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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8주년 기념 세계적 불교석학 초청대담

기자명 이학종
박경훈 주필-바쁘신 가운데 한국 불교도와 특히 법보신문 독자들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한국에는 얼마만에 오셨는지요?

나라 총장-한국은 그동안 세 번 방문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주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는데 20년만인 것 같습니다. 법보신문 창간 8주년 기념호에 제가 초대된 데 대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박-총장님의 학문적 세계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지는 않지만, 언젠가 저서《인도 불교사》에서 `무아'와 `비아'문제에 대해 명쾌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을 읽고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불자들은 여전히 무아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많은 혼란을 겪고 있지요. 내가 없는데 무슨 일을 하던 별 의미가 있겠느냐는 식의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무아와 비아 문제에 대해 이 기회에 한번 더 고견을 들어주십시요.

나라-아시다시피 무아는 불교의 기본적 교설입니다. 인도에서는 `안아트만'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에서 무아로 번역한 것이지요. `안아트만'을 비아로 번역한 한역경전도 많은데 무아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최근 일본에서는 `비아'를 주장하는 조류가 강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아'는 철학적 입장이 아니라, 인간의 에고이즘에 대한 경고라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무아는 비아로 해석하는 것이 부처님의 교설에 대한 보다 바른 이해라고 봅니다. 내가 없다가 아니라 내가 아니고 내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박-부처님의 그런 인간적인 면이 바로 불교의 평등주의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성제도의 부정이라든가 여러 굴레로부터의 벗어남을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중생에 대한 한없는 자비에서 나온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따라서 총장님의 불교 `후로시키론'(보자기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모든것을 포용하는 보자기와 같은 성격을 가진 종교라는 뜻이겠지요. 나는 그러한 시각을 매우 흥미있게 생각합니다. 또 이러한 성격이 불교가 사회적 기능을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저의 `보자기론'을 읽어주셨다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불교는 두 가지 입장을 가지고 있는 종교라고 봅니다. 첫째는 도그마적입장입니다. 불교의 교의를 강조하고, 그 교의에 따라 이렇게 해야 한다는 점을 중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불교가 삶의 길 또는 인생 그 자체여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했지만 중국, 한국, 일본으로 이동하면서 그 나라의 문화나 민족신앙들을 마치 보자기에 싸듯이 포용해왔습니다. 보자기는 네모난 물건을 싸면 네모의 모습을, 둥근 물건을 싸면 둥근 모습을 하게 됩니다. 불교만이 가진 포용력이자 생명력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다만 아무리 보자기의 성질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근본까지 잃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면 살생같은 행위는 보자기론의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합니다.

박-이 보자기론은 불교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 또 하나의 문화현상을 만들어 가는 현상에 대한 신선한 정의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점이 도그마가 강력한 종교들과 비교할 때 불교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불교는 보다 풍요로운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탁월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나라-그렇습니다. 예컨대 기독교와 같은 종교들은 도그마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다른 신앙이나 문화를 배척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보자기가 아닌 모난 상자와 같다고 할까요. 일본 전국시대 당시 기독교가 일본에 전파될 때 기독교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그 배타성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전통적 문화와 사고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기독교를 일본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반면 불교는 일본의 이러한 고유문화를 포용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흥성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박-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기독교가 융성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일본 못지 않은 미족신앙과 고유문화를 갖고있는데 배타적 도그마를 가진 기독교가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불교문화사의 세계적 권위자 입장에서 진단을 해 주시지요.

나라-동아시아에서 기독교가 활기를 보이고 있는 나라는 한국 이외에 베트남과 필리핀 두 나라에 불과합니다. 내전공인 불교문화사적 측면에서 한국의 종교상황을 살펴본다면 몇가지 흥미를 갖게 됩니다. △불교가 그 본의, 즉 교의를 전파할 때 교의적으로 `불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전파를 했는가 △또 기독교는 민족신앙과 타협하며 전파를 했는가 아니면 그들의 도그마를 완고히 고집했는가. 그리고 △불교와 기독교는 어떠한 관계에 있고, 앞으로 두 종교가 한국에서 어떻게 대화하고 교류할 수 있을 것이며 그 가능성은 있는가 등에 대해 여건이 되면 연구를 해 볼 생각입니다.

박-어떤 종교가 생활일반에서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에 대해 나라 총장께서는 어떤 입장을 갖고 계신지, 얼마전 총장께서 일본의 한 잡지에 기고한 `석존의 포교선언과 현대의 불교-불교의 사회적 기능과 효용'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어보니 이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던데…. 오늘날 한국의 스님들이나 불교도들도 불교의 사회적 기능확대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인식전환도 어느정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나라-일본불교도 한국불교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기능 부분에 대해서는 뒤진면이 없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한국에서처럼 일본에서도 꾸준히 사회활동을 해오고 있지요. 그러나 일본불교가 사회적 기능을 전혀 도외시하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과거 성덕태자나 나라시대에는 불교가 사회구제 기능을 충분히 담당했었습니다. 오늘날도 `데라고야'라고 해서 사찰에서 어린이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불교도 크게 드러나진 않지만 사회를 위한 일정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불교가 어떤 형태의 교육이든 교육을 맡고 있다면 사회적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글중 석존의 포교선언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불교의 소시얼리티의 기점이 바로 부처님의 포교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과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포교하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보다 많은 사람에게 포교를 하기 위해서 둘이 함께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할 정도로 부처님은 중생을 위한 불교의 역할을 중요시한 것이지요.

