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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종원의 인도 순례기

기자명 공종원
  • 교계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고됨마저 즐거웠던 붓다의 깨달음을 따라 …

쿠시나가라 열반당에서쿠시나가라 열반당에 들어가 부처님 열반상 앞에 선다. 열반당은 1927년 미얀마의 두스님이 세웠다고 한다. 높직한 기단위에 세운하얀 색의 콘크리트로 바로 뒤에는 부처님의 사리탑이 붙어있고 또 그 뒤에는 아난다의 탑이 이어져 있다. 열반상은 6m가 넘는 거상으로 근처 히라냐바티 강 바닥에서 끌어내 이곳에 모신 것이라고 한다. 열반상을 돌아 예경한 일행은 여기서 간단한 법회를 갖는다. 형상에 구애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부처님 모습이 장엄하고 평화롭다는 느낌으로 깊은 감개에 젖는다. 건물 바로 앞에 두그루의 사라나무가 심어져있다. 물론 부처님 당시의 것은 아니지만 새삼 다시 쳐다보게 된다.

일행은 경내를 둘러본 후에 버스에 올라 이곳에서 1.6㎞쯤 떨어진 라마바르탑으로 갔다. 지금은 그 원형이 많이 상해 벽돌로 쌓은 언덕같은 모양이지만여기서도 향을 불에 붙여주고 보시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부처님이열반에 들자 이곳 말라족 사람들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꽃과 향을 6일동안공양했다는데 지금 사람들은 순례객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하니 인심이 그만큼 변한 것을 실감할 수 있겠다. 말라족은 역대왕의 대관식을 치루는 성지인이곳 마쿠다반다나에서 일곱째날 마하가섭의 도착을 기다려 부처님의 다비를모셨다. 그때 나온 사리는 각국이 공평하게 분배했는데 말라족은 그 사실을기념해 직경 46m 높이15m의 탑을 이곳에 세웠다. 부처님이 제자들과 함께최후의 목욕을 했다는 히라냐바티강은 탑에서 1백 도 안됨직한 거리에서 작은 개울 정도의 크기로 지금도 흐르고 있다. 이곳에서 열반당 쪽으로 돌아가면서 보니 태극기 모양의 입간판이 보이고 대한사라는 한국절이 있는 것이보였다. 보드가야에서도 고려사라는 한국절 간판을 보고 반가왔지만 일정이 바빠 들르지는 못했다.

20일 아침 4시에 다시 호텔을 나섰다. 전날밤부터 비가 내렸다. 건기에 비를만나는 일은 드문 일인데 주룩주룩 내리는 비로 온세상이 깨끗해 진 느낌이다. 먼지가 풀풀 나던 도로가 산뜻해지고 주변의 산과 나무와 풀들이 온통생기가 난다. 9시반쯤 네팔 국경지대에 도착해 그곳 작은 식당에서 아침을먹었다. 국경이라지만 보행자는 마음대로 왔다갔다 한다. 다만 서류상의 입국수속이 길어 10시반이 되어서야 룸비니를 향해 떠날 수 있었다.

룸비니와 카필라 바스투룸비니는 두말할 것도 없이 부처님이 태어난 곳이다. 가필라성의 성주 정반왕의 아내 마야부인이 산월이 되어 친정인 데바다하성으로 향하다 잠시 이곳에서 쉬던중 갑자기 산기가 있어 아쇼카나무(무우수)가지를 잡고 아기를 출산했다는 바로 그곳이다. 이곳은 「수목이 울창하고온갖 꽃이 피고 맑은 시내가 흐르며 샘이 솟는 아름다운 동산」이었다는 경전의 묘사가 있지만 우리 일행이 찾았을 때는 건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황량하기 그지없는 들녘이란 느낌을 갖게될 뿐이다.

