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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경주 미탄사지(味呑寺址)

기자명 임석규

신라 최고 문장가 최치원 고택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이정표

▲ 경주 미탄사지 전경.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최치원은 본피부사람이다. 지금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터가 있다 하니, 이것이 최치원의 옛 집이 분명하다”하는 구절이 있다.

‘삼국유사’ 등장하는 사찰 중
위치가 추정되는 귀한 사례

일제강점기 제작 지도에는
‘폐탑’이라고만 기록돼 있어

1980년 흩어진 탑재 모아
보물 1928호 삼층탑 복원

불교문화재연구소 조사 때
‘미탄’이라 쓰인 기와편 발견

탑과 금당 등 가람의 형태와
미탄사의 사역경계까지 확인

올해 5월8일 다시 조사 착수
사역 내부의 정밀 발굴 기대

경주 황룡사지 남쪽 넓은 들판에는 장중한 석탑이 하나 우뚝 서 있다. 보물 제1928호 미탄사지 삼층석탑이다. 이 탑은 신라 왕경 안에 현존하는 유일한 석탑이자 최초로 기초부가 조사된 석탑이다. 1980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탑 기단부와 그 주위 일부를 발굴 조사하였고, 완전히 무너져서 흩어져 있던 탑재를 모아 복원하였다. 조사 당시 기단부 지하에서 금동불입상, 수정장식, 금동제 영락 등의 지진구(땅속에 있는 나쁜 기운을 누르려는 목적으로 묻어두는 의식용구)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우리연구소가 이 절터를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2013년이었다. 경주에 남아 있는 수많은 절터 중에서 특히 이곳을 주목한 것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사찰 중에서 그나마 위치를 추정하고 있는 귀한 예이고 신라 최고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857~?)의 고택을 찾아갈 수 있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최치원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경주 최씨의 시조이면서 신라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이다. 879년 중국에서 일어난 황소(黃巢)의 난 때 토벌사령관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서 참전하여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은 문장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 미탄명 기와.

사실 이 절터를 처음 미탄사지로 비정한 사람은 일본인 오사까긴타로(大板金太郞)라는 사람이다. 그는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장을 지낸 이로 1932년 발표한 ‘신라폐사지의 사명추정에 대하야’라는 글에서 황룡사지와 최치원의 고택으로 알려진 독서당(讀書堂) 사이에 있는 사지 중 이곳을 미탄사로 비정한 바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 그 어떠한 증거도 없었다. 대정5년(1916)에 발간된 경주지도에도 ‘폐탑(廢塔) 이라고만 표기되어 있었다. 우리연구소에서는 2012년 경주지역에 남아있는 절터들을 조사하면서 ‘삼국유사’에도 등장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사역의 범위와 가람배치, 창폐시기 등 그 실체를 알 수 없이 경작활동으로 인한 인위적 훼손이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미탄사지 주변에는 다수의 왕경유적과 불교유적이 분포하고 있는데, 북쪽에는 분황사, 구황동 원지, 황룡사지 등의 유적이 있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구황동 원지는 지금은 완공된 황룡사 역사문화관 건립예정부지 발굴조사 중 확인되었다. 1999년부터 6년에 걸친 조사결과 대형 원지가 확인되었다. 원지는 7세기~8세기에 축조된 정원유적이며 주변에서 확인된 배수로, 담장, 건물지 등은 원지와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유적은 분황사 동편에 잇닿아 있어서 국찰인 분황사와 관련된 시설로 추정되기도 한다. 황룡사지(사적 제6호)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불사를 시작하여 92년 만에 완성된 대사찰로,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9층 목탑 건립과 함께 완공되었다. 고려시대 고종 25년(1238) 몽골의 2차 침입으로 전소된 후 중수되지 못하였다. 조사지역의 서쪽에는 정비된 동궁과 월지가 있으며, 남쪽으로 고총고분군과 첨성대(국보 제31호) 등이 있다.

▲ 미탄사지 출토유물.

