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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공정무역, 생물종을 다양하게 보존한다

기자명 최원형

생산자·소비자·토지까지 살린 필리핀 ‘마스코바도’

우리 집에서 설탕을 마스코바도로 바꾼 지는 꽤 된다. 마스코바도는 정제하지 않은 설탕을 부르는 고유명사다. 필리핀 네그로스 섬에서 사탕수수 농사를 짓는 농민들을 후원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마스코바도란 이름이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졌다.

필리핀서 시작된 설탕 공정무역
소비하면 농민위한 후원금 적립
농민자립 도움주는 선순환 투자
조금 비싸지만 상생위한 최선책

프로젝트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내가 500g 짜리 마스코바도 한 봉지를 사면 네그로스 섬 주민을 위한 후원금 100원이 적립된다. 이 돈이 모여서 네그로스 주민들에게 낮은 이자로 소액 대출을 해주고 주민들은 그것을 종자돈으로 해서 농사일을 하게 된다. 사탕수수를 나르기 위해 중고 트럭도 살 수 있게 되었고 멀리서 물을 길어오느라 힘들었는데 대출받은 돈으로 동네에 우물을 마련하기도 했다. 여유가 조금 생기자 가축을 사서 길렀다. 가축은 농사일에도 노동력을 보탤 수 있고 새끼를 낳으면 그것이 자산이 되기에 농민들에게 여러모로 이롭다. 지금까지 대출받은 빚을 갚지 않은 농민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

마스코바도는 일반 설탕에 비해 단맛은 좀 덜한데 대신 사탕수수에 함유되어 있는 다양한 미네랄, 칼슘, 인, 단백질 등이 풍부하다. 정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격은 일반 설탕의 4배 정도 된다. 가격을 생각하면 손이 가지 않지만 설탕을 많이 먹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내가 산 설탕 한 봉지가 누구에겐가 힘이 된다는 걸 생각하면 마스코바도를 사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과거에 필리핀 네그로스 섬은 워낙 토질이 비옥해서 그곳에 사는 농민들은 농사만으로도 먹고 살기에 충분했다. 그러다가 1920년대 설탕사업으로 이윤을 보려는 외국 자본가들과 필리핀 국내 지주들이 네그로스 섬의 땅을 죄다 사들였고 숲까지 벌목하며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었다.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한순간에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가 됐다. 그러다 설탕 값이 폭락하면 실업자가 되었고 굶어 죽는 일마저 비일비재했다.

시대가 바뀌었고 농민들도 새로운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땅을 갖고 있던 네그로스 섬 주민들은 잘 사는 나라의 생각 있는 소비자들에게 유기농 설탕을 만들어 팔기로 했다. 이렇게 시작된 게 바로 마스코바도 공정무역이다. 공정무역이란 말이 생겨난 것만으로도 그동안 무역은 공정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생산자에게도 소비자에게도 공정한 거래를 하자는 의미다.

지난 토요일은 세계공정무역의 날이었다. 해마다 5월 둘째 주는 공정무역의 날이다. 힘든 노동을 견디고 무언가를 생산한 생산자가 그 노력에 턱없이 부족한 대가를 받게 된다면 일할 의욕도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장의 생계가 어려워진다. 생산자가 물질적 정신적으로 피폐한 환경에 처할수록 생산물의 질 또한 좋아질 리 없다.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먹고 입고 쓰는 것들을 누가 생산하는지에 관심을 갖기 힘든 구조가 돼 버렸다. 생산자 얼굴은 가려진 채 기업의 로고만이 우리와 대면하기 때문이다. 얼굴을 알 수 없으니 생산자가 얼마나 힘들게 마련한 것인지 알 기회가 사라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이왕이면 싼 걸 선호할 수밖에 없다. 소비자가 대면하는 것이 기업이니 기업의 논리대로 따라갈 수밖에…. 그러니 생산자의 수고로움과 생산지의 생태 환경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는 가격 형성에 영향을 주기 어려운 구조다.

이렇게 되다보니 생산자와 소비자는 대등한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거래가 공정하지 않으니 생산자 입장에서는 소비자의 입장을 고려할 여유가 사라졌고 소비자 입장에서도 생산자의 처지를 고려할 기회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누가 손해일까? 너무 뻔한 질문인가? 모두가 손해라는 건 너무나 명백하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갈 때 그걸 상생이라 부른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더불어 상생하려면 공정한 값을 주고 생산물을 사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좋으려면 생태계 또한 건강해야 한다. 건강한 땅에서 건강한 먹을거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생산자의 얼굴을 알고 공정하게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농사를 짓는데 모두에게 해로운 제초제를 사용할 까닭이 없다. 상생해야 하니까.

기업 이윤의 논리로 적용되던 가격에서 생산자와 소비자 그리고 그것을 생산하는 땅의 건강까지 고려한 가격이야 말로 가장 공정한 가격이 아닐까? 5월22일은 생물종 다양성 보존의 날이다. 생물종을 다양하게 보존하자고 아무리 말로 외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제초제 없이 농사지을 수 있고 그 대가를 공정하게 지불하는 방식이야 말로 생물종을 다양하게 보존하는 방법일 것이다.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441호 / 2018년 5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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