그렇지만 바로 이 룸비니는 네팔정부와 유네스코에 의해 공원조성을 위한 개발이 추진되고 있어서 멀지않아 옛날의 아름다운 숲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다. 하지만 벌써 10년쯤 진척된 개발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룸비니는 결코 정겨운 곳이란 인상을 느끼기 어렵다. 룸비니 유적의 중심이라고할 수 있는 마야부인당도 지금 일본인들의 투자로 발굴작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본래있던 탑도 해체되어 없어지고 거기 심어져 있던 보리수마저 잘려없어져 부치님과의 연고를 새삼 느낄만한 자취를 찾을 길 없다. 다만 근처마야부인이 출산후 목욕했다는 연못이 있어 발길을 머물게 한다. 원래 마야부인당에 모셔져 있던 탄생상등 유물은 근처 작은 건물에 임시로 모시고 있어서 일행은 거기서 법회를 갖고 부처님의 탄생을 찬양했다. 유적의 동쪽에는 티벳절과 네팔절이 있다. 룸비니지역에서 가장 먼저 생겨난 절이라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룸비니 지역에는 중국 일본 베트남 한국 등 각국이 지금 새로 절을 짓고 있어서 멀지않아 각국 불교사찰이 각기 경쟁적인위치에서 룸비니를 빛낼 것같다.

우리는 이곳 한국절 대성석가사에서 여장을 풀었다. 7백여평이나 되는 3층건물이 거의 완공단계에 있는데 법당건물을 새로 지으면 이지역 굴지의 사찰이될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하다. 대각회가 주도해 파견한 법신스님은 벌써 1년전부터 이곳에 와서 기식하면서 대불사를 지휘감독하고 있다.

짐을 내린후 카필파 바스투로 떠났다. 부처님의 아버지 숫도다나왕이 지배하던 이른바 가필라성터이지만 지금 이곳은 티라울라코트라고 불리는 곳이다.룸비니에서 서북으로 25㎞떨어진 이곳까지는 크고작은 마을거리를 거쳐야 한다. 서문으로 들어가 정반왕 탑터에 참배하고 이어 동문까지 갔는데 마침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 반강가강까지 도보 답사하려던 계획은 취소했다. 가필라성에는 집터와 문터의 유적이 남아있고 큰 나무와 잔디밭이 볼만하지만 성의규모가 별로 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타마 왕자가 네개 성문을 나와서 만나게되는 생로병사의 절실한 체험을 생각하면 너무나 소중한 유적이란 생각이다. 숙소인 대성석가사로 돌아오니 어느덧 저녁 6시다. 절에서 마련한 저녁에는 된장국이 있어서 입맛을 새롭게 한다.

피풀리하와와 제타바나이튿날 21일 4시에 일어나 법당에서 아침예불후 곧 출발했다. 네팔 인도국경을 넘어 다시 인도땅으로 들어가 피풀리하와에 도착한것은 9시를 넘어서였다. 룸비니에서 직선거리로는 얼마되지 않지만 입국관리소가 근처에 없어서 빙빙 돌아오느라고 늦은 것이다. 이곳은 인도측이 주장하는 카필라바스투다. 이곳에서 부처님의 사리가 나왔고 기록도 나온 때문이다. 하지만 아쇼카 석주가 네팔령에 있어서 객관적인 인정을 못받고 있다고한다. 예불후 곧장 슈라바스티(사위성)로 향했다.

도중에 천불화현(天佛化現)탑터에 들렀다. 코살라국왕 프라세나짓이 기적을간청하자 부처님이 망고열매를 땅에 심고 하루사이에 거목으로 만들어 그 아래 연꽃에서 앉기고 서기고 하는 기적을 행한 것을 기념하는 자리다. 작은산처럼 된 벽돌구조의 탑으로 그 정상에 올라보니 그야말로 일망무제다. 그만큼 크기도 하려니와 이근처가 넓은 평지이기 때문이다. 염소떼가 탑꼭대기까지 올라와 나무잎을 뜯어먹는 모습이 한가롭기만 하다.

