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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강백의 18년 불경 교육

기자명 신규탁
세상에 공 들이지 않고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세월 속에서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공 들이는 방식이나 공 들이는 기간이다. 세상이 빠른 속도로 바뀌다 보니 공 들이는 기간도 짧아졌다. 농업을 위주로 살았던 시절에는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가꾸더라도 수확을 보는 것은 가을이다. 적어도 일곱 여덟 달 공을 들여야 결과를 보게 된다. 요즈음 인터넷 전산망을 통하여 그 날 증권이나 주식을 사들였다가 그 날 팔아서 이익을 보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농사일로 치자면 가뭄에 애태우기도 하도 홍수로 가슴 조이기도 한다. 일년 농사가 이런데 백년 대계라고 하는 교육에 공들이는 일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공 들여 가꾼 결실이 먼 훗날에 나타난다. 그러니 그 사이에 애태우고 인내하는 일은 그 자체가 엄청난 고행이요 수행이다. 5년을 임기로 하는 대통령의 역할이지만, 그 새를 믿지 못하여 ‘중간 평가’니 뭐니 하는 말이 있는 지금의 세태를 생각하면, 가도 가도 하염없는 교육의 길을 걷는 다는 것은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진 이나 하는 일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시대에 뒤 떨어진 사람들이 들이는 공을 먹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5월 26일 운악산 봉선사에서는 ‘봉선사 불경서당’ 회향식이 있었다. 1983년 4월에 화엄강백 월운큰스님에게 불경을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모였다. 그 시절 절의 살림살이는, 다른 절은 모르겠지만 봉선사의 경우는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매주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을 먹여주고 재워주었다. 승속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절 집안의 정서에서 볼 때, ‘속인’들에게 전통 강원교재로 대강백이 불경을 가르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다. 다만 당부의 말씀이 있었다. “여러분들이 훗 날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혹 불교를 논할 경우가 있으면 정확하게 제대로 하시오. 그것이 밥값 내는 길입니다.”

필자가 월운 스님께 처음 인사드린 것은 1978년의 일이다. 당시 월운스님께서는 《청량국사 화엄경대소초》를 앞에 놓고 학인을 지도하셨다. 한 번은 스님께서 서울 역경원 볼 일로 출타하셨다. 눈발이 무릅을 채우도록 내렸다. 비포장 도로 위로 하루에 겨우 너댓번 다니는 버스 편이다 보니 그날은 휴강이 틀림 없으렷다. 그러나 그 눈길을 헤치고 선생님께서 나타나시는 게 아닌가? 한 명의 학인을 지도하시려고 말이다. 그 학인은 뒤날 스님의 전강 제자 향암진원 강사이다. 필자는 1988년 부터의 동경유학 기간 6년을 제외하고는 스님께서 강의하시는 이런 정황을 직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필자가 경험한 지난 23년을 돌아보면 선생님께서 학인 지도에 들이는 공은 변함이 없으셨다. 뜻 있는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했던 조계종 내의 크고 작은 시시비비 속에서 적잖은 스님들이 고생을 했지만, 월운 스님은 그런 시비의 바다를 멀리하고 강학과 경전번역에 공을 들여왔다. 좀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종단내의 그런 상황이 도리어 스님으로 하여금, 종단의 일에 휘말리지 않고 강학과 역경사업에 공 들이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공 들여 가꾼 ‘봉선사 불경서당’을 지난 주에 회향하게 되었다. 이제는 당신에게 남겨진 시간을 전문강사 배출에 모으려는 뜻인 듯 하다. 70을 넘긴 노강백의 온 몸은 공 들여 사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듯 하다.



신규탁/논설위원,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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