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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프랑스 플럼빌리지 틱 낫 한 스님 친견기 〈下〉

"나는 조상의 연속체… 부모 섬기면 존귀해져"
조상 축제 때 설법…"우리 존재 속엔 부모 흔적 각인"
"남북 적 아니다 자각 때 통일진전" 한국에 평화메시지
따르릉! 따르릉! 사무실에서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가 고요한 플럼 빌리지 새마을의 후원에 울려 퍼지자 공양을 위해 모여들던 사람들이 일순간 하나같이 하던 일과 걸음을 멈춘다. 정겹게 나누던 이야기도 일시에 끊어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 사람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던 일을 다시 계속해 나간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은 플럼 빌리지 특유의 '전념의 종소리(Bells of Mindfulness)’ 수행법이었다.



주민들 전화벨 울리면 명상 시작

그것은 일과를 알리는 절의 종소리, 시간을 알리는 시계 종소리, 심지어 전화벨 소리를 막론하고 어떤 종소리가 울리면 최소한 5초간은 하던 일을 멈추고 긴장을 풀고는 자신의 호흡을 자각하는 수행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자칫 잊어버리기 쉬운 자신의 존재를 되돌아보는 여유를 갖게 된다. 대수롭지 않은 수행법인 것처럼 보이지만 바쁜 일상에 쫓겨 부지불식간에 혹은 습관적으로 악업을 쌓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화가 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겠는가? 또 어찌 목전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의 삶을 핍박하는 못된 짓을 일삼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하고 있다. 왜? 갖가지 욕심과 번뇌에 휘둘려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꿈에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전념의 종소리’는 언제고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일깨워주는 일종의 경책이다.

플럼 빌리지에 일주일간 머물면서 '전념의 종소리’에 길들여진 탓인지 이제는 전화벨 소리가 울리면 누굴까 하는 호기심에 덥석 수화기를 들기보다는 잠시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게 되었다. 덕분에 전화 늦게 받는다는 불평을 곧잘 듣곤 한다. 그러나 상대방의 짜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잔잔해진 내 마음은 어느덧 플럼 빌리지를 향한다. 이른바 종성만리심(鐘聲萬里心)!

플럼 빌리지에서는 한국 사찰에서처럼 발우 공양을 하지 않고 일종의 뷔페식 공양을 한다. 동그란 접시에 차려진 음식을 양껏 담아서 후원의 잔디밭에 놓인 식탁에 자리를 잡고 먹는다. 굳이 소식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음식을 접시 한 가득 담는 사람은 별반 없다. 혹 음식이 모자라게 되면 늦게 온 이가 새 음식이 마련될 때까지 한참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먼저 음식을 얻었다 해서 먼저 먹는 법은 없다. 식탁에 앉아 자기가 속한 수행 가족(practice family)이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공양을 한다. 공양이 끝나면 각자 자기가 사용한 그릇을 설거지해서 마른 수건으로 닦아 본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놓는다.

자기만 사용하는 접시와 포크, 젓가락 등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사용한다. 따라서 설거지도 대충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스님들은 별도의 발우를 가지고 있다. 그 발우에 정말 놀랄 만큼 적은 양을 담아 자신이 지도하는 수행 가족이 자리잡고 있는 식탁에 가서 함께 공양게를 외우고는 공양을 한다. 그런데 개중에는 음식을 남기는 이가 있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우리 나라 절에서 그렇게 했다간 당장 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질 테니까 말이다. 적어도 환경 친화적인 공양을 하는데 있어서 만큼은 우리 한국 불자가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자부심(?)마저 들게 한다.



뷔페식 식사로 발우공양 대신

플럼 빌리지를 이루는 마을 세 곳을 쉴 새 없이 오르내리며 이것저것 취재를 해야했기 때문에 나는 모 방송국 기자들과 함께 별도의 수행 가족(?)을 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은 공양 시간에 틱낫한 스님 인터뷰를 대비해 역할 분담 등을 논의하며 떠들고 있는데 한 독일계 비구니 스님이 다가와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죄송합니다만, 공양 시간 처음 20분간은 침묵하셔야 합니다. 식사 명상을 하는 다른 사람들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죠. 20분이 지나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셔도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차분하게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며 식사 명상을 가르쳐 주시는 스님에게 송구스럽기보다는 뭐랄까 일종의 감동을 받았다. 말씀의 요지는 분명 준엄한 질책이었지만, 그 형식은 평화스럽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플럼 빌리지에 계시는 모든 스님들의 일상 언행에는 평화와 미소가 잠시도 떠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궁금한 점을 여쭙다가도 그 분위기에 취해 나중에 아무리 애를 써봐도 도대체 뭘 물었고 무슨 대답을 들었는지 기억할 수 없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 또 어떠랴? 얻고자 하는 것은 마음의 평화지 사소한 호기심의 충족이 아니었으니까.



