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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토는 수행과 전법으로 지금 우리가 이뤄가야 할 세상”

부처님오신날 만난 큰스님 조계종 원로의원 성타 스님

▲ 성타 스님은 “불자에게 포교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며 “포교의 핵심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정성에 있다”고 말한다.

서울 조계사 마당에는 꼬마 부처님이 계시다. 큼직한 얼굴에 커다란 귀, 무엇보다 초승달 눈 미소가 인상적이다. 이런저런 근심을 안고 일주문 안에 들어섰더라도 천진동자불과 마주하면 슬며시 미소가 번질 만도 하다.

1952년 경주 불국사로 출가
불교정화 때 금오 스님 시봉

통도사 강원 등서 경전 공부
운허·경봉 스님에게도 배워

은사 월산 스님 도와 절 살림
법주사승가대학 강사도 지내

홀로 독학해 일본어 마스터
경허선사 등 연구논문도 다수

조계종 원로의원 성타(性陀) 스님은 조계사 천진불을 닮았다. 경주 불국사 회주를 비롯해 (재)성림문화재연구원 이사장, 학교법인 동국학원 이사, 불교방송 이사, 경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명예대표 등을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야 하지만 스님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머문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건만 해맑은 초승달 미소는 순진무구한 천진불을 떠오르게 한다. 많은 이들이 스님을 따르는 것도 넉넉한 미소와 누구를 만나든 정성을 다하는 스님의 따스한 마음에서 비롯됐음이 분명하다.

평생 큰 다툼 한 번 하지 않았을 정도로 무던해 보이지만 한국불교 현대사에서 스님의 발자취는 뚜렷하다. 지금처럼 총무원, 교육원, 포교원이라는 3원 체계가 갖춰지지 않았던 1980년대 초, 스님은 교육과 포교업무를 관장하는 교무부장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스님은 단일계단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자운 스님 등 율사스님들을 도와 1981년 2월 단일계단을 설치해 수계산림을 봉행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수계의식이 통일되지 않아 행자들은 자신의 은사스님에게 사미(니)계와 구족계를 받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 탓에 어떤 행자는 삭발한지 오래지 않아 사미계와 구족계를 받는가 하면 어떤 행자는 몇 해가 지나도록 계를 받지 못하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수계관리가 부실하다보니 종단의 위계질서가 서지 않고 수계사실을 조작하는 일까지 벌어지고는 했다.

단일계단은 사미·사미니들이 한 곳에서 한 명의 계사스님에게 계를 받는 의식으로 종단의 질서와 출가자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이뤄질 수 있음을 의미했다. 성타 스님이 지난 65년 출가 인생 중 가장 뜻깊은 일로 단일계단 출범에 일익을 담당한 일을 꼽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승려교육기관인 중앙승가대학이 교육부 인가를 받을 수 있도록 기틀을 다진 데에도 성타 스님의 역할이 컸다. 1979년 전통 승가교육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기관을 목표로 문을 연 중앙승가대는 애초 비구스님들의 교육기관이었다. 현대적인 비구니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한 비구니계에서도 1981년 서울 성라암에 한국비구니대학을 설립했다. 그러나 전통강원과는 다른 형태의 교육기관이었기에 보다 많은 교수진과 학생을 필요로 했고 비구와 비구니의 분리된 교육 형태로는 효용성이 크게 떨어졌다. 장기적으로 두 교육기관을 합쳐야 교육부 인가를 받을 수 있다는 의견들이 나왔지만 비구와 비구니가 한 공간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것에 반발하는 노스님들도 적지 않았다.

이때 교무부장이었던 성타 스님이 중재자로 나섰다. 스님은 승가교육 행정 실무책임자로 양측 관계자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남녀가 함께 공부하는 것은 세간에서조차 일반화된 교육방식으로, 이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어렵게 설립한 승가교육기관이 지속성을 갖기 어려울 수 있음을 일깨우려 애썼다. 처음 크게 반발하던 원로·중진스님들도 성타 스님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고, 1982년 2월 한국비구니승가대학을 중앙승가대에 합병하기로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중앙승가대는 승가교육 중심도량으로서의 위상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성타 스님은 포교분야에도 뛰어난 성과를 남겼다. 1994년 종단개혁 후 포교원이 별원으로 독립한 후 용주사 정락 스님의 뒤를 이어 1995년 11월 제2대 포교원장에 취임했다. 스님은 불자들에게 소속감과 정체성을 심어줄 수 있는 신도등록사업을 시작했고, 파라미타청소년협회, 교사불자연합회 등 창립을 이끌었다. 뒤늦게 자동차 운전면허를 취득한 스님이 직접 차를 몰고 전국 각지의 신행단체에 법문하러 다닌 것은 지금도 유명하다.

