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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불교: 아시아 여성 불교인과 비구니교단①

기자명 박경준
  • 교계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스리랑카, 비승비 속의 보살승단 '다사 실 마타보'

11세기말 촐라왕의 침공 이후 비구니 승단 소멸

재가불자 중심으로 19세기말 비구니 교단 부활 모색

[책임번역 : 박경준(동국대 불교대학 교수)]

이 글을 쓴 낸시 J. 바네스(Nancy J. Barnes)는 토론토대학교에서 산스크리트학과 인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코넥티커트주에 있는 하트포트대학과 트리니티대학의 객원교수로 있다. 그는 스리랑카를 비롯하여 태국, 미얀마, 티베트, 대만 등의 비구니들과 비구니 율장의 범위 밖에서 활동하는 여성 불교인과 단체들은 비구 교단과 학자들의 무시 속에서 아시아와 서양의 여성불교조직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그들은 그 결과 종교라고 하는 우산 아래서 점차 주도적인 활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요 논문으로는 〈여성불교도〉,〈여성불교〉,〈여체(女體〉의 전환〉등이 있다.

<편집자>

비구니 교단의 재건

비구니 교단은 설립 이래 인도에서 불교가 소멸할 때까지 번성하면서 스리랑카, 중국, 미얀마 등의 아시아 각국으로 전파되었다. 중국을 통해서는 베트남, 한국,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결국 스리랑카와 미얀마에서는 사라졌지만중국(인민공화국과 대만, 홍콩)과 한국, 베트남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오늘날 몇몇 아시아 국가 중에는 불교가 주요 종교이면서도 비구니 교단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도 있다. 20세기에는 많은 나라에서 일부 불교인들이 여성수행자 교단을 설립하거나 또는 재건하려는 생각을 해왔다. 특히 지난 10년동안 비구니 교단을 완전한 모습으로 설립시키려는 전세계적인 노력이 강렬해지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은 태국과 스리랑카 등의아시아 여성들과 불교로 개종한 서구 여성들이다. 이들은 티베트의 달라이라마 등 비구 교단의 몇몇 중요 인사들의 협력을 얻고 있다.

스리랑카의 여성 불교인 `다사 실 마타보'

불멸 후 3세기 인도에서 계를 받아
온 남녀에 의해 스리랑카에 비구 교단과 비구니 교단이 설립되었다. 그들은이 섬에 상좌부(上座部)를 설립하였다. 스리랑카에 비구니 교단이 설립되어야 한다고 요청하여 최초의 싱할라인 비구니가 된 사람은 바로 스리랑카의공주였다. 공주와 그녀를 따라 계를 받은 싱할라 여성들을 위해 비구니 거처가 마련되었고 수백 년 동안 비구니라는 존재는 이 섬나라 불교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스리랑카의 비명(碑銘)을 통해 11세기까지 비구니 교단이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1세기 남부 인도의 촐라(Chola)왕이 이 섬을 정복함으로써 끝난 정치적 불안과 오랜 전쟁 때문에 불교는 스리랑카에서 거의 소멸되었다. 비구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교단에 새로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계를 주기위해 계단을 열 수 없었다. 외견상 비구니 교단 역시 황폐화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비구 교단과 비구니 교단은 미얀마에 있는 스리랑카 출신 상좌부 스님들이 꾸려왔다. 그러므로 11세기 말엽 스리랑카 왕은 상좌부계통의 승려들을 미얀마에서 불러와서야 자국에 비구 수계식을 복원할 수 있었다. 비구니 교단을 위해서는 이런 노력을 한 것 같지 않다. 당시의 불교사기록에는 비구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에 사실상 비구니의 운명에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여성 교단이 싱할라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스리랑카에서 여성 출가자에 대한 수계가 다시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엽이었다. 이것은 싱할라 불교를 혼란시키고 그 제도를 침해하던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의 유럽 열강들의 오랜 식민지 시기에서 스리랑카가 벗어났을 때였다. 불교인들은 19세기 서구 기독교인들의 지배에 저항하기 시작하였고 자신들의 종교를 부활시키고 부흥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불교부흥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불교 내에 자신들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여성불교인들의 노력이었다.

스리랑카의 불교부흥을 이끈 것은 남녀 신도였는데 이들은 현존하는 비구 체제가 여성들의 종교적 염원이나 교육 욕구를 해소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붓다 시대 이래로 가장 신심있는 불교인들이 전통적으로 수지해 오던 10계를 스스로 지키겠다고 일부 재가 여성들이 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전통적인 비구니처럼 삭발을 하고 가사와 흰색 법복을 입으며 `아라마야(aramaya)'라는 종교 공동체에 함께 모여 살았다. 그들이 선택한, 구족계를 받은 승려의 가사와 신심있는 재가인의 흰색이 어우러진 의상의 색이 상징하는 것은 스스로 일반 재가인도 아니고 구족계를 받은비구니도 아니라는 새로운 지위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려는 것이었다.이러한 최초의 `십계를 지키는 여성들', 즉 `다사 실 마타보(Dasa Sil Matavo)'는 전통적인 비구니들이 했다고 알려지지 않은 일을 하였는데, 바로 그들의 종교공동체에 학교를 열어 어린 소녀들을 교육시키는 것이다. 수다르마차리(Sudharmacari, 속명 카트린 드 알루이 Catherine de Alwis)는 많은 재가 불교인의 지원 속에 `다사 실 마타보'의 가장 중요한 공동체 중 하나인 `수다르마차리 우파시카라마야(Sudharmacari Upasikaramaya)'를 1907년 칸디(Kandy)에 세웠다. 어린 소녀를 위한 학교와 이 공동체는 오늘날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수다르마차리와 그 공동체는 가정생활을 떠나종교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다른 싱할라 여성들에게 모범이 되어 왔다. 그러나 `다사 실 마타보'를 따르는 종교의 길은 전통적인 비구니의 길과는 다른데 이는 의도적인 것이다. 한 사람의 `다사 실 마타보'는 스스로는 물론,교단이나 국가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여전히 재가여성이다. 이런 이유로 `다사 실 마타보'공동체는 국가나 교단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출가수행하는 재가 여신도들

