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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에게 선물 받은 지장경, 독송이 가져온 놀라운 인연

기자명 법보신문

포교원장상-정여원

▲ 그림=근호

남편 사업으로 중국서 10년 가까이 살다 한국에 귀국한지 1년 남짓 됐다. 북경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던 딸은 어느덧 훌쩍 자라 올해 대학교에 입학했다. 10년 전 딸은 “니하오” “짜이지엔” 인사말만 배우고 입학한터라 가끔 오줌도 지리고 오고 똥도 묻혀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중국어도 늘고 친구도 사귀며 잘 적응을 해갔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어느 날 아이 머리에 동전만한 크기로 머리카락이 빠져 있는 걸 보았다. 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와 있던 터라 병원을 찾았다. 의사선생님은 아이의 머리를 보더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어린 아이에게 원형탈모가 생겼을까”하셨다.

딸아이 친구 엄마 따라 간 절
스님에게서 ‘지장경’ 선물받아

건강이 나빠 숙면 못 취했으나
두 번 독송하고 오랜만에 숙면

매일 ‘지장경’ 독송하면서 참회
욕심 버리니 가족 화목 찾아와

중국 집주인 할아버지의 죽음
‘지장경’독송하니 꿈에 감사 전해

‘지장경’에 가피 느낀 할머니도
“불교 믿겠다”며 고마움 표현

불자로서 말과 행동 더욱 조심
자비심으로 세상 살기를 발원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자식이라곤 달랑 딸 하나인데 아이가 이렇게 병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난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용서가 안 됐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녹녹치 않았다. 남편의 사업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고 아이도 학교생활을 힘들어 했다. 나 역시 건강이 좋지 않아 늘 약을 달고 살았다. 어느 날 한국에 잠시 들어 왔을 때 오래전 알던 아이 친구의 엄마를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다.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고 나니 대뜸 그 엄마가 나에게 “낯빛이 안 좋아요”했다.

나는 뜬금없는 소리에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엄마는 뭔가 눈치를 첸 듯 “시간 괜찮으면 나랑 절에 가볼래요?” 하면서 며칠 전 팔공산 갓바위에 갔다 오면서 뵈었던 스님 얘기를 늘어놓았다. 눈이 반짝반짝하니 예사롭지 않은 비구니 스님이란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다음날 그 엄마와 그 비구니 스님이 계시는 암자로 갔다. 일흔이 넘으신 스님이신데 정말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뭔지 모를 아우라가 느껴졌다. 스님은 가만히 미소를 지으시면서 책 한 권을 내어 주셨다. ‘업설지장경’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책을 꺼내 보았다. 묵직하니 지루해 보이기만 한데 스님은 내게 왜 이 책을 읽어보라 하셨을까. 그날 두 번을 정독했다. 나는 평소 꿈을 자주 꾸어 숙면을 취해 본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날은 어찌 된 일인지 꿈도 안 꾸고 편하게 잠을 잤다. 나는 전날 암자에 올라가느라 몸이 피곤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날 ‘지장경’을 정독해 두 번을 더 읽었다. 그런데 다음날 밤에도 숙면을 취했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님을 뵈어야 했다. 딸이랑 동행을 했다. 스님은 여전히 미소로 반갑게 우릴 맞이해 주셨다. 스님께서 ‘지장경’을 읽어 보았냐고 물으셨다. 나는 이틀 동안의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스님은 다른 말씀은 없이 “그럼 됐다. 열심히 읽어봐요”라고만 했다.

중국으로 돌아와 매일 ‘지장경’을 읽으며 조금씩 스님의 뜻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지장경’을 읽기 전까지 나는 남편을 원망했고, 아이에겐 죄책감으로 미안해했다. 대화만 하면 화를 내고 싸우게 되니 남편인들 어찌 마음 편히 바깥일을 할 수 있었을까? ‘지장경’을 읽으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나의 욕심이 가족을 힘들게 하고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늦게나마 스님을 만난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지장경’을 읽기 전과 후의 나의 생각은 정말 많이 달라졌다. 남편은 사기도 많이 당했고 사업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원망한다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적은 생활비라도 항상 “고마워, 아껴 쓸게”라는 말을 달고 살았고 “다 잘 될 거야, 난 당신을 믿어”라며 위로를 했다. 나의 진심을 느낀 남편 또한 어느 순간부터 내게 “고맙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딸아이에게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대학에 가기 전까지 공부하란 소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이가 내게 물었다.

“엄만 왜 다른 엄마들처럼 공부하라고 안 해?”

“공부 안 해도 돼, 그냥 일찍 자. 건강한 게 최고야” 그러면 “싫어, 공부하다 잘거야” 하면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리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딸아이는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입학했다. 아직 남편의 사업이 잘 되진 않지만 우리 가족은 그럭저럭 밥 먹고 살고 있다.