“수행과 포교는 부처님이 가장 강조했던 사항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법을 펼쳐야겠다고 결심하신 후 300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 다섯 비구를 찾아갔습니다. 위없는 법을 깨달아 홀로 즐거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포교가 없으면 결단코 불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불자에게 포교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성타 스님은 일반인부터 고위관리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부처님 가르침으로 이끌었다. 포교를 잘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사물에도 감동을 주고, 자연에도 감동을 줘야합니다. 그러면 감동을 어떻게 줄 수 있느냐, 그것은 정성이 뒤따라야 합니다. 정성이 없으면 그 무엇도 절대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여러 현대적인 포교방법론이 있겠지만 핵심은 항상 정성입니다.”

2003년 성타 스님이 경주 불국사 주지로 있을 때 이제는 고인이 된 정영호 박사 등과 뜻을 모아 (재)성림문화재연구원을 발족시킨 것도 의미가 크다. 예전보다 좋아졌다고는 하나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한 문화재 형상 변경 및 파괴가 여전히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신라문화권을 대표하는 사찰인 불국사가 앞장서 매장문화재유적의 효율적인 조사와 보존, 유적 출토 매장문화재의 보관 및 관리라는 현안 해결을 위한 문화재 전담기관을 설립했다. 성타 스님은 이사장을 맡아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직원들도 이에 부응해 숱한 성과를 냄으로써 문화재청으로부터 우수기관상을 받는 등 단시간에 국내 대표적인 문화재 조사발굴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경주지역에서는 성타 스님을 ‘경주 경실련 공동대표’로 기억하는 이들이 더 많을 정도로 NGO 분야에서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다. 대인지뢰대책회의 공동대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 등 스님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참여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환경과 생태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 1993년 사단법인 대자연보전환경협의회장을 비롯해 조계종 초대 환경위원장, 경주 생명의 숲 공동대표 등 환경단체를 잇따라 결성해 이끌었다.

“과학이 발달해 생활이 편리해지더라도 환경이 파괴되면 모두 공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는 ‘시다천억불 발대청정원(侍多千億佛 發大淸淨願)’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천억의 많은 부처님을 모시고 크고 청정한 원을 일으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천억의 부처님은 76억 사람만이 아닌 뭇 생명 모두를 부처님으로 모셔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곳곳에 부처님 아니 계신 곳이 없으니 하는 일마다 불공을 드리는 일처럼 대하라는 ‘사사불공 처처불상(處處佛像 事事佛供)’과도 상통하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 모두가 부처님입니다. 이것을 알고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 그게 바로 불교 환경운동입니다.”

환경운동은 ‘생활 속 실천운동’이라는 성타 스님은 검소함이 일상에 깊이 배어있다. 물을 아끼고 폐수를 줄이려 비누를 사용하지 않을뿐더러 글을 쓸 일이 있으면 지금도 팸플릿 뒷면을 활용한다.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도 오랜 생활습관이다. 그러다보니 여럿이 음식점에 가면 양 조절이 쉽지 않고 부득이 먹어야할 음식들이 많아 살도 많이 불었단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 혼자든 여럿이 가든 미리 양을 적게 달라고 음식점 주인에게 신신당부한다.

스님의 삶은 “배려와 하심”이라는 말로 귀결된다. 이는 은사였던 월산 스님이 상좌들에게 늘 당부했던 말이기도 하다. 1941년 울산에서 태어난 스님은 1952년 불국사 월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한국전쟁 막바지였던 그 무렵 불교계도 세간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 성타 스님은 “불교에선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 모두가 부처님”이라며 “이것을 알고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 그게 바로 불교환경운동”이라고 강조한다.