1차 조사는 본격적인 정밀발굴조사가 아닌 시굴조사였다. 시굴조사는 사역 전반에 걸쳐 듬성듬성 참호같은 트렌치를 설치하여 어느 곳에 건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탐색하고, 토층 상황 등을 파악하는 작업이다. 외과의사가 본격적인 수술을 하기 전에 문진과 각종 검사를 하는 과정이라고 봐도 좋겠다. 2013년 5월1일 다례재를 올리고 드디어 대망의 첫 삽을 떴다. 탐색 결과 유적의 전체적인 토층은 아래로부터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자연습지층, 그 위로 건물이 들어설 대지를 만들기 위한 성토층, 신라인들이 생활했던 유구형성층 그리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경작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발굴현장에서 우리의 1차 목표는 경작층을 걷어내고 신라인들이 살았던 층위에 남아있는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이 조사에서는 석탑의 북쪽에서 대형 건물지와 배수로, 담장, 도로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로는 각종 기와와 함께 토제 나한상이 출토되었다. 금당(金堂)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는 정면 8칸×측면 4칸의 규모이고, 건물의 길이가 약 37m에 이르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또한 사찰 동남편 건물지에서 출토된 토제나한상도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비록 하반신이 결실되었지만 왼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오른쪽 손을 뒷머리에 댄 채 탄식하며 절망하는 표정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나한상은 일본 호류지(法隆寺) 5층 목탑 1층 내부의 석가열반상 앞에서 통곡하는 제자상과 매우 유사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2차 조사는 이듬 해 4월21일부터 18일간 진행하였다. 예산이 부족해서 1차 조사보다 일정이 반으로 줄어버렸다. 가뜩이나 조금만 파내려가도 물이 차오르는 현장여건상 너무 짧은 일정 때문에 연구원들이 많이 고생했던 조사였다. 실조사일수는 18일간이었지만 비가 자주 와서 공치는 날이 많아 작업은 지지부진하게 늘어지고 있었다. 황룡사 일대는 경주에서도 유명한 저습지였기 때문에 신라인들은 이곳에 진짜 용이 살았다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사가 5월 하순에 접어들고 완료를 이틀 남긴 어느 날 오후였다. 혼자서 유물세척을 하고 있던 연구원이 기와편 하나를 들고 뛰어왔다. 글자가 새겨진 기와였다. 처음엔 읽어내기가 어려웠지만 탁본을 하니 명확해졌다. 그것은 꿈에 그리던 두 글자 ‘미탄(味呑)’이었다. 드디어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 딱 한 번 등장하는 신라시대 수수께끼의 절 미탄사의 신비가 풀린 것이다. 그동안 추측만 해왔던 미탄사의 위치를 최초로 증명하는 고고자료이며, 더불어 최치원의 옛 집인 독서당의 위치까지 확증하는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이외에도 2차 조사에서는 미탄사지의 북쪽과 동쪽 경계로 추정되는 담장열 4기, 추정 강당지, 추정 종각지 등을 포함한 건물지 2동, 배수로 4기, 방형석조 1기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미탄사지출토 나한상.

두 차례에 걸친 미탄사지 시·발굴조사에서는 ‘나한상’이나 ‘미탄명 기와’ 같이 중요한 유물도 나왔지만, 더 큰 성과는 남문, 탑, 금당, 강당으로 이루어진 가람의 형태가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담장열과 배수로를 통해 사역 경계를 확인한 것 또한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밝혀진 사역 내부를 정밀 발굴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미탄사의 실체에 접근해 들어가는 것이다. 문화재를 발굴해야 하는 이유는 새롭게 확인되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 미처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고고학적으로 복원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2차 조사가 끝나고 4년만인 올 5월8일 미탄사지에서는 다시 한 번 다례재가 봉행되었다. 우리연구소가 3차 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올해도 지하에서는 물이 많이 나올 것이고, 머지않아 무더위도 찾아 올 것이다. 8월까지 하게 되는 이번 조사가 아무 탈 없이 진행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40호 / 2018년 5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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