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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체사레 보르자의 선과 악

기자명 김정빈

“군주는 선하지 않은 법도 배워야만 한다”

▲ 그림=근호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 1475~1507)는 교황 알렉산드르 6세와 그의 애인인 반치노 사이에서 난 사생아였다. 교황은 두 아들 중 형인 체사레를 종교인으로, 동생인 후안을 군인으로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그에 따라 체사레는 열다섯 살에 팜플로나의 주교가 되었다.

불법은 마치 피라미드 같아
지점 벗어나 허공 승화하면
해탈과 열반으로 초월 의미
경지 도달 위해선 계율 출발

체사레와 마키아벨리 후학들
범죄로 선악 중시하지 않아
선악 문제 가벼워진 현대에
수단과 목적 꼼꼼히 짚어야

그의 아버지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은 체사레가 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무렵이었다. 그는 교황이 되자마자 체사레를 추기경에, 후안을 교회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1497년에 후안이 암살됨으로써 체사레는 교회군 총사령관 자리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다음 해에 체사레는 추기경 직을 사임하고 프랑스 루이 12세로부터 발렌티노 공작 작위를 받았다. 아버지의 후원을 받아 체사레는 업적을 쌓아나갔다. 그는 프랑스의 원조를 이끌어냄으로써 이탈리아 중부 로마냐 지방에 로마냐 공국을 세웠다. 이로써 그는 나폴리 왕국, 피렌체 공화국,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국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실력자가 되었다.

1503년, 알렉산드르 6세가 고열과 구토 증세를 보이다가 쓰러져 죽었다. 교황위를 물려받은 비오 3세 또한 곧 죽었고, 율리오 2세가 뒤를 이었다. 강력한 후원자를 잃은 체사레는 율리오 2세 휘하의 사람들에게 모함을 받아 산탄젤로 성의 지하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다음 해, 그는 스페인으로 추방당하여 포로로 살았다. 그는 2년 후에 그곳을 탈출하여 처남이 왕으로 있는 나바라 왕국으로 갔다. 1507년, 체사레는 비아나 포위공격 때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로 죽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한 살이었다.

‘군주론’의 저자인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으로서 보르자를 세 번 만나 협상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작에서 체사레 보르자의 전략을 여러 차례 인용하며 군주는 마땅히 그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주론은 임금된 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논한 책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마키아벨리가 그 책에서 군주는 목적 달성에 필요한 경우 악덕을 저지를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군주의 첫 번째 책무는 국가의 보전에 있고, 그 책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때로 악덕을 저질러야만 하는 때가 있다는 점을 이렇게 말했다.

“군주는 상황에 따라 선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좋은 성품을 모두 갖고 있다면 물론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하지 않다. 또 인간 상황은 미덕을 용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악덕을 별다른 불안 없이 즐기는 것이 좋다.”

이런 사상을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에게서 배웠다. 예를 들면 이렇다. 체사레 보르자가 로마냐를 정복했을 때 그는 이 지방이 그동안 무능한 사람에 의해 다스려져 왔다는 것과 그래서 사회가 혼란스러워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냉혹하고 엄격한 성격을 가진 레미로 데 로르카에게 큰 권한을 주어 이곳을 다스리게 했다.

그 결과 로마냐는 질서를 회복했지만 후유증이 남았다. 전번에는 다스림이 너무 느슨해서 백성들이 불만스러워했지만 이번에는 너무 가혹해서 백성들이 불만스러워했던 것이다. 현지에 도착해 이 점을 간파한 보르자는 로르카의 몸을 두 동강 내 시내 중심에 있는 광장에 놓았다. 그는 사람들이 그동안의 가혹한 압박은 이 사나이의 잘못일 뿐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를 바랐고, 실제로 사람들은 그 처사를 보며 공포를 느끼는 한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문제를 처리한 뒤 보르자는 자신의 휘하 용병대장으로서 반기를 든 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반기를 들었지만 보르자가 도착하자 용병대장들은 성 하나를 체사레에게 바치면서 체사레가 직접 성을 돌아보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이 함정임을 간파했지만 체사레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체 연극을 연출했다.

겉으로 화평을 내세우며 속으로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용병대장들을 체사레는 아주 반가운 얼굴로 만났다. 체사레는 겉과 속이 다른 그들을 여러 번 얼싸안으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용병대장들은 성 밖에 대기시켜놓은 자신들의 군대에 갔다가 내일 와서 의논하겠다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자 체사레는 그립고 기쁜 사람을 만날 때의 반가운 표정을 가득 담아 그들에게 자기 숙소로 가서 한잔 하자고 제안했다. 연극을 연출하여 상대를 속이는 점에서 체사레는 용병대장보다 여러 수 위였다.

용병대장들은 체사레를 따라 성으로 들어갔고, 사실상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었다. 네 용병대장이 지나간 다음 가교가 소리 없이 올려졌다. 그들이 체사레가 머무는 집안의 넓은 홀에 이르렀을 때 체사레가 자신의 부하인 돈 미켈레토를 돌아보았다. 미켈레토의 신호를 받은 여덟 명의 남자가 용병대장들을 덮쳤다. 체사레는 그들을 한번 슬쩍 쳐다본 다음 등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 방문 저쪽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체사레는 성밖에 대기 중인 용병군들을 습격했다. 밤 10시, 체사레는 용병대장들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그들 중 두 사람의 목에 밧줄이 걸렸다. 밤 2시, 체사레 보르자는 마키아벨리를 만나 환한 얼굴로 말했다. “나의, 그리고 당신들의 적이기도 한 그들을 멸망시킬 수 있어서 기쁘오.”

불교는 계율을 바탕삼은 다음 선정과 지혜를 닦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로써 볼 때 불법은 삼 층으로 지어진 탑, 또는 피라미드와 같다. 불교인의 최종 목표인 깨달은 피라미드의 꼭대기 지점, 즉 소실점에 해당된다. 불교인은 이 지점에서 피라미드를 벗어나 허공으로 승화하게 되는데, 그것이 해탈, 열반이다.

허공으로 승화한다는 것은 처음에 기초 삼았던 계는 물론 그동안의 모든 수행까지도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맨 처음 계율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불교는 설한다. 목적이 아무리 좋을지라도, 마침내는 죄무자성(罪無自性)의 경계에 이를지라도 첫출발은 선이어야 한다는 것이 불법의 입장이다.

그 반대편에 체사레 보르자와 마키아벨리가 있다. 그들은 21세기 현시대에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들의 후학들은 심한 경우는 범죄를 저지르고, 덜 심한 경우라도 선악을 중시하지 않는다. 선악의 문제가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가벼워진 시대. 그리하여 우리는 선과 악, 수단과 목적의 문제를 곰곰 짚어보게 된다. 불교는 과연 이 시대를 계율로써 구제할 수 있을까. 이 엄중한 질문이 현시대의 불제자를 강력히 압박해오고 있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39호 / 2018년 5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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