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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 불교사의 주역] 3. 선종사의 거장

세속 있어도 연꽃향 뿜어냈던 방거사와 배휴 그리고 이자현

▲ 유마거사는 당송 시대 이래 거사들의 이상이었다. 그림은 원나라 왕진붕의 유마불이도(維摩不二圖).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시간이 지날수록 매우 다양한 이론들을 펼쳤다. 가령 대승불교에 이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2500년 전 인도에서 처음 성불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전부터 이미 성불한 상태였다[久遠成佛]는 관점이 제기되었다. 이런 견해는 비단 부처님뿐 아니라 중생 역시 본각(本覺)의 상태, 즉 본래부터 깨달아 있다는 통찰로 연결된다. 이러한 경향의 불교에서는 중생 자신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철저히 자각할 것을 강조하는데, 그것의 가장 첨단에 돈오(頓悟)를 내세우는 선종(禪宗)이 자리 잡고 있다. 선종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많은 얘기가 있지만, 7세기 이후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선종만큼 강력한 영향을 끼친 가르침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방거사, 인도 유마거사에 비유
깨달음은 특별한 곳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 있음 명확히 해
무생 이치 남김없이 열어 보여

배휴, 규봉종밀 등 선사와 교유
당 말기 격동 정세에도 고위직
정신세계 항상 고요했던 수행자
종밀 선사와 선문의 갈래 선명히

이자현, 고려에 선종 정착 으뜸
설봉의존 선사의 어록 구절에서
깨달은 후 불조혜명 막힘 없어
신분고하 승속 막론하고 ‘귀감’

본래 구원된 자신의 모습을 선종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 부른다. 이는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이 평등하게 열려 있으므로,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이 길에 뛰어들어 자신의 본래면목을 확인하려는 이들이 급증했다. 선종사는 주로 보리달마나 육조혜능 같은 출가자의 자취에 초점이 맞춰져 기술되곤 하지만, 그 속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출가자 못지않게 빛나는 모습을 보였던 재가 거사들이 드러난다. 이들이 지닌 높은 식견과 고매한 행동은, 마치 연꽃이 진흙탕 속에서도 오염되지 않고 피어나듯, 세속에 처해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는 자유인의 경계를 보여준다.

중국 선종사에서 인도의 유마거사에 비견되는 인물로 방거사(龐居士)를 들 수 있다. 그는 석두희천과 마조도일과 같은 남종선(南宗禪)의 대가들이 활발한 교화를 펼치던 시기 그들과 만남을 통해 자신의 견처(見處)를 점검하였다. 이후 가는 곳마다 노장들과 번갈아 문답했는데, 마주한 이들의 근기에 맞추어 마치 메아리가 울리듯 응대했다고 한다. 선문헌에 자주 나오는 ‘만법과 짝하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서강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신다’는 등의 문구는 다 방거사와 관련된 것들이다. 방거사는 선(禪)의 깨달음이 펼쳐지는 장이 특별한 곳이 아닌 평범한 일상의 삶 속에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석두 선사가 어느 날 거사에게 일상의 생활이 어떠한지를 묻자, 거사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입을 열 곳이 없지만 굳이 말한다면 ‘특별할 것이 없다’고 답하였다. 이는 마조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같은 맥락이다. 즉 진리는 우리가 마주한 일상에서 구현되는 것이므로, 이를 떠나 따로 특별한 그 무엇을 찾을 일이 아니라는 점을 설파한 것이다.

방거사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선의 진리를 몸소 깨닫고 실천하였다고 전한다. 그가 입적하기 직전 거사의 딸인 영조(靈照)가 그보다 먼저 자재한 모습으로 좌탈(坐脫)해버린 얘기는 아주 유명하다. 그로 인해 거사는 자신의 입적 시기를 일주일 늦추었고, 자신의 마지막을 지키던 주(州)의 목사에게 ‘있는 것은 텅 비우시고, 없는 것은 진실이라 여기지 마시오’라는 최후의 한 마디를 남겼다. 오대 시기의 선사인 영명연수(永明延壽)의 ‘종경록’에서는 방거사의 마지막 여정을 ‘유와 무에 떨어지지 않고, 무생(無生)의 종지를 묘하게 얻었다.’고 평하였다.

거사의 유언은 참으로 간결하다. 우리는 보통 유와 무의 대립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형상을 갖고 이 세상에 드러나 있는 것들에 대해 텅 빈 공(空)의 관점으로 보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공무(空無)나 허무(虛無)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사물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고정된 유와 무에 대한 견해를 벗어날 때 이 세계는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데, 그 장이 바로 우리의 일상이다. 그리고 그 생생한 일상의 경험 속에서 무생(無生)의 이치를 남김없이 열어 보였던 인물이 바로 방거사이다.

세속에 있으면서 초연한 수도자의 모습을 보였던 방거사와는 달리 고위관직에 있으면서 선의 가르침을 크게 선양했던 인물로 배휴(裵休, 791~864) 거사를 들 수 있다. 그는 규봉종밀(780~841), 황벽희운(?~850) 같은 당대의 쟁쟁한 선사들과 교유하였다. 배휴는 종밀의 저술에 대해 여러 편의 서문을 지었고, 종밀이 입적한 뒤에는 그의 비문을 짓기도 했다. 또한 황벽의 법문 중 ‘전심법요’와 ‘완릉록’은 모두 배휴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온 것이다.

