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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고대불교 - 무격신앙과 불교의 습합 -상

토착신앙이 불교에 수용되며 한국적 특성 지닌 독특한 불교 형성

▲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 출처=문화재청

한국 재래의 사회습속이나 토착신앙은 새로 전래된 불교와 갈등을 빚어 순교자를 배출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교와 타협하여 그것을 수용하는 토대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불교가 수용되기 이전의 사회습속이나 토착신앙은 불교의 한국적 전개의 방향을 규정하였으며, 그렇게 전개된 불교는 이후 한국인들의 삶의 방식과 정신세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불교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바탕이 된 재래의 습속이나 신앙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며, 나아가 불교와의 상호 관련성에 대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불교사에서 노장사상이나 도교신앙과의 관계, 일본의 불교사에서 신도와의 관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중국불교의 노장 수용처럼
한국불교도 무격신앙 수용

한국불교 형성 큰 역할 불구
의미 제대로 규명되지 않아

불교·유교에 습합 원형 잃어
문헌자료 단편적이고 영세

제사유적·암각화 등을 통해
문헌자료의 부족 한계 극복

신석기와 청동기 거치면서
무격신앙의 형태들 완성돼

그런데 한국 고대사회의 습속이나 토착신앙은 세계종교인 불교가 수용되면서 기층사회의 전통문화로 체질화되어 한국전통문화의 기반을 이루고 또한 한국불교의 특성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구명되지 못한 점이 많다. 이러한 이유 중 하나는 토착신앙의 요소들이 이미 기층사회의 전통문화로 침전되어, 주도적인 상층문화의 구실을 못하게 된 시점에 비로소 문자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남겨진 문헌(文獻) 자료가 단편적이고 영세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단편적인 자료 자체도 시대가 내려오면서 유교나 불교의 영향을 받아 이미 변해버린 내용이나 성격을 전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문헌자료를 통한 체계적인 이해는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문헌자료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새로운 방법론의 계발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새로운 자료의 발굴은 고고학적(考古學的)인 발굴을 통한 당대 유물의 수집, 그리고 민속학적(民俗學的)인 조사를 통한 기층문화로 침전되어 전해져 오는 잔재 요소들의 해석 등이다. 다음에 새로운 방법론의 계발로는 다른 지역과 민족들의 습속이나 신앙과 비교 연구하는 인류학·종교학·신화학·민속학 등의 방법을 고려할 수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문헌 가운데서 고대사회의 습속이나 신앙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자료로 들 수 있는 것은 물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다. 그리고 ‘삼국지(三國志)’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을 비롯한 중국의 정사류, 그리고 ‘일본서기(日本書紀)’나 ‘속일본기(續日本紀)’ 등의 일본 측 자료 등을 추가할 수 있는데, 이들 자료는 원래의 모습을 충실하게 전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한 문헌에 나타나는 습속이나 신앙관계 자료내용의 기원을 추적하여 보면 신석기시대 이래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중층적으로 축적된 것들이 잡다하게 뒤섞여 망라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신석기시대 이래의 것도 있고, 청동기시대나 철기시대에 와서 새로 성립된 것들도 있어서 각 요소들의 주동적인 시기가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 와서도 유교와 불교로 교체되거나 습합되면서 변화를 겪는 요소가 있는가하면 끝까지 습합되지 않고 기층문화로 침전되면서 강인하게 존속되는 요소도 찾아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것들도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무덤이나 제사유적, 장식품이나 암각화 등 고고학 자료들은 고대사회의 습속이나 신앙의 모습을 원형 그대로 실감나게 나타내주어 문헌자료의 한계를 보완해 줄 수 있다. 요즈음에는 특히 제사유적들이 다수 확인되면서 고고학 자료를 통한 고대종교를 복원하려는 종교고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기본적인 사회단위는 혈연(血緣)을 중심으로 뭉쳐진 혈족집단(血族集團), 즉 씨족(氏族)이었다. 씨족을 구성하는 촌락의 주민들은 자기들의 조상이 같다고 믿고 있었으며, 그 공동조상을 동물로 믿는 토템(Totemism)을 지니고 있는 토템씨족이었다.