‘지장경’을 읽고 사경을 하며 기도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중국에서 세를 얻어 살던 집 주인은 조선족 할아버지, 할머니셨다. 어찌나 정이 많으신지 우리 가족이 불편함 없이 살게 해 주시려고 많이 애를 써 주셨다. 덕분에 우린 그 집에서 6년을 살았다. 그런데 6년째 되던 해 할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장례가 끝나고 딸집에 머물다 한 달 뒤 고향으로 돌아 오셨고 며칠 후 나를 찾아 오셨다. 그 곱던 할머니의 수척해 진 모습을 뵈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할머니도 나를 보자마자 “딸처럼 여기며 그렇게 챙기더니…”하시며 나를 안고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셨다.

조금 진정이 되셨는지 할머니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자네 종교가 불교라 하지 않았소?”
“예, 맞아요. 저 불교에요”
“그럼, 자네 혹시 ‘지장경’이라는 경전을 아오?”
“알죠. 제게도 그 책이 있는 걸요.”

그리고선 얼른 책상 위에 있던 ‘지장경’ 책을 보여 드렸다.

“내 영감 떠나고 신경을 써서 밥도 못 먹고 몰골이 이래 있으니 누가 말 합디다. ‘지장경’이라는 책을 읽으면 영감도 좋은데 가고, 내 마음이 좀 편해질 것이라고, 한국 사람한테 물어보라 해서 내 자네한테 이리 물어 보오.”

정말 기이한 인연이 아닌가? 사실 스님께서 주고 싶은 사람 있으면 주라고 하셨던 경전 한 권을 여태 가지고 있던 터였다. 이 먼 나라까지 와서 조선족 할머니와 ‘지장경’에 대해 얘기를 나누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할머니께 연세가 있으셔서 하루 한 번씩 읽는 건 힘드시니 매일 조금씩이라도 읽으시는 걸 권해드렸다. 그리고 염주를 돌리며 ‘지장보살’ 염하시면서 주무시라고 합장주도 같이 챙겨 드렸다. 그렇게 할머니께서 가신 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좀처럼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너무나 야위신 할머니 모습이 다시 떠올라 마음이 아파왔다.

경전을 읽고 부처님과 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면 죽은 이가 모든 악도에서 벗어나 좋은 곳으로 간다고 ‘지장경’에 쓰여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지장경을 정독하고, 지장보살을 염하며 할아버지께서 극락왕생하시길 정성을 모아 기도를 했다. ‘신해행증’이라 했던가? 정말 그날 밤에 신기한 꿈을 꾸었다. 꿈에 할아버지께서 오셨다. 멀찍이 떨어져서 내게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할아버지와 같이 있던 다른 영가들도 내게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며칠 뒤 할머니께서 갑자기 따님과 함께 찾아 오셨다. 과일을 잔뜩 사들고 들어오시면서 “자네 말이 딱 맞았소. 내 그날 저녁부터 책도 읽고 ‘지장보살 지장보살’ 하면서 염주도 돌렸더니 그날 밤 어찌나 편하게 잠을 잘 잤는지 아오? 입맛도 좋아져서 밥도 잘 먹고 이제 기운도 좀 나오. 내 그래서 자네가 얼마나 고마운지 과일이라도 좀 사다줘야겠다 싶어 이래 찾아왔소.”

할머니의 전보다 한결 좋아보였다. 나는 며칠 전 꾼 꿈 얘기를 해드렸다. 할머니는 꿈 얘기를 다 들으시고 내 손을 꼭 잡으시며 “정말 고맙소, 내가 이 은혜를 어찌 다 갚겠소?”하셨다. 그러면서 “나도 불교를 열심히 믿어 봐야겠소. 우리 딸도 자네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자네를 보고 불교를 믿겠다고 이리 같이 왔소” 하셨다.

나로 인해 불교를 믿어야겠다는 그 말이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오히려 할머니께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할머니께는 내가 가진 천주를, 따님에겐 ‘법화경’을 선물로 드렸다.

그날 이후 나는 불자이기에 더욱 말과 행동에 주의를 했다. 불자로서 나의 언행이 다른 이로 하여금 어떤 결과를 낳게 하는지 확연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작년 이맘 때 쯤 한국에 들어 왔을 때 내가 느낀 한국의 이미지는 ‘치열함’이었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새벽부터 정말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여유롭던 내 마음도 갑갑하고 숨이 막혀 오는 듯했다. 또한 현재 사회는 부정부패, 성폭행, 갑질, 묻지마 폭행 등 내 아이가 커 가는 것이 두려울 만큼 무섭게 변해 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 마음속에 ‘자비심’이라는 세 글자만 새기고 살면 조금은 우리 사회가 여유롭고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하고.

[1440호 / 2018년 5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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