청의 팽제청(彭際淸)이 쓴 ‘거사전’에는 배휴가 어린 시절 겪었던 기이한 일이 전해진다. 청량산에서 온 어떤 이승(異僧)이 그에게 사리 3과와 편지 한통을 주었는데, 편지는 범어로 씌어져 있어서 읽을 수가 없었다. 범어를 아는 이를 구하여 풀이해보았더니, ‘대사(大士)는 세속에서 거닐고 소사(小士)는 출가에 머문다. 불도를 구하고자 하면 어찌 홍진(紅塵)을 떠나겠는가’라고 적혀 있었다. 이 편지의 내용처럼 배휴는 당 말 격동하는 정세 속에서 줄곧 높은 관직에 머물렀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늘 고요히 선의 근원에 다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종밀의 저술 가운데 ‘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라는 책은 당시 복잡하게 분화되었던 선종의 근원과 갈래에 대해 배휴가 묻고 종밀이 답한 내용이다. 배휴와 같은 명석한 질문자가 있었기에 종밀 역시 그에 호응하여 선문의 갈래를 보다 선명히 보여줄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종밀이 입적한 이후 배휴는 황벽에게 귀의하여 조석으로 그의 가르침을 청해들었다. 그가 종릉(鍾陵)과 완릉(宛陵)의 두 곳에서 벼슬할 적에 황벽에게서 들었던 법문을 펴낸 것이 바로 ‘전심법요’와 ‘완릉록’이다. 이 두 책에서 배휴는 마치 모든 중생의 의문을 대변하듯, 집요한 태도로 황벽과 문답을 펼쳐간다. 여기서 그는 도, 마음, 망념 등과 관련된 난점들을 정확히 제기함으로써 황벽의 예리한 기봉(機鋒)을 끌어내고 있다. 후세인들이 황벽의 선이 지닌 고준한 기상을 고스란히 접할 수 있게 된 데는 홍진(紅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선의 정수를 전하려 했던 배휴의 정성스러움이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말 고려 초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선풍이 한반도에 전래되었다. 이러한 선풍은 꽤 오랜 시간이 흘러 보조지눌(1158~1210)과 진각혜심(1178~1234)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국적인 특색을 갖춘 선종으로 정착되었다. 보조 이전 시기 고려에서 한국선종의 정착에 힘쓴 인물로는 단연 청평거사 이자현(李資賢, 1061~1125)을 들 수 있다. 이인로의 ‘파한집’에 따르면, 해동에 심법(心法)이 유포된 데는 이자현의 공로가 지대했다. 이자현은 24세에 진사가 된 뒤 줄곧 벼슬길에 머물렀지만, 갑자기 아내를 잃은 후 청평산에 들어가 문수원을 짓고 살게 된다.

이자현은 설봉의존 선사의 어록 가운데 ‘온 천지가 다 눈[眼]인데, 너는 어디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가?’라는 구절에서 활연히 깨달은 이후 불조의 가르침에 막힘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많은 불경 가운데서도 특히 ‘능엄경’을 중시했는데, ‘능엄경’의 유행은 고려 중기 선의 특징 중 하나로 꼽힌다. 이자현이 ‘능엄경’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이 경이 심종(心宗)에 부합하고, 또한 수행의 핵심적인 길을 제시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선을 공부하던 이들 가운데 이 경에 관심을 가진 이가 적은 것을 탄식하며, 문하의 제자들에게 ‘능엄경’을 배우게 하였다. 그래서 1121년 왕명으로 능엄법회를 열 때는 제방의 배우는 이들이 모여 그의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이자현의 풍모는 당시 국왕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다. 예종(睿宗, 1079~1122)이 누차 그를 만나고자 하였지만, 그는 번번이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다 오늘날의 서울인 남경(南京)에서 둘 간의 만남이 이뤄진다. 그 자리에서 왕은 이자현에게 수신(修身)과 양성(養性)의 핵심을 물었고, 이자현은 ‘성품을 기르는 데는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고인의 말씀을 들어 왕에게 아뢰었는데, 이 말을 들은 왕이 찬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소박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 한 마디가 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데는 아마 생각과 행동이 일치했던 이자현의 평상시의 모습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을 통해 마음이 활짝 열린 이자현의 선풍은 신분의 고하와 승속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던 것이다.

▲ 박인석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선종의 가르침을 대표하는 ‘육조단경’에서 혜능은 재가(在家) 수행을 철저히 긍정하였다. 가령 그는 ‘선지식이여, 수행하고자 하면 재가에서도 가능하니, 절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에 있으면서 수행하지 않는 것은 마치 서방에 살아도 마음이 악한 사람과 같고, 재가에 있으면서 수행하는 것은 동방에 살아도 선업을 닦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선종의 유심정토(唯心淨土)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나온 내용으로, 출가와 재가의 구분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마음의 전환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상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 마음에서 전환이 일어날 때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선(禪)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니, 재가자들로서도 분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1440호 / 2018년 5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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