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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단개혁 주창한 재가지식인

기자명 박경준
시바락사의 사회부흥운동(1)

이 글을 쓴 `도날드 K. 슈아러(Donald K.Swearer)'는 현재 스와스모어대학종교학과 남녀지도자과정 교수이며, 1993년에는 하와이대학교 불교학과 누마다(沼田)연구소의 객원교수를 지낸 바 있다. 그는 아시아와 비교종교학에 대해서 폭넓은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붓다다사의 담마실천'이란 제목으로 본지에 소개된 바 있는 붓다다사에 관한 연구 논문집 《나와 내 것(Me and Mine)》과 《불교와 동남아시아의 사회(Buddhism and Society in Southeast Asia)》 등을 출간하였다.

슈아러 교수는 이 글의 주인공인 태국의 시바락사의 사회부흥을 위한 통찰은혁신주의적이지만 불교적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은 근본적으로 붓다다사 비구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베트남 스님인 틱낱한의 참여적인 선불교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 그리고 토마스 머튼의 정신적 행동주의와도 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한다. 또 슈아러 교수는 시바락사를 세간과 출세간의 교차점에 서 있는 예언자라고 말하고 있다. <편집자 주〉

사회변화와 불교의 대응19세기 말엽부터 동남아시아의 테라바다불교는 근대서구의 도전에 대응하여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작은범위에 그쳤지만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의 근대 민족국가 발전에 불교가영향력을 미쳐온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새로운 정치˙경제 구조로대표되는 근대화라는 것도 전통적인 불교적 세계관과 이와 관련된 종교적 삶의 양태에 자극을 주는 데 기여했다. 특히 2차대전 이후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극적인 결과와 태국˙스리랑카˙미얀마불교에 가해진 엄청난 충격 때문에정치˙경제˙사회적 변화는 더욱 가속화하였다.

1932년 전제군주제가 끝날 때까지 태국의 불교는 개화된 군주와 학식있는 귀족들의 지도로 종단 제도는 물론 든든한 조직을 갖춘 교육 프로그램과 태국에 제대로 기여할 수 있는 근대화된 세계관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때이후로 경쟁력을 갖춘 재가인들의 기구와, 더욱 산업화된 시장 경제의 형성에 따른 극적인 사회˙문화적 변화, 그리고 촌락에 바탕을 두고 있던 생활방식의 급격한 침식에 의해 태국의 불교전통이 현재를 유지하면서 미래에도생존할 수 있는 능력이 뿌리째 흔들려 왔다.

이런 와중에 다른 테라바다불교 문화 지역과 어느 정도 공통적인 발전이 몇가지 이루어졌다. 승려 중심의 전통이 점차로 재가인에게 개방되고 선정(禪定)에 대한 재가인들의 관심이 확대되었으며 과거에는 주로 남성들이 하던종교적인 역할에 여성들이 참여하는 등, 종단 내부에 뚜렷한 변화의 흐름이생겨난 것이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동남아시아에서 발생한 가장 급진적인변화 속에 있었던 도시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테라바다불교 국가에서는 불교적 세계관을 근대화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있어 왔는데 특히 사회˙경제˙정치적으로 부합하도록 불교를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변화들은 역시근대화와 서구화, 그리고 세속화의 맹공격에 압도당하는 주류 불교에 대한비판들을 담고 있다.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외관상 대립된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발전이 이루어졌다. 하나는 근본주의, 혹은 근본주의자적인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 혹은 혁신주의라고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이다. 두가지 경향 모두 불교적인 바탕을 두고 있는 도덕 공동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지만 그에 대한 접근법과 분석, 해결책에서 차이가 있다.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경제˙사회˙문화적인 문제와 긴장이라는 것이 조직적인특성을 지니므로 이것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이상화된 개인 신앙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해결책은 때로 교리적으로 단순하고 도덕주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혁신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신앙과 실천을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일을 해결책의 일부로 여기면서 현 시대의 긴장과혼란과 `죄악'에 대해서 정면으로 맞서자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의 한복판에 있는 술락 시바락사(Sulak Sivaraksa)는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재가(재가)의 불교지식인이며 사회비평가이며 교리와 불교종단의 개혁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자유주의자의 한 사람이다.

왕실과 군부에 대한 저항사회비평가이자 까다로운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사회운동가로서의 시바락사는 명성 덕분에 특히 태국에서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술락은 출판물을 통해 태국 국왕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로 1984년불경죄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4개월만에 석방된 일이 있다. 가장 최근에악명을 얻은 것은 1991년 8월 22일 탐마사트(Thammasat)대학교에서 행한 `국가평화유지위원회의 6개월-태국 사회의 비극'이라는 강연 때였다. 시바락사는 이 강연에서 선거에 의해서 세워진 차티차이 수상의 정부를 1991년 2월쿠테타로 전복시킨 태국왕실군 총사령관 수친다 장군과 육군사령관이었던 순톤 장군이 이끄는 국가평화유지위원회를 공격했다.

