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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구월산 월정사 〈상〉

기자명 이학종

'9월 9일 승천 단군 기려 구월산 명명'

구월산 입구인 검문소 전경. 구월산이라고 적힌 콘크리트 팻말과 강성대국이란 현판이 이색적이다. 그 뒤로멀리 구월산의 능선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는데 굽이굽이 늘어서 있는 산의 모양이 숱한 전설과 애환을 상징하는 구월이란 이름과 썩 잘 어울린다.

우리 일행을 태운 승합차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오늘의 목적지는 평양 남쪽 사리원 부근이다.

거리는 가깝지만 하루에 다녀오기에는 만만치 않은 일정인 터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평양을 빠져나왔다. 이번 북한 불교기행의 마지막 평양 밖 외출이라 아쉬움도 조금 남아 있다.

오늘의 일정은 구월산 월정사와 정방산 성불사를 참배하고, 그 사이에 평불협이 지원하는 금강국수공장을 방문하는 것이다. 서둘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도 있는 빠듯한 일정이다.

이대로 계속 달리면 서울인데…

사리원으로 달려가는 고속도로를 타고 우리 일행을 태운 승합차는 신나게 달려간다. 지나는 차량이 거의 없으니 거칠 것이 없다. 이대로 계속 달려가면 개성이고 게서 조금 더 달려가면 서울이다. 서울을 지척에 두고도 저 멀리 북경으로 해서 돌아올 수밖에 없으니 이 또한 분단의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심상진 조불련 서기장 스님이 어김없이 한 마디 거든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서울인데 갈 수가 없으니…, 어쨌든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일행이 약속이나 한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통일이야말로 민족 모두의 염원이라는 생각에는 남과 북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월정사는 아사봉 줄기 내린 곳에 자리

4만 양민 학살 석당교엔 스산함 남아

차창 밖으로 평양 아래쪽 지방의 산천을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산도 좋고 하늘도 좋고 조금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신선한 바람도 좋다. 며칠째 이어진 기행의 여독이 쌓여 졸음이 밀려오고 있지만 애써 참으며 북녘의 산하를 살핀다. 이번에 보고나면 또 언제 볼지 모를 이곳 조국의 땅을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에 담기 위해서다.

일정표에 보면 오전 10시 30분까지는 월정사에 도착해야 한다. 고속도로를 한시간 남짓 달리다가 사리원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왔다. 앞으로도 신천을 거쳐 안악군까지 한참을 더 가야 한다.

길 양편으로는 예외 없이 오가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무슨 일로 저렇게 열심히 걸어가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묵묵히 열심히도 걷는다. 장을 보러가는 것이라고는 하는데, 아마 식량 배급 등 다른 목적이 있을 듯싶다. 제법 추운 날씨라 저마다 두껍게 옷을 입었는데, 몇몇 아주머니들은 세련된 모양의 숄을 걸치고 있기도 하다.

이따금씩 굉음을 내며 달리는 트럭이 지나치는데, 트럭 뒤 짐칸에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데도 표정은 하나같이 무덤덤하다. 남쪽에서 온 사람들이 신기한지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고, 여유 있게 손을 흔들며 미소를 보내주는 이들도 있다.

양민학살의 한 담은 석당교를 지나

사리원에서 신천 방향의 신작로로 한참을 달려가다 보니 강이라고 하기엔 넓은 하천이 나타난다. 그 강을 건너는 왕복 2차선의 긴 다리(교량)가 있는데, 바로 한국전쟁 당시 4만명의 양민이 희생됐다는 석당교이다. 중유공급 중단조처와 함께 미국과의 충돌이 본격화되는 시점이어서 그런지 이 석당교의 양민학살에 대해 북녘에서는 선전학습이 한창이란다.

구월산은 석당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해 강 옆의 뚝 길을 따라 가야 한다. 뚝방 길을 달려가다가 차를 세우고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다.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펴는데 찬 바람에 두 볼을 아려올 정도다. 북녘에서는 보기 어려운 광활한 평야지대를 돌아보고 있으려니, 조불련 차금철 스님과 이경철 불자가 다가와 석당교의 양민학살에 대해 친절히 설명을 해준다.

신천의 양민이 12만인데, 그 중 1/3인 4만 명을 미군이 죽였다며 두 주먹을 부르르 떤다. 산 사람을 강으로 밀어 넣는 것도 모자라 살아나오지 못하도록 돌까지 매달았다는 등 할 말이 참 많은 표정들이다. 이곳에 살았던 양민은 대개가 농민들이었을 텐데, 아무리 전쟁 통이라고 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을 잔혹하게 죽일 수 있다는 무자비함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남이든 북이든, 비극적 민족사의 현장인 석당교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다시 구월산을 향해 달려간다. 구월산까지 가려면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따라 20여분 더 들어가야 한단다. 길옆의 정경은 전형적인 시골 농촌마을이다. 닭과 돼지가 보이고 논에는 낱가리가 탑처럼 서 있다. 마을을 지나 산 쪽으로 더 달려가다 보니 어렴풋이 굽이진 산의 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드디어 구월산 초입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구월산에는 월정사보다 큰 패엽사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전소돼 현재는 황량한 절터만 남아 있다. 패엽사 터를 보고 싶었으나 일정이 빠듯해 다음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5대명산 구월산 능선 아스라이

한 10여분 달려 들어갔을까. 저만치 구월산 계곡을 가로질러 놓은 작은 다리 앞에 바리게이트를 쳐놓고 출입자를 확인하는 일종의 검문소가 나타난다. 교량 양쪽으로 흰색 페인트칠을 한 사각기둥 형태의 시멘트 구조물이 서 있는데 5대명산 구월산이라고 쓴 붉은 색 글씨가 인상적이다. 우리 일행을 세운 승합차를 수상쩍은 눈길로 힐끔거리는 한 젊은 여성 관리인이 꽤나 까다롭게 검문을 실시하는 모양이다.

차금철 스님이 내려가 '남조선에서 온 손님들'라고 일러주었는데도 무언가 더 확인해야겠다는 석연찮은 표정이다. 한 5분을 지체해 어렵게 출입허가를 받아 구월산으로 들어간다. 멀리 보이는 구월산의 능선은 굽이굽이 참 아름답다. 전형적인 산길을 따라 구월산의 품으로 빠져 들어간다. 비포장의 산길을 달리며 소설 『장길산』에 등장했던 바로 그 구월산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는다.

구월산.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4대 명산으로 알려진 명산이기에 그 아름다움을 장황하게 펼칠 필요까지는 없겠으나 단군이 평양에서 도읍을 옮겨 나라를 다스린 민족의 성산이라는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을 듯싶다. 산의 높이는 945미터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심한 풍화작용으로 도처에 기암절벽이 형성되었고 그 사이로 계곡이 만들어져 풍치가 빼어난 곳이 많다.

단군의 기록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사달산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구월산이라는 이름은 단군은 이곳에서 9월 9일 승천하여 신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이다. 지금 찾아가는 월정사도 바로 단군을 상징하는 아사봉의 동쪽면 절골에 위치하고 있다. 아사봉은 구월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데, 아사봉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아름다운 산줄기를 배경으로 가마귀골과 마당개울의 물이 합쳐지는 삼각지점에 월정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숱한 전설과 민족사의 애환을 간직한 산 구월산의 품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나그네의 마음은 마치 맞선자리를 나서는 양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차 있다.



구월산=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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