출가하고 몇 해 뒤 비구승과 대처승의 갈등이 불교정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성타 스님은 조계사에서 문중 최고 어른인 금오 스님을 시봉했고, 효봉 스님과 동산 스님 같은 분들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다시 몇 해가 흘러 스님은 경을 깊이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는 경을 공부할 수 있는 강원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성타 스님은 18살 되던 해 당대 최고 강백으로 꼽히는 운허 스님이 강사로 있는 통도사로 향했다. 하지만 스님이 통도사에 갔을 때 강원에 인원이 꽉 차 결원이 되기까지 대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누군가 극락암에서 경봉 스님을 시봉하면서 기다리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스님은 이 말을 듣고 극락암에 찾아갔고, 그곳에서 부엌일을 담당하는 공양주를 맡았다. 경봉 스님은 이런 성타 스님을 기특하게 봤는지 매일 아침 경전을 직접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스님은 매일매일 ‘능엄경’과 ‘금강경’을 배울 수 있었다. 1년이 지났을 무렵 여전히 통도사 강원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대신 범어사의 아는 스님으로부터 이곳 강원에서 공부할 수 있으니 서둘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조계종 단일계단 설립에 기여
중앙승가대 인가 기틀도 다져

파라미타 등 신행단체 창립
전국 각지 찾아다니며 법문

경주 경실련·NGO 이끄는 등
바람직한 종교인 활동 롤모델

비누·세제 등 사용하지 않고
글 쓸 때는 팸플릿 뒷면 활용

음식 안 남기기도 생활 철칙
‘연명십구관음경’ 틈틈이 염송
간결하면서 내용도 좋아 권유

한국불교 대중 신뢰 높이려면
스님이 스님다워지려 노력해야

성타 스님은 경봉 스님을 뵙고 다음날 떠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경봉 스님은 내일 아침 길을 나서기 전에 자신의 방에 들르라고 말했다. 스님은 다음 날 짐을 꾸리고 경봉 스님을 찾았다. 경봉 스님은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두툼한 봉투를 꺼내 성타 스님에게 건넸다. 봉투에는 100만환이 들어있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해도 100만원이 넘는 큰돈이었다. 성타 스님은 바랑에 차비밖에 없었지만 자신이 이 돈을 다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공부를 위해 온 것이지 돈을 벌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스님은 자신에게 꼭 필요한 30만환만 빼고 나머지는 경봉 스님께 그대로 돌려드렸다. 그러고는 곧장 범어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범어사 강원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공부한 성호(星昊) 스님이 강사로 있었다. 스님은 범어사에서 ‘대승기신론’을 배웠다. 그러나 경전보다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주지로 있던 동산 스님이었다. 금오 스님을 시봉할 때 동산 스님을 지근에서 본 적은 있지만 그 가풍까지는 알 수 없었다. 허나 범어사에서 만난 동산 스님은 말 그대로 선지식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터럭만큼도 계율에서 어긋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을 대중과 함께 했다. 새벽예불에 빠지는 일이 없었고, 공양도 늘 대중들과 함께 했다. 아침마다 직접 비를 들고 도량을 청소했으며, 간혹 누군가를 질책할 때면 서슬이 퍼럴 정도로 엄격했다. 성타 스님은 동산 스님을 지켜보며 출가자는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되돌아보고는 했다.

그렇게 다시 1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통도사 강원에서 공부하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사연을 들어보니 통도사 강원에서 자신의 거취 문제가 논란이 됐다. 누구는 별다른 노력 없이 쉽게 강원에 들어오고 누구는 1년을 기다려도 못 들어오고 떠나게 하는 게 과연 타당하냐는 것이었다. 논란 끝에 극락암에서 1년간 공양주를 살았던 성타 스님에게 기회를 주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고 했다. 성타 스님은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 다시 통도사로 향했다. 통도사 강원에서 40~50여명의 학인들과 대중생활을 하며 운허 스님으로부터 ‘대승기신론’ ‘원각경’ 등을 배웠다. 훗날 성타 스님은 용주사 역경연수원 1기생으로 2년간 운허 스님을 더 모시고 공부할 수 있었다.

