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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역사를 버리는 민족

기자명 윤제림

사소한 것까지 챙기는 일본

‘자료를 찾습니다’. 신문을 읽다가 가끔 눈에 들어오는 공고나 광고의 제목이다. 사연을 들여다보면, 대개 사사(社史)를 엮어내려는 기업이나,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어보려는 단체들이 자신들과 관련된 기사나 사진을 찾는다는 내용이다.

‘창업 30주년을 맞아…’라거나 ‘창립 반세기를 돌아보며…’ 따위의 수식어들이 세월의 한 묶음을 역사로 옮겨보려는 그들의 진지한 의도를 읽게 하지만,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왜 그 이야기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는 일본인 승객의 이야기 말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 펜과 종이를 꺼내들 수 있다니! 그 독한 성정(性情)에 전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끔찍히 부러운 것은 그들의 몸 속 아니 뼛속 깊이 배어있을 것만 같은 기록과 보전(保全)의 정신이다.

그들의 그런 생리는 일본여행을 해보면 쉽게 확인된다. 관광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길이라 그냥 지나치려는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 안내표지판들. 무언가 대단한 보물이 있는가 싶어 다가가 보면 우리 눈엔 정말 별 것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나무랄 일이랴. 제 땅에 전해지는 것이면 아무리 하찮은 물건, 사소한 일들이라도 의미를 두고 가치를 발견해서, 기록하고 전하려는 그들의 태도가 오늘의 그들을 만든 이유의 하나인 것을.물론, 그런 욕심이 지나쳐, 없는 역사까지 꾸며내고 남의 것도 제 앞으로 가져다놓으려는 추태를 연출하게 하여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짚어보자. 정신과 역사에서 턱없이 빈곤한 섬나라의 그들이 낡고 볼품없는 것에도 빛나는 울타리를 치며 쓸고 닦아서 제법 풍성한 재산목록을 갖게된 그 세월에 우리는 어떠했는가.

그들이 별 것 아닌 것도 별 것으로 만들어내는 동안, 우리는 별 것조차 별 것 아닌 것으로 바꿔놓았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이제는 찾을 수 없는 것이 되게 했다. 그들이 백년, 천년 전을 꼼꼼히 캐고 챙기는 동안, 우리는 고작 30년, 50년 전의 책 한 권, 사진 한 장이 어디 박혀 있는지조차 모르게 된 것이다. 적어도 그곳엔 그것이 있겠지 싶어 전화를 하면, ‘죄송합니다, 없습니다’란 대답을 듣기 일쑤다. 그런 현상이 내가 관련된 분야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땅의 오늘이 그렇기에, 더욱 아름답고 소중하게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다. 참으로 싱겁고 시시해보이는 물건들을 알뜰히 수집하고, 살뜰히 손질하여 그것을 사랑하고 보전해야 하는 의미까지를 더하여 세상에 내놓는 이들이다. 그 가치를 알아주는 한사람을 위해서라도 전시실을 차리고,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후세의 누군가를 위해 박물관을 여는 이들이다.

한국현대문학관에서 배우자
그런 데가 하나 더 늘었다. 동대입구 지하철 역을 빠져나와, 앰배서더 호텔 쪽으로 오르는 언덕길에 숨어있는 ‘한국현대문학관(2267~4857)’이 그것이다. 문학이 죽지 않고 살아 있어야 하는 까닭을 알게 하고, 적어도 이땅의 문학은 반드시 그럴 것이라는 신념에 이르게 하는 곳이다. 이광수, 김동인, 한용운, 이상, 김소월, 염상섭, 현진건, 정지용… 한국현대문학사의 별자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곳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부르는 사람들이 ‘길이 보전’해야 할 혼(魂)의 초상과 정신의 방부제를 나눠주는 곳이다. 기록과 보전이 얼마나 진중한 투자인가를 새삼스레 깨닫게 하는 곳임은 물론이다.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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