박-현대사회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가치관이나 사회제도 문화현상들도 대단히 다원화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어떻게 해야 바르게 행동하는 것인지 현대인들은 혼란에 빠져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가 이런 상황에서 현대인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원화 사회에서 불교의 아이덴티티를 새롭게 정립한다고 할까요, 그런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나라-거듭 말씀드리지만 불교는 구체적인 삶의 방법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변화한 시대에 맞는 가치관을 제시해야 하는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불교의 사회를 보는 방법, 즉 불교의 연기관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물처럼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져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상호 공존공생의 연기적 관계를 깨닫는 것이 불교의 사회성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내가 있어남이 있고 남의 장점을 높여줄 때 내가 높아질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여실지견', 즉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불교의 근간은 표리관계에 있는 지혜와 자비인데 이것이 갖춰진다면 보시라든가 기부, 나눔에 대한 인식과 실천은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의 응용분야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박-그런 뜻에서 부처님은 진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습니다만 이것은 곧 사회를 위해 자신을 바친 것과 의미가 상통한다고 보는데 총장님의 견해는 어떠한신지요.

나라-나는 진리를 위해 몸을 버린다는 것을 지혜와 자비를 얻기위해 힘닿는데 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사신, 즉 진리를 위해 몸을 버리는 것과 연결된다는 것이지요. 사신은 물리적이 아닌, 종교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박-현재 한국에서는 뇌사를 법으로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정부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습니다. 장기 이식과 뇌사자의 인위적 장기추출을 합법화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존중을 생명으로 여기는 불교에서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맞은 셈입니다. 설산동자나 소신공양 등을 생각하면 이 문제에 전향적 입장을 가져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나라-뇌사인정 문제를 법제화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봅니다. 이 문제는 긍정쪽이든 부정쪽이든 모두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어요. 생명의 문제를 인위적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은 불교의 교의상 부동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설산동자나 소신공양에서 보듯 긍정적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원칙적으로 산사람의 장기를 받아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생사일여를 이야기하는 불교에는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장기를 이식 받아야 할 사람이 자기자신이거나 자신의 혈족일 때도 뇌사인정은 안된다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일본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불교학자들이 세미나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 불교학술단체인 `인도학-불교학회'에서 얼마전 장기이식과 뇌사인정 여부 문제를 놓고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토론을 했었지요. 저도 위원으로 참가했었는데 그때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남의 생명을받아 내생명을 연장한다는 아이러니를 인정하는 것은 불교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었고, 장기이식을 100%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것도 옳은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대단했습니다. 이에 대한 나의 입장은 어느 쪽이든 된
다, 안된다의 단정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뇌사 인정이나 장기이식의 문제가 장기, 즉 생명을 사고 파는 부정적 모습으로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몇해전 일본에서 많은 사람들이 값싸게 장기를 구입하고자 인도를 방문한 기사가 언론에 보도돼 충격을 준 일도 있었습니다. 법제화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문제가 발생한 것은 이 문제의 합법화가 시기상조임을 알려주는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중을 기하고 서두르지 않아야 할 성격의 문제입니다.

박-이런 문제들은 과학이 발달해서 우리사회에 생겨난 문제들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일종의 딜레마인데 뇌사 이외에도 앞으로 21세기에 가면 과학의 발달과 사회변동, 가치관의 변화로 여러 딜레마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으로 봅니다. 이럴 때 불교는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보십니까.

나라-제게 친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이 친구는 말하기를 과학의 발전과 인간의 발전은 결코 균형을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하곤 했습니다. 과학이나 기술의 발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를 내고 있지만 개인이나 인류의 발전은 답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친구의 말 때문은 아니지만 지금은 마음의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성숙을 위해서는 종교, 그중에서도 불교적 마음의 성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서양에서 이야기하는 과학과 종교는 분리돼야 하며 서로 상응할 수 없다는 주장의 허구를 입증시킬 필요가 있지요. 과학과 종교는 얼마든지 함께 발전할 수 있습니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종교적 마음을 성숙시켜, 그 시대에 필요한 가치관을 제시하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박-끝으로 이 기회를 통해 한국의 불자들과 특히 법보신문 독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나라-제가 불교도라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저는 한국의 불교도와 법보신문 독자님들에게 불교는 대단히 훌륭한 종교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교리의 도그마를 내세우지 않는 자비와 지혜의 인간적인 종교이며 모든 가르침이 인간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로 앞서 언급한 보자기론의 비유처럼 다른 종교나 사상을 비방하지 않고 감싸안는 포용의 종교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상좌부 불교이든 중국불교나 한국불교, 일본불교이든 구별하거나 편을 가르지 말고 이런 좋은 가르침을 종교로 갖고 있는 우리 불교도들이 한마음이 되어 힘을 모으고 연대하여 21세기를 불교가 열어가도록 힘을 다하자는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박-오랜 시간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 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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