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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자와 게놈

기자명 배의용
요즘 인간 유전자지도의 완성이 줄곳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생물학의 문외한인 사람으로서도 적잖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상 최대의 과학적 성과가 초래할 여파는 상상을 불허할 지경이다. 그만큼 현대사회의 각 분야에 무거운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 중에 특히 철학과 종교 분야에 안겨주는 과제는 무엇일까. 유전자 정보의 남용으로 초래될 수 있는 ‘인간성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제라고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 조작이나 인간 복제가 인간의 존재에 대해 야기할 가공할 문제들을 이루 다 열거할 수는 없다. 이런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한 기본원칙들을 논의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서양의 과학기술 전체가 발딛고 서있는 형이상학적 전제를 근본적으로 반성해 보는 일은 더욱 시급하다. 이런 관점에서 해체주의 철학자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이른바 ‘그라마토로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에 따르면 세계의 근본은 원자와 같은 물질이 아니라 오히려 글자이다. 새겨지거나 쓰여지거나 그려진 것 전체를 통틀어 그는 글자라고 부르고 그리스어 ‘gramm’으로 표기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말소리를 글자 보다 우선시했을 뿐더러 글자를 모든 해악의 근원으로 치부하여 왔다(성인들이 한결같이 글을 써 남기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혁명기에는 항상 글자를 중시하는 사상들이 전통의 틀을 깨뜨리고 나타났다. 예를 들어 갈릴레이는 ‘자연이란 텍스트는 숫자와 도형과 같은 수학적 기호들로 쓰여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스스로 몇 가지 기호들을 해독하여 수학적 공식으로 표현함으로써 근대과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서양의 근대철학을 개시한 데카르트 역시 도서관의 장서들 속에서 고루한 학설들을 읽느니 차라리 ‘자연이란 책’ 속에서 직접 진리를 읽어내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와같이 자연을 수학적 기호들로 쓰여진 텍스트라고 보는 견지가 ‘게놈’으로 상징되는 과학적 개가를 있게 한 밑바탕임에 틀림없다. 자연 속에 새겨진 근원적인 글자들의 조합을 텍스트라고 부를 때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돌이켜보면 유전자 정보도 모두 염색체에 새겨진 ‘상형문자’에 다름 아니다. 원자 이하의 소립자들에 관한 물리
학적 탐구들이나 원소의 주기율에 대한 화학적 탐구도 이런 문자들을 읽어내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만물의 이법을 이루는 암호들에 대한 사상은 알고보면 불교의 전통 속에서 이미 오래 전에 제시되었던 것이다. 가령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유위법’이란 ‘기호(흔적)을 갖는 사물들(dharmas)’이다. 나아가 유식학에서 ‘종자’는 ‘공능차별’(功能差別)로 정의되는데, 이것은 바로 과학에서 탐구하는 온갖 질적 차이를 나투어내는 근거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유위법 속에 새겨진 기호 또는 종자를 읽어내는 방법이 과학기술이라면 유위법을 초탈하려는 노력이 불교적 수행의 근본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와 과학기술과의 상호보완 관계를 좀더 깊이 성찰해 볼 필요를 절감하게 된다. 불교계가 자신에게 맡겨진 역사적 과제를 이행하고자 할 때 이런 소중한 자산을 잘 활용하는 일이 무엇보다 긴요하리라 생각된다.


배의용 /동국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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