시바락사는 일련의 발언을 통해서 군부가 태국의 민주주의에 계속적인 위협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밝혀 나갔다. 1991년 정부를 지배한 군부의 합리화는 사실 1947년에 있었던 최초의 군사쿠테타를 정당화하던 방법과같다고 주장한 그는 신랄하게 국가평화유지위원회를 비난하였다. "지난 44년동안 군부가 새로 배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포악하기만 합니다. 안타깝게도 일반 시민들은 더 현명해진 것이 없고 현재의 의회는군부에게 비위나 맞추며 아부하는 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바락사의 강연은 건설적인 주장으로서 태국의 민주주의는 물론 태국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헌법과 좀 더 정의롭고 인간적인 경제 발전을 요구하였으며, "정치가나 사업가, 다국적 기업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는… 국가통합의 중심으로서"의 왕족의 지위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학계, 비정부 조직들, 행동주의 승려들의 비판이 점차 강력한 경제˙정치˙군사적 세력을 반대하는 마을 사람들을 조종하는 쪽으로 모아지자, 국가평화유지위원회는 그들에 대한 비판을 침묵시키기로 결정하였다.

1991년 9월 13일, 국가평화유지위원회는 불경죄와 수친다 크라프라윤 장군에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시바락사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였다. 당시 태국북부에 있던 시바락사는 억압적인 미얀마의 군사 독재정권과 공모한 태국정부를 비판한 그의 태도에 공감한 어느 서양 대사관에서 정치적 망명 중이었다. 10월 1일, 친구들의 도움으로 태국을 탈출한 그는 그후, 1년 동안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수많은 강연과 강의를 하고 태국으로 돌아왔다.

시바락사의 용기있는 주장은 오래지 않아 태국의 정치적 사건들 때문에 입증이 되었다. 1992년 5월 선거 후에 수친다 장군이 스스로를 수상으로 임명하자 수만 명의 시위 군중이 방콕과 대도시 지역의 거리로 나섰다. 실권(失權)을 우려한 군부는 7백 명 이상의 시위대를 살해하는 등 폭력적이고 억압적으로 대응하였다. 계속된 국민들의 봉기와 국왕 등 다른 관료들의 중재로 수친다 장군은 물러나고 임시 수상이 임명되었다. 1995년 4월 26일, 형사법원은 수친다 장군이 시바락사를 상대로 제소한 불경죄와 명예훼손 혐의 사건을기각하였다. 이 공판에는 학생대표와 저명한 사회˙정치 운동가 등 5백 명이상의 지지자들이 참석하였다.

시바락사는 전세계의 수많은 단체와 개인에게서 존경과 지지를 받았다. 1994년 1월, `미국 프렌드교회 사회복지사업회(Amerian Friends Service Committee)'는 그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였는데, 추천서는 "시바락사는 평생동안 평화와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하여 용감하고 분명한 발언을 하였다. 시바락사 교수는 태국 고유의 문화와 전통은 물론 불교적 신념에 뿌리를 두고, 특히 폭력과 전쟁으로 상처입은 지역에서 비폭력에 헌신할 사람들을 모으고 길러내기 위해 출판과 단체조직활동을 하였다"고 하였다.

인권회복과 빈곤퇴치시바락사가 창립했거나 운영에 관계를 가진 수많은 비정부 단체들을 보면 그의 열광적인 활동을 증명할 뿐 아니라 그의 깊은 헌신과관심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가 관여한 `개발에 관한 아시아 문화 포럼'은 시바락사가 일관되게 노력한 분야 중 하나로서 도시와 농촌의 빈곤을퇴치하고 도시와 농촌을 향상시키는 일을 주로 하였다. 이 조직은 "완전한인류의 발전을 위해 일하고… 그런 발전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종교문화적인 가치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믿으며… 제도화된 종교의 구성원이거나아니면 그에 헌신하지 않거나를 불문하고 도덕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측면의발전에 깊은 관심을 가진" 개인과 단체들에게 결속과 연대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1983년에 개최된 회의에서 이 포럼은 그들의 사명에 대한 이념적통찰을 공식화하였다.

이 포럼의 `통찰'은 시바락사의 담마적 사회주의에 관한 통찰로 특징지어질수 있는 것으로 필자의 견해로는 잠재적으로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버트 필립스는 개혁가적 행동주의를 `비정치적'이라고 언급한바 있다. 그러나 그의 비정부조직은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상적이데올로기를 신봉하였다.

1976년, 태국 정부가 탐마사트대학교 캠퍼스에서 학생시위대에게 폭력적인억압을 가하며 1973년~1976년의 민주화시기의 종식을 장식하기 7개월 전에,시바락사는 `종교와 사회 통합단'을 창설하였다. 이 단체는 불교와 기독교전체를 통합한 인권단체로서 현재 계간으로 《태국인권보고서》를 발행하고있다. 이 태국인권보고서는 태국에서 가장 의미있는 인권운동지이다. 이 잡지는 태국의 인권 침해를 보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비폭력 훈련 프로그램, 여성문제, 저소득층에 대한 합법적 지원, 다른 아시아 국가의 인권 상황에대한 기사도 싣고 있다. 탐마사트에 대한 폭력적 보복을 이끌었던 쿠테타 당시 종교와 사회통합단은 시바락사의 말대로 "사람들에게 명상과 기도와 금욕생활을 하라고 잘 부탁하면서…" 그 현장에 있었다. 한마디로 폭력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종교를 실천하라는 밀이다.

이 단체의 멤버들은 체포를 감수하면서까지 옥중에 있는 동료들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비폭력과 화해라는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에 부상을 당하여 병상을 누워 있는 군인들에게도 찾아갔다.


박경준/동국대 불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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