오늘날 스리랑카에는 2천여 명 이상의 `다사 실 마타보'가 존재한다. 현재다수는 섬 곳곳에 흩어져 혼자 살지만 그밖에 소규모의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경우도 많다. 그들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도움이 필요한 재가인들과 상담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환자들을 보살피고 재가인들을 위해 불교 경전을 암송하기도 하며 불교의 종교 의식에 참가하기도 한다. 이들 활동의 대부분은 종교적 의무와 재가 집단에 대한 봉사에 집중되어 있지만, 대다수는 종교적인 자기 발전을 위한 선정과 교리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위해 일상 시간의대부분을 보내는데, 그럼으로써 붓다가 그랬던 것과 같은 긍극적인 개달음과자유를 얻고자 한다. `다사 실 마타보'가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는 재가에대한 의무와, 진정한 출가자의 사명을 따라 모든 시간을 선정에 보내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 사이에는 어떤 긴장이 존재한다.

출가자의 사명을 가장 강렬하게 바라는 사람이라면 섬에 있는 외딴 숲속 정사에 머물면서 매우 간소하긴 하지만 다른 의무감 때문에 산만해지지 않고선정을 닦을 수 있는 삶을 택하고자 할 것이다.

정부의 비구니 교단 부활 정책

정부는 비구니 교단 부활의 가능성에 관한 보고서를 만들게 하고 `다사 실마타보'의 등록을 추진하였으며 이들을 통합하여 정부가 후원하는 거주지역에 머물도록 주선하였다. 불교교리와 경전에 대한 진보된 교육이 가능해졌으며 원한다면 승려들과 함께 시험을 치를 수도 있게 되었다. 저명한 일부 재가 불교인들도 스리랑카에 비구니 교단을 부활하기 위한 노력에 지지를 보내주었다. 여기에는 비구교단의 소수 지도자들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다사 실 마타보'들에게 구족계의 수지는 비구 교단에 대한 제도적종속과 정부의 통제를 의미하기 때문에, 비구니가 되기 위한 수계를 원하지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비구니가 되면 8경계를 수지해야 하며 상좌부 비구니《율장》의 3백11계를 지켜야 한다. 현재 `다사 실 마타보'는 자치권이 있기때문에 그들이 하는 일에 승려들의 간섭 없이 스스로의 이상에 맞는 종교적인 삶을 꾸릴 수 있다.

싱할라 사회에서 그들의 위치가 승려들보다는 덜 확실하고 20세기 초기의 `다사 실 마타보'보다도 덜 존경받지만 재가인들은 여전히 그들을 종교 전문가로서 일반 재가인들보다는 뛰어난 사람으로 존경하고 있다. 더욱이 대부분의 `다사 실 마타보'는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서 새로운 형태의 여성 불교인출가자로서의 그들의 현 지위를 유지하고자 한다.

일부 `다사 실 마타보'는 비구니 교단의 부활을 위해 힘쓰고 있다. 스리랑카의 여성 출가자 중에는 10계를 수지한 소수의 서양 여성들이 있다. 이들과일부 싱할라 출신 `다사 실 마타보'가 부활을 위한 운동의 최전선에 있다.서양 여성들은 대부분 선정의 길을 따르기 위해 세속의 삶을 포기했는데 이점은 싱할라 출신 `다사 실 마타보'의 대다수가 사회에 대한 헌신과 봉사의길을 따르고 있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서양 출가자 집단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스리랑카에 `파라파두와 비구니섬(Parappaduwa Nuns'Island)'을 만든 독일 출신의 `다사 실 마타보' 승려 아야 케마(Ayya Khema)이다.

그녀는 여성 교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좌부 여성들이 자신의 종교적염원을 완전히 이룰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고 믿으며, 여성들이 현재의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싱할라 사회에 기여하여 비구니 만큼은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스리랑카에서 비구니 수계를 인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야 케마는 중국 법계의 수계를 받기로 결심하였다. 1988년 그녀는 2백명의 여성들과 함께 로스 엔젤리스의`시라이사(Hsi Lai Temple)'에서계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 다섯은 비구니가 되어 스리랑카에 돌아가, 후원자들의 바람대로 새로운 비구니 아라마야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원래 거주지로 돌아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두 사람 정도는 비구니의 가사가 아닌 `다사 실 마타보'의 황색과 흰색 법복을 계속 입었다. 아무도 자신에게 특별한 관심이 쏠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것이다.

비구니 교단의 부활에 대한 의견은 비구 교단 내부에서도 다양하다. 다소 놀라운 일이지만, 대다수의 비구들, 특히 젊은 비구들은 호의를 가지고 `다사실 마타보'를 불교전문가로 생각하며 그들의 비구니 수계에 동조한다. 반면에 스리랑카에서 가장 영향력있고 저명한 일부 승려들은 비구니 교단의 부활을 맹렬히 반대하는데 그들은 비구니 교단이 먼 옛날에 자연사했다고 본다.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상 어느곳에서도 새로운 비구니에게 계를 주어야할 상좌부 비구 계단에 참여할 수 있는 상좌부 법계의 비구니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여성 교단의 부활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일은 미래불인 미루이이 세상에 태어날 때가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박경준/동국대 불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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