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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 불교사의 주역] 5. 21세기 우바새 위상과 역할

삶의 현장에서 당당히 자신을 펼쳐나가는 거사상 구현해야

▲ 불교사에 적지 않은 족적을 남겼음에도 그 위상이 굳건하지 못한 거사들이 21세기에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은 시기다. 사진은 익산불교신도연합회 자비연탄나누기 발대식.

재가불교가 제대로 서지 못한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재가자들이 출가자들의 삶을 모범으로 삼고 그것을 흉내 내는 것이다. 사부대중은 본디 수평적 분업의 구조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것이 수직적 신분구조로 바뀌어버렸다. 스님들을 받들고 존경하는 것은 많은 사람이 할 수 없고 또 많은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에 자신을 던지는 소수의 전문인에게 바치는 존경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그런 존경이 잘못 이해되어 “사람 위에 스님 있다”가 되어버린다. 그런 높은 존재를 따르는 삶의 모습과 가치가 바로 불교라고 생각되게 된다. 자연히 재가자의 삶은 열등한 삶이요, 이생에서는 열심히 복이나 짓고 다음 생에 출가하여 수행한다는 잘못된 이상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적 삶은 불교에서 소외된다. 생산 활동은 피치 못해서 하는 것일 뿐이요, 성생활 같은 것은 아예 저열한 삶의 표본이 된다. 대기설(對機說)이라는 불교의 근본 입장을 벗어난, 근본출가자와 재가자의 너무나 다른 조건과 상황[機]을 무시하는 비불교적인 모습이 불교 속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활동 중심에 있음에도
당당한 불자로 서지 못한 채
교단 내서 소외세력에 머물러

책임 측면에서 크게 발심하고
이상적 세계·인격 구체성 제시
실천과 수행 일치할 방편 개발
부처님가르침 직업윤리 구체화
이것들을 서원으로 승화시켜
불교 주체로 설때 불교 바로 서

수평적 분업구조 속에서 재가자와 출가자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불교를 바로 세우는 출발점이다. 출가자들은 마음 문제와 수행 문제의 전문가로서, 재가자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모든 힘을 그 분야에 쏟는 전문직에 해당한다. 그리고 재가불자는 스님들이 그렇게 온 힘을 바쳐서 개발한 원칙과 방법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적인 삶을 바로 세워나가고, 이상적인 세계[불국토]를 건설해 나가는 주체이다.

이렇게 재가불자의 역할을 부처님 가르침을 삶 속에 구현하며 이 세상을 불국토로 만드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측면에서는 역시 출가자보다 한 걸음 뒤지는 존재로 되는 것은 아닌가? 재가자가 불교의 이등시민으로 소외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의문은 불교가 불교인 지점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부처님이 알라라 칼라마, 웃다카 라마풋타라는 두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삼매수행의 궁극에 도달하고서도 그 교단을 나온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삼매 상태에서는 괴로움이 없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줄여 말하면 살아가면서도 수행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편, 그것을 통해 행복할 수 있는 궁극적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것이야말로 세계 종교역사 가운데 부처님이 처음으로 열어젖힌 새 물꼬이며, 현실의 우리들에게 참된 희망을 주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우리 재가불자들은 부처님이 터 주신 그 귀한 물꼬를 더욱 큰 흐름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수행과 삶의 일치라는 명제로 주어진다. 삶의 현장이 수행의 장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훌륭한 현실적인 삶을 이루고, 훌륭한 세상을 건설하는 일 자체를 수행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운전을 예로 들어 보자. 교통법규와 운전의 원칙을 지키는 것은 계(戒)학을 닦음이다. 차분하고 집중된 마음으로 운전을 하는 것은 정(定)학을 닦음이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상황을 잘 살피고 운전을 해나가는 것은 혜(慧)학을 닦음이다. 모든 행위 속에 삼학(三學)의 수행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육바라밀의 수행도 익어간다. 마음 닦음 그 자체에 몰입하는 수행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마음을 닦는 수행, 그것이 재가자들의 수행이어야 한다. 물론 집중적인 삼매의 수행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삶 속에서의 수행으로 연결되는 바탕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방거사라든가 부설거사의 모델들이 ‘지금’ ‘여기’의 이상적인 거사상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분들은 그 당시의 한계 속에서, 출가수행자들의 모습을 본 딴 수행의 모습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적인 삶을 일정부분 희생하는 수행자의 모습, 스님과 같은 수행방식을 통해 스님과 교류하는 그러한 모습이 이상적인 거사상이라면, 재가자들은 계속 수행과 삶이 따로 노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출가수행자들에 대한 열등의식 또한 벗어날 길이 없게 된다.