“운허 스님은 참 대단하신 분입니다. 경전에 대한 해박함은 이루 헤아리기 어렵고 인품도 참으로 훌륭하셨습니다. 결코 다른 분 허물을 말씀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진중하셨기에 스님께서 한 말씀 하시면 따르지 않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통도사 강원을 졸업한 스님은 홀로 공부를 계속했고 법주사승가대학 강사로도 지냈다. 그리고 은사 월산 스님을 도와 불국사 총무 등을 맡았다. 월산 스님은 불국사를 비롯해 조계사, 법주사, 동화사, 선암사 등 큰 절 주지를 지냈고 조계종 총무원장까지 지냈기에 상좌로서 도울 일이 적지 않았다. 상좌인 성타 스님에게 비춰진 월산 스님은 깊은 수행경지와 더불어 물욕을 초월한 선승이었다. 월산 스님은 자신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을 주변에 나눠주고 일체 소유하지 않았다.

성타 스님은 크고 작은 소임들을 맡았고 자의반 타의반 조계종 중앙종회의원도 제6대부터 제11대까지 역임했다. 그런 와중에도 스님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에 좋은 불교서적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독학으로 일본어를 공부해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스님은 ‘금오집’을 편찬하고 논문 집필에도 관심을 기울여 ‘백암사상’ ‘경허선사의 선세계’ ‘경허선사와 한말의 불교’ ‘한국불교와 사회적 성격’ 등을 발표했다. 현대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다양한 문헌을 섭렵하고 불교현장에서 고민한 내용이었기에 논문에 대한 평가도 좋았다.

젊은 날 간경과 참선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성타 스님이 십수 년 전부터 염불하듯 늘 입에 달고 사는 것이 ‘연명십구관음경(延命十句觀音經)’이다.

“관세음 나무불 여불유인 여불유연 불법승연 상락아정 조념관세음 모념관세음 염념종심기 염념불리심(觀世音 南無佛 與佛有因 與佛有緣 佛法僧緣 常樂我淨 朝念觀世音 暮念觀世音 念念從心起 念念不離心).”

‘태평어람(太平御覽)’ ‘불조통기(佛祖統紀)’ 등 중국 당송문헌에 언급되는 ‘연명십구관음경’은 민간에 널리 회자되다가 일본에서는 에도시대부터 출가자와 재가자들 사이에서 두루 염송된 42자의 짧은 경전이다. 성타 스님은 이 경전이 간결하면서 심오하고 읽기도 편해 혼자 있을 때는 소리 내서 외운다. 그러면 소록소록 신심이 더 난단다.

스님은 요즘 불자들이 줄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안타까움이 앞선다. 꼭 숫자로 따질 일은 아니지만 신심은 희박해지고 스님들에 대한 신뢰는 날로 떨어지는 상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스님이 대만불교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만은 오랫동안 기독교인이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70~80%가 불자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 같은 일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곳 스님들의 피나는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복지에 관심이 있는 스님은 복지로, 의료에 관심 있는 스님은 의료로, 교육에 관심이 있는 스님은 교육으로, 봉사에 관심이 있는 스님은 봉사로 수많은 스님들이 제각각 사회에 기여하고 불교의 위상을 세우려 노력했다는 점을 기억해야합니다.”

성타 스님은 우리 사회에서 불교인들이 신뢰를 얻으려면 스님은 스님다워야 하고, 불자는 불자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스님다움’이란 계율을 지키고 수행하며 전법에 노력하는 것이며, ‘불자다움’은 부처님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신념을 갖추고 불교정신을 가정과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4차 산업시대에 불교는 우리들 노력 여하에 따라 시대를 이끄는 종교로 자리매김하거나 대중들의 외면을 받는 도태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는 게 스님의 지적이다.

훗날 자신을 아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생각하며 살던 스님’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성타 스님. 2562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님은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에 담긴 의미를 들려주었다.

“자신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고, 법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는 부처님 말씀입니다. 여기서 자등명은 수행을 통해 스스로의 불성을 회복해야 함을 일컫고, 법등명은 어두운 사회에 등불을 밝힌다는 의미입니다. 자등명과 법등명이 함께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불국토입니다. 불국토는 멀리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가 수행과 전법으로 이루어가는 세상입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440호 / 2018년 5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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