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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염치로 사홍서원을 외우는가

기자명 윤청광
우리나라 2000만 불자들은 승속을 불문하고 법회를 시작할 때에 삼귀의부터 염송한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게 귀의합니다.

그리고 법회를 마칠 때에는 사홍서원을 다 함께 다짐한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불자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 기본적인 상식을 왜 새삼스럽게 나열하느냐고 의아스럽게 여길 독자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과연 매일처럼 염송하고 다짐하는 삼귀의와 사홍서원을 그냥 입버릇처럼 건성으로 읊조리기만 하고 있는지, 참으로 마음속에 뼈저리게 깊이 깊이 다짐하며 염송하고 있는지 스스로 한번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삼귀의와 사홍서원은 우리불자 한사람 한사람이 스스로 부처님께 자신의 마음가짐을 다짐하고 “앞으로 반드시 이렇게 살겠습니다”하고 부처님께 맹세하는 거룩한 의식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홍서원을 다짐한 그 입술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중생을 다 건지기는커녕 중생을 해치고, 중생을 욕하고, 중생을 짓밟고, 중생을 헐뜯고, 중생의 몫을 가로채는 치사하고 더럽고 부끄러운 일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솔직히 한번 우리의 추한 모습을 되돌아보자.

거룩하고 엄숙하고 경건한 부처님 앞에서 사홍서원의 맹세가 끝나고 산회가를 마치면 점심공양이 이어지는데, 서로 남보다 먼저 공양을 받으려고 뛰어가고 심지어는 새치기까지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돌아가는 길에는 서로 먼저 버스를 타려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버스에 오르자마자 서로 먼저 좌석에 앉으려고 염치·체면 불구하고 엉덩이부터 들이미는 추태가 벌어지고 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하고 부처님께 맹세한 그 입술에 아직 침도 마르지 않았는데,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느 세월에 어느 세상에 저 많은 중생을 다 건질 수 있을 것인가.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하고 부처님께 맹세했으면, 그 중생은 그야말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요, 이 세상 생명 있는 것을 모두 다 건지겠다고 맹세한 것인데도 다른 미물의 중생은 그만 두고라도 한 법당에서 한 목소리로 다함께 사홍서원을 맹세한 바로 내 옆의 똑같은 법우나 불자부터 존중하고 아끼고 도와주고 건져주어야 불자의 도리일텐데 “내가 언제 사홍서원을 했는냐”는 듯, 저만 먼저 먹고, 저만 먼저 버스 타고, 저만 먼저 자리에 앉으려고 아우성친다면 이건 정말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속가에 살고 있는 재가불자들의 이런 추태를 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거니와 인천의 스승인 스님들께서도 사홍서원 따로 행동 따로를 보여주고 계시니 슬프기 짝이 없다.

지난 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우리는 그동안 일어났던 종단사태로 징계를 받았던 스님들에 대한 대사면을 단행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었다. 모처럼 우리불교계에 용서와 화합, 자비와 융화의 아름다운 불교의 모습을 고대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병아리의 눈물’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아침저녁 하루도 빼놓지 않고 사홍서원을 부처님께 맹세하는 우리의 거룩한 스님들께서 수십년간 같은 도반이었던 똑같은 부처님 제자들인 다른 스님들도 건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런 마음가짐으로 무슨 중생을 어떻게 건지겠다는 것인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번뇌가 아무리 끝없이 많지만 기어이 그 번뇌를 다 끊겠다고 맹세하는 스님들께서, 수십년 도반에 대한 미움과 원한과 질시와 하찮은 감정의 앙금조차도 끊지 못한다면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느 세월에 어느 세상에 저 많은 번뇌를 다 끊겠다고 맹세하는지 알 수가 없다.


윤청광/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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