삶과 수행이 따로 노는 불교, 출가자들에 대한 열등감을 기본으로 깔고 있는 불교를 극복하는 것이 건강한 재가불교의 출발점이다. 그러한 바탕 위에 지금 현실에서 우바이들과 구별되는 우바새들의 상황과 조건을 바르게 인식하여 이상적인 거사의 상을 도출해야 한다. 물론 남녀의 구별은 그 고정불변한 본성에서의 구별이 아니고 단지 모습의 드러남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만 일단 모습이 그렇게 형성되어 있다는 조건과 상황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에, 평등을 바탕으로 한 차별적 역할 분담은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랜 역사 속에서 남녀가 형성해 온 특성의 차이가 있고, 또 현실의 위상과 역할에도 남녀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국세청 통계자료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경우는 남녀 CEO의 비율이 각각 72.6%와 27.4%이고, 대기업의 경우 여성 CEO는 6%에 불과하다. 이것이 이상적이든 남녀 불평등을 반영하는 것이든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이다. 그 조건과 상황에서는 우바새들이 담당해야 할 역할과 의무가 크다는 것 또한 현실이다.

당연히 우바새들은 삶의 현장 곳곳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는 구체적 실천 윤리를 세워나가는데 앞장서야 한다. 그 속에 당당히 자신을 펼쳐나가는 불자의 모습을 구현해야 한다. 현실적 삶은 적당히 현실의 논리로 살아가면서, 수행이라든지 특별한 영역에서만 스님 흉내 내는 것으로 ‘거사’임을 드러내는 이중적 삶을 청산해야 한다. 불자이기에 이런 삶을 살아가고, 이런 직업윤리를 통해 올바른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를 했다는 것이 재가불자의 자랑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랜 동안 불교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 세계상을 구체화하지도 못하였고, 현실적 삶을 이끌어가는 윤리를 제시하지도 못하였다. 당연하게도 사회적 활동의 중심이 되었던 우바새들은 당당한 불자로 사회 속에 서지 못하였고, 교단 내에서도 위축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현실 속에서 주로 내조적인 위치를 갖던 우바이들은 불교 교단의 구조 속에서도 스님들을 받들고, 여성성이라는 특성을 발휘하면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했다면, 거사들은 그 구조 속에서도 소외되는 양상을 빚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외를 극복하고 제자리를 찾는 것이 현실에서의 올바른 거사상을 세우는 첫걸음이다.

차별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우바새들은 큰 발심을 해야만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세계[불국토]와 이상적인 인격[부처]의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실천과 수행을 일치시키는 방편을 개발하는데 ‘더’ 열심히 나서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여러 직업의 윤리로 구체화시키며, 그것들을 서원으로 승화시키는 일에 ‘더’ 앞장서야 한다. 욕망이 아니라 서원이 이끄는 삶에는 자연스럽게 계정혜 삼학의 수행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삶의 현장이 바로 수행의 장이어야 한다는 투철한 의식 아래 나의 삶을 바꾸고 우리의 세계를 바꾸는 불교의 모습을 일구는데 ‘더’ 앞장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가 출가자와 재가자의 역할분담과 조화에 관해서도 우바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앞서 사부대중이 수직적 구조가 아니라 수평적 구조라는 것을 강조했지만, 그것이 출가중에 대한 존경과 외호를 소홀히 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올바른 수평적 분업을 위해서도 모든 것을 희생하고 진리추구와 수행의 길에 나선 분들에 대한 존경과 외호는 필수적인 것이며 그것이 화합된 사부대중 공동체를 이루는 기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제대로 인식, 실천하지 못할 때 오히려 서로에 대한 소모적인 비난이 난무하게 된다. 또한 불교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지 못하고 출가와 재가의 관계를 수직적 구조로 이해하게 되면 스님들의 성향과 취향에 매달려 이합집산하는 불협화음이 나올 수도 있다. 그 동안 우바이들이 중심이 된 이른바 ‘보살불교’에서는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위상, 그리고 여성적인 감성에 바탕하여 스님들을 받드는 측면이 두드러졌다 하겠다. 우바새들은 이러한 양상을 보완하면서 출가중과 재가자들의 올바른 역할과 위상에 관한 원칙위에 바람직한 사부대중의 구조를 이룩하는데 좀 더 기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성태용
건국대 명예교수

 

재가자들이 당당한 불교의 주체로 서는 것이 바로 불교가 바로 서는 근본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사회 속에서도, 불교 교단 구조 속에서도 위축되어온 우바새의 위상과 역할이 올바로 서야 한다. 과거의 대승운동은 어떤 측면에선 소외되었던 재가자의 삶을 불교 속으로 건강하게 복귀시키는 운동이었다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보살들이 재가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의 대승운동 또한 재가자를 불교의 주체로 바로 세우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점차로 재가불자들의 위상과 역할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흐름 속에서, 재가자의 조건과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에 걸맞는 실천을 펼쳐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대승운동인 것이다. 그 중심에 우바새가 있어야한다는 사명감으로, 오늘의 대승운동을 펼쳐가는 우바새의 서원을 세워야 할 것이다.

[1440호 / 2018년 5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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