다고 쉬면서 하다 보면 100일 동안 비벼도 불꽃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법당에 올 때는 가행정진이 되고, 특별산림법회를 할 때에는 용맹정진이 되는 것입니다. 평소 꾸준히 정진하면서 법회 때에는 좀 더 힘을 들여서 하고 오늘처럼 특별 법회가 열리면 좀 더 힘을 내서 정진할 때 비로소 발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진하는 방법을 알게 된 만큼 이제는 어떤 수행을 해야 할지 궁금해집니다. 무엇이든지 괜찮습니다. 참회기도를 하고, 원을 세워서도 하고, 보시도 괜찮고, 지계도 괜찮고, 인욕도 괜찮습니다. 물론 다 하면 좋지만 한 가지를 통해서도 전체가 다 이뤄진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부처님의 세계로 한 발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하시는 분일까요? 부처님의 일은 바로 중생제도입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마음을 훤히 다 아시고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이 해인삼매(海印三昧)의 경계에 계신다고 합니다. 바다는 온갖 물상이 다 들어가도 바닷물 자체가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보리 마음도 육도 중생들의 온갖 물든 마음이 다 비춰지지만 부처님 마음은 물들지 않습니다. 반면 중생은 인욕을 하는데, 봐주기 어려운 사람이 나타나거나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는데 자신이 먼저 지쳐 버리는 경우가 생깁니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물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려다가 자신이 먼저 죽는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처럼 되려면 원을 가져야 합니다. 참회를 하면 반드시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원입니다. 깨끗하게 정화가 되면 거기에는 온갖 장엄한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신통입니다. 오늘 삼회산림 회향을 하면서 기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향의 원을 다음 참회산림 때까지 1년 내내 잘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즐거움, 언제나 부처님 같은 삶으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4월4일 부산 초량동 소림사(주지 종인 스님)에서 봉행된 ‘제41회 소림사 참회산림 대법회’의 회향법회에서 해주 스님이 설한 것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1439호 / 2018년 5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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