거기서 원정사 곧 제타바나로 갔다. 이곳은 원래 코살라국 제타태자의 소유였으나 수닷타 일명 아나타핀다카(급고독)장자의 신앙심에 감동하여 부처님의 거처로 희사한 곳이다. 당시 불교교단 승원중 가장 규모가 컸다는 것이외에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물던 곳으로 그 중요성이 크다. 부처님은 45년교환기간중 슈라바스티성 5회를 포함해 무려 24회의 우안거를 여기서 보냈던것이다. 이곳에 들어와 보니 지금은 거의 흔적만 남아있지만 과연 그 시설규모가 다른 승원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난다가 심은 거대한 보리수며 부처님의 명상처요 주처이기도했던 간다 쿠티며, 손님방도 되고 강당도 되었다는 코삼비 쿠티하며 부처님이 매일 행선하던 자리가 모두 뚜렷하게남아있어 순례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부처님은 이곳에서 19걸음 거리의 행선장을 천천히 오고가며 깊은 명상에 드셨다고 전한다. 일행이 간다쿠티에서 예불할 때 중국순례자들과 티벳스님들도 그곳을 떠날 줄 몰랐으며 아난다의 우물자리에서 나오는 펌프물에 손을 담그니 더운 느낌이었다.

이어 동문을 나와 부처님이 탁발행을 하시던 길을 따라 걸어서 쉬라바스티(사위성˙마헤트)로 향했다. 중도에 앙굴리말라 굴이라는 탑위에 올랐다. 앙굴리말라는 악명높은 살인자였으나 부처님에 귀의해 바른 깨달음을 성취한인물로 그를 위해 이런 탑이 조성되었다니 기이하다. 근처에 수닷타장자 탑이라는 카치쿠티 유적이 있어 대조를 이룬다. 비슷한 크기이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와 주변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날이 지면서 기원정사 경내의 마하보디협회 비하르에서 저녁공양을 했다. 스리랑카 출신의 주지스님은 근처에 고교를 세워 근 6백명을 가르치고 있고 석가족 출신 80여 학생에겐 승려훈련을 시키고 있다고 한다.

청년불교도협회 만든 석가족이튿날인 22일 새벽 4시에 다시 상카시아로 출발했다. 추운 밤추위 때문에 방한복을 입은채 침낭속에서 잘 잤지만 달리는 차속에서 다시 잠을 잤다. 럭나우와 칸푸르등 큰도시를 거쳐 오후 5시쯤 목적지인 상카시아에 도착했다. 부처님이 도리천에 올라 어머니를 교화한뒤 이곳으로 하강했다는 전설의 땅이다. 부처님이 실제 이곳까지 왔는지 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 전설을 기념해 남아있는 유적은 별로 없고 힌두사원만이 우뚝한 벽돌탑위에 남아있는 것이 을씨년스럽다. 동네 검둥개가 9마리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이 한적하고 공작새가 근처를 서성이는 것이 이채롭다. 석양녘에 예불후 이곳 청년불자들의 저녁초대에 응했다. 석가족 청년들은 youth buddhist society(청년불교도 협회)를 조직해 상카시아에학교와 절을 지을 계획을 세웠으나 한국불자들의 물심양면의 지원없이는 그 결실을 보기 어렵다는 호소다. 밤길에 아그라로 이동해 새벽 1시쯤이 되어 아그라 아소카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인도에서 지금껏 기숙한 호텔중 가장 좋은 시설이라 더운 물에 샤워를 했다.

23일에 아그라성과 타지마할을 관광하고 24일에는 델리로 이동해 라지 가트의 마하트마 간디 화장터를 참배한후 국립박물관에서 인도 불교의 진수를 되새겼다. 이곳에 피풀라하와에서 출토된 부처님 진신사리도 전시되어 한국불자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 사리는 결코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띈 것이 아니었고 그저 사람의 뼈조각이란 느낌이었다. 실상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과 그 가르침이란 것을 새삼 깨우쳐주는 것 같다. 그날밤 타이항공에 올라방콕을 향하면서 고되어지만 보람있고 뜻깊은 인도순례행을,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았다.


공종원/조선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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