스님들 언행엔 미소가 가득

플럼 빌리지에서 하나 아쉬웠던 점은 전통적인 베트남 불교 의식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수계식이나 예불 그리고 법회에서 볼 수 있는 법요식은 대부분 현대 서양인들이 쉽게 적응할 수 있게 개변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의 부정이 아니라 창조적인 변용이라 할 수 있다. 비록 그 형식은 간소화되었다 해도 거룩한 분위기가 손상된 점은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 도리어 거룩한 삼보를 찬양하는 예불 등을 베트남어로 하는 것을 고집했다면 서양인들의 반응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금 한국 불교의 세계화를 도모하는 우리 불자들이 곰곰이 되새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참고로 말하면 플럼 빌리지의 비구니 스님들이 일상 생활에서 곧 잘 쓰고있는 두건이 있는데, 이는 베트남의 전통 불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두건을 쓰고 있는 비구니 스님들의 모습은 매우 자연스럽고 또 보기에도 좋았다.

플럼 빌리지의 프로그램에는 서양인들의 눈에 매우 특별하게 보이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조상을 기리는 축제(ancestors festival)'다. 이 축제가 열리는 날에는 플럼 빌리지의 세 마을에 흩어져 수행하던 사람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틱낫한 스님의 조상의 공덕을 기리는 설법을 듣고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을 함께 나누며 반나절을 보낸다. 스님의 설법이 끝나고 공양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수많은 서양인들이 한 곳에 몰려들었다. 궁금해서 따라 가보니 나비와 새 같은 모습으로 오려져 있는 예쁜 색종이에 돌아가신 조상의 이름을 써서 법당의 한쪽 벽에 붙여두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 형식은 사뭇 달랐지만 본질은 기일이나 우란분절에 선망부모의 위패를 절에 모시는 우리 불자와 다름이 없었다.

돌아가신 부모는 차치하고 살아있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지나친 개인화로 빚어지는 여러 가지 불상사로 고민하고 있는 서양인들은 스님의 설법과 이 행사를 무척 뜻깊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물론 앞서 말한 현상은 이제 서양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화와 서구화를 동일시하며 숨가쁘게 달려온 현대 한국인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젊은 프랑스 여인에게 이 행사는 선뜻 다가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여인은 질의 및 응답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스님께서 어제 조상에 관해서 하신 설법은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돌아가신 조상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곁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조상의 공덕을 기려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은 솔직히 제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여인이 말을 마치자 기다란 여운을 남기는 종소리에 따라 대중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팃낙한 스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조상의 연속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서 육체상의 특질뿐만 아니라 정신상의 기질도 물려받습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고 곁에 있지 않다고 해서 그분들과 우리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분들은 바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조상을 기린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분들의 저 세상에서의 안녕을 염원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존재 속에 각인되어 있는 그분들의 흔적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어린 날 제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시던 어머님의 손길을 느끼곤 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어머님의 존재를 새삼 다시 느끼며 저를 낳아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그분의 흔적인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 뜻을 저버리지 않고 보람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정 종교를 떠나 거의 습관적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는 우리 한국인 모두가 되새겨보아야 할 말씀이 아닐까?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자식들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이렇게 죽음마저 그 연분을 갈라놓지 못한다고 여길 때 살아있는 가족들끼리 소가 닭 보듯 할 수 있겠는가?



색종이에 조상 이름 써 법당 봉안

틱낫한 스님은 우리가 떠나기 앞서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분단국가인 한국인들을 위해 한 말씀하셨다.

"남과 북은 서로가 적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서로 한 형제입니다. 무엇보다 이 자각이 선행되어야 진전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스님은 76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지금쯤 미국 동해안에서 서해안을 가로지르며 뭇 사람들에게 평화의 씨앗을 나누어주는 대장정을 하고 계실 것이다. 스님의 발걸음마다 불보살님의 한량없는 가피를 바라며, 하루 빨리 한반도 통일의 소식을 갖고 달려가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스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그 해맑은 미소를 다시 보고 싶다. 끝.



진현종(불교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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