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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채봉 작가가 남긴 부탁

정채봉 작가를 길상사에서 만났다. 1999년 봄인가 보다. 나는 왜 그가 여기에 왔는가 잠깐 의아했다. 그가 가톨릭 신자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알 수 있었다. 이 절의 회주인 법정스님과 그는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함께 하는 도반이었기 때문이다. 길상사는 바로 ‘맑고 향기롭게 운동’의 근본도량이기도 했다.

그날 나는 길상사 범종루 근처에서 서성이던 정씨와 반갑게 만났다. 나는 그가 편집책임자로 있던 ‘샘터’잡지에 몇 차례 글을 실은 인연으로 면식이 있던 차였다. 그는 내 건강을 묻고 실상사가 아름다운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인사를 했다. 내가 길상사의 자문위원으로 이곳에 들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 했다. 나는 불자로서 내가 존경하는 법정스님의 부름을 받고 절 살림이 잘되기를 먼발치에서나마 성원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정씨는 그때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법정스님이 번다한 세속을 싫어해서 강원도 깊은 산골에 가서 홀로 사시는데 지난겨울에 발을 헛 딛어 넘어지시는 바람에 머리에 상처를 입으셨다는 것이다. 시봉도 없고 달리 돌봐드릴 사람도 없는 그곳에서 스님이 큰 어려움을 겪으셨다는 이야기다. 스님이 내색을 않고 있지만 그 사고로 상당히 건강을 해치셨을 것이니 큰 걱정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정씨는 내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입장에서 스님에게 직접 권해드릴 처지가 아니지만 “선생님께서 조용히 말씀을 좀 해보시라”는 것이다. “이제 그만 산에서 내려오셔서 서울 인근에 조용한 곳에서 시봉과 함께 지내시면 스님 자신도 편하고 스님을 존경하는 많은 불자들도 마음이 놓일 것”이라는 말씀을 좀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법정스님과 자별한 사이도 아니고 또 그렇게 자주 찾아뵐 기회가 많은 것도 아니라서 차일피일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그러다 2001년 정월인가 신문에서 정채봉 작가의 부음기사를 읽게 됐다. 사망원인이 ‘지병인 간암때문’이라는 기사를 읽으며 허망한 생각이 들었다. 시어에 가까운 문체로 우리 성인동화를 개척한 정채봉 작가는 마음이 곱고 조용한 이였지만 외모만 보면 늘 혈색이 좋아 육체노동도 할만한 건강미도 있어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데 그가 간암을 앓고 있었고 또 그로해서 아직 한참 일할 나이인 55세에 세상을 떠나다니 정말 허망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정씨가 법정스님을 걱정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또 그가 스님에게 전해달라던 말을 챙겼다가 언젠가는 스님께 꼭 전해드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기회를 계속 잡지 못했다. 어쩌다가 스님을 뵙게 되어 그 말씀을 드리려해도 마침 무슨 일이 생겨 기회를 놓치곤 했다. 언젠가는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는 바람에 내 말을 하지 못했다. “스님들도 성격이 온화하고 결이 고운 이는 지세도 평평하고 안전한 곳에서 살지만 나처럼 성격이 괴벽하고 편안하지 못한 사람은 산이 깊고 웅장하며 험악한 곳에서 살아야 수행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는 그런 내용의 말씀이다. 그러니 나는 스님의 안전과 평안을 생각하던 정 작가의 부탁을 생각해 말씀드리려다가도 스님의 높은 수행과 정신적 안정을 위해선 그런 말 자체가 스님을 괴롭히는 일이 될 뿐이라는 생각에서 말을 삼갈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70줄에 이른 스님이 한겨울에 감기로 고생하시면서 “이제 몸이 늙어서 이곳 저곳 고장이 많이 난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연말 길상사 4주년 법회때 스님은 “이제 내가 받은 한량없는 이들의 은혜를 갚는데도 마음을 쓸 계획”이라는 말씀을 하시는걸 들으며 1년 전에 돌아간 정채봉 작가의 부탁을 수용하실 때가 무르익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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