신라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박혁거세의 박씨족(朴氏族)은 말(馬), 그리고 알영이나 알지의 김씨족(金氏族)은 닭(鷄)을 각기 그들의 토템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러한 씨족사회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서 족장(族長)의 선거와 같은 중대한 일들은 일정한 장소에서 개최되는 씨족회의에서 결정하였는데, 신라의 화백(和白)과 4영지(四靈地), 백제의 정사암(政事巖) 등은 그 전통을 지닌 것이었다. 그리고 신라의 화랑도(花郞徒)나 고구려의 경당(扃堂)도 씨족사회의 미성년집회(未成年集會)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공동체사회에서는 후대의 농촌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두레’라는 협동 노동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사냥, 고기잡이, 농경 등의 주요한 생산활동을 공동으로 영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의식과 같은 것도 씨족 구성원 전체의 공동으로 행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씨족사회는 자급자족하는 경제적인 독립체였다. 즉 씨족마다의 생활권이 정해져 있고, 씨족내의 족내혼(族內婚)이 금지되었으며, 기휘(忌諱, Taboo)가 많은 사회였다. 만일 이를 위반하여 다른 씨족의 영역에서 경제활동을 한 위법적인 일이 있었을 경우에는 배상을 지불해야 했는데, 그러한 전통은 동예의 책화(責禍)라는 습속으로 이어졌다. 기휘나 책화 같은 것도 법률의 작용을 하는 것이지만, 당시 사회의 구체적인 법률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조선 사회의 법률 내용이 이른바 기자팔조교(箕子八條敎)라고 하여 일부 전해오고 있다. 고조선에서는 8조목이 통용되고 있었다는데, 현재 확인되는 것은 살인(殺人)·상해(傷害)·절도(竊盜) 등 3조목이고, 그 밖에 간음(姦淫)·독신(瀆神) 등의 조목을 들 수 있다. 이들 조목 가운데는 신석기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청동기문화의 요소가 가미되고, 나아가 중국 한나라 법률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짐작케 하는 것도 있다. 그런데 한사군 설치 이후에는 그 조목이 8조에서 60여조로 늘어났던 것을 보아 철기문화의 수입으로 인한 사회변동에 수반하여 사회습속도 변해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석기시대인들의 생활은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기휘가 많았다는 표현과 같이 사고방식이 대단히 종교적이어서 그것이 현실적인 생활과 밀착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인들은 우주의 만물이 모두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애니미즘(Animism)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즉 사람은 물론 산이나 바다, 동물이나 나무와 같은 모든 자연물도 영혼을 지니고 있으며, 형체가 없어진 뒤에도 그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연물의 영혼 가운데는 신격화(神格化)되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들도 있었다. 이것은 다신교(多神敎, Polytheism)적인 신앙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신격화된 것 가운데서도 가장 높이 숭앙된 것은 태양신(太陽神)과 조상신(祖上神)이었다. 그밖에 산이나 강, 동물이나 수목, 그리고 지모신(地母神)이나 생식신(生殖神) 같은 관념신 등 잡다한 신들이 숭배대상이었던 사실도 신화·전설·유습 등에서 적지 않게 확인된다.

그런데 신격화된 것들은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으로 나뉘어져서 선신들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던 반면에, 악신들은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당시인들은 악신을 물리치고 선신을 맞아다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오게 할 수 있는 능력, 즉 주술(呪術)을 필요로 하였다. 바로 주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을 주술사(呪術師)라고 하였다. 이들 주술사는 병을 고치고, 고기잡이나 사냥이 잘 되도록 하고, 농경이 순조롭게 되도록 하는 등의 목적을 위하여 제의(祭儀)를 행하였다. 이러한 제의는 씨족 구성원이나 부족 구성원의 공동으로 행해졌으며, 음악과 무용이 행해졌다. 후대 초기국가 단계인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상달 등의 제의에서 전체 구성원의 참여하에 항상 음악과 무용이 필수적으로 행해졌던 것도 신석기시대 이래의 전통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제의에 희생(犧牲)이나 점복(占卜)이 수반되기도 했으며, 또한 족장의 선거나 죄인에 대한 단형(斷刑)이 동시에 집행되는 경우도 있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이러한 원시적 종교형태를 일반적으로 무격신앙(巫覡信仰, Shamanism)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이러한 종교형태는 세계 각 지역의 고대종교의 보편적인 종교현상으로 이해하여 동북아시아 지역만의 특수한 현상으로 볼 수 없다는 비판적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고대종교는 연구자에 따라 무격신앙 이외에도 각기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신교(神敎)·선교(仙敎)·수두교·부루교·고유사상(신앙)·단군신교·무교(巫敎)·원시종교·무속종교(신앙)·민족종교(신앙)·토착종교(신앙)·전통종교(신앙)·한밝사상 등이다. 고대종교의 명칭 문제는 불교 수용 이전의 종교전통에 대한 성격 규정과 관련된 것인데, 연구자들 사이의 합의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청동기시대의 종교는 대체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러한 제정일치적인 사회의 최초 지배자가 바로 고조선의 단군왕검(檀君王儉)이었다. 단군왕검은 태양족의 후예로 자처하는 주술자적 성격이 강한 군장(君長), 즉 제사장과 군장의 역할을 겸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제정일치적인 종교형태는 철기시대가 되면서 변하여 제정(祭政)이 분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자(王者)의 제사장적인 성격은 삼국 고대국가의 성립 이후에도 일부 남아서 초기국가 지배체제의 유력한 원리로서 작용하였다. 삼국 가운데 가장 후진적인 신라 사회에서 특히 차차웅(次次雄, 慈充)이라는 왕호가 출현하였던 것이나, 불교적으로 윤색되어 불교왕명시대(佛敎王名時代)를 연출한 것 등은 제정일치적인 지배자의 여운을 강하게 풍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어디까지나 잔재적 현상에 불과할 뿐이었고,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삼국의 정치권력이 더욱 성장하여감에 따라 제정은 분리되어 갔다. 정치적 지배자들은 세속적인 권력에 만족하고 종교적인 제의는 제사장에게 맡겼기 때문이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39호 / 2018년 5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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