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런 일에는 쌍방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북측의 내부사정을 고려할 때 당장 제도적 정착의 방안을 논의하자고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는지 모른다. 마지못해 개방의 길을 탐색하기 시작한 북측 형편으로는 남쪽의 열화같은 요구들을 도저히 다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옛 속담으로부터 최선의 지혜를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 아무리 바쁘다해도 바늘 허리 메랴. 서로 형편이 닿는 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한 가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 성심성의껏 해가면서 상호 신뢰를 구축해가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되새겨보게 된다. 그것은 곧 심는 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의 진리이다. 근대는 확실히 일찍 공업화에 성공한 서구 열강의 시대였다. 지구상에서 유럽을 제외한 나머지는 땅과 바다를 가리지 않고 모두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일본이 지구상에서는 유일하게 비서구국가이면서 서구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여 동아시아를 자신의 텃밭으로 챙기게 된 것도 역사적 필연이었다.
그러나 현대는 탈근대(postmodern)로 규정되는 시대이다. 이제 열강과 식민지 사이의 지배와 종속의 관계는 바야흐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겨지고 있다. 인간 사회의 전분야에서 지배와 종속의 관계는 근대적 이데올로기로서 폐기되어가고 있다. 한국과 미국 사이의 기존 질서는 확실히 지배와 종속의 관계였다. 하지만 이번 ‘SOFA 협정’의 개정에서 보듯, 이런 관계는 더 이상 존속되기 어렵다. 머지않아 새로운 국제질서가 기존의 낡은 질서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가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는 한편, 분단의 쓰라린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의미가 자못 심장하다. 왜냐하면 한국은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분단국으로서 근대의 역사적 유산 때문에 여전히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을 남북으로 분단하고 있는 38선은 근대적 질서의 흔적이며, 미군의 주둔은 근대 제국주의의 역사적 유산이다. 따라서 우리가 38선의 철책을 치우고, 미군을 철수하게 만든다면, 바로 그때 근대적 질서는 지구상에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한국이 엄청난 고난과 시련의 질곡을 통해 세계사 속에서 부여받은 신성한 소명이라고 생각된다. 온 겨레가 힘을 합쳐 우리에게 부여된 세계사적 과제를 충실히 이행해 냄으로써 한민족의 진정한 저력을 세계만방에 내보여야 한다. 우리가 오늘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에 임하여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배의용/동국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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