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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지간

기자명 김정빈

다른 사람 향한 분노와 성냄, 때론 내게 온다

아버지 영조와 극심한 충돌로
뒤주서 몸부림 속 숨진 세자

공격적 행위로 이어지는 분노
타자와 자신에게 폭력 행해져

부처님은 분노를 불길에 비유
모든 인간관계 태워버리기도

그림=근호
그림=근호

영조 27년 11월, 현빈 조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영조와 정빈 이씨 사이에 태어난 효장세자의 부인, 즉 영조의 큰며느리였다. 효장 세자가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현빈 조씨는 자신의 외로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시아버지 영조의 마음을 잘 헤아리며 위로해주었다.

현빈 조씨와 함께 영조의 마음을 다독여준 여인이 또 한 사람 있었는데, 그녀는 사도세자의 누이인 화평옹주였다. 그런데 화평옹주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며느리에 이어 마지막 남은 위로자인 딸까지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영조는 자주 며느리 현빈 조씨의 빈소를 찾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조씨의 궁녀인 문씨를 만나게 되었다는 데서 생겼다. 이듬해 봄, 문씨에게서 태기가 나타났다. 이것은 전혀 없으란 법은 없는 일이었지만 세자는 이 일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때 사도세자의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고, 그의 아버지 영조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세자에게 아버지가 며느리를 모시던 하천한 여인을 거둔 일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영조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고, 그 기질은 그의 아들 사도세자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에게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 유전적 화증이 세자에게 나타났는데, 사서는 그것을 ‘기승(氣昇)’이라 표현하고 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에 대해 화를 내었고, 반항적인 모습을 보였다. 다행히 숙종비였던 대비 김씨(인원왕후)와 정성왕후 서씨가 세자를 감싸줌으로써 그럭저럭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러던 중 영조 33년에 서씨와 김씨마저 세상을 떠나버렸다. 안전판이 사라진 이때부터 영조와 세자는 직접 충돌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감정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영조는 자주 정승을 바꾸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며 신하들을 겁주었다. 정말로 물려준다는 게 아니다. 임금이 엄청난 대권을 내려놓겠다고 하면 신하들로서는 말리지 않을 도리가 없는데, 영조는 이 점을 노리며 신하들을 겁박했던 것이다.

그해 11월, 영조는 세자를 불러 호된 꾸지람을 내렸다. 세자가 정상을 벗어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때였다. 얼마 전 세자는 내관 김한채의 목을 베어 죽였었다. 또 자기의 사적인 연애에 끼어들어 반대하는 아버지를 협박하기 위해 우물에 뛰어들기도 했었다. 영조는 세자에게 반성문을 써서 올릴 것을 지시했다.

세자가 올린 반성문에는 잘못했다는 내용만이 있을 뿐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것을 무성의하다고 본 영조는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겠다는 협박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신하들은 울며불며 만류했고, 임금은 마지 못한다는 듯 양위 의사를 거둬들였다. 그 와중에 세자는 임금의 거처 밖에서 하교를 기다리며 추위에 떨고 있었다. 때는 음력 11월 한밤중이었다. 마침내 세자는 기절해버렸다.

이때 이후 세자의 ‘기승’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마침내는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고, 칼로 아버지를 찌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영조 38년, 세자는 자신의 처소 앞에서 아버지의 명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다음 달에는 세자가 내시를 보내어 아버지에게 문안인사를 올렸으나 임금은 답하지 않았다. 세자는 계속 임금의 명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동안 세자의 마음에는 분노가 채곡채곡 쌓여가고 있었다. 왕조실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사도세자의 빈으로서 훗날 ‘한중록’을 남긴 혜경궁 홍씨에 따르면 그해 윤오월 11일에 세자는 아버지를 죽이려고 칼을 든 채 경희궁 수구(水口)로 들어가려고 했다. 몸이 너무 비대했기 때문에 그 시도는 무산되었다. 몸에 상처를 입고 돌아온 그 일을 세자빈 홍씨가 다음날 시어머니 영빈 이씨에게 고했다.

영조는 세자를 불러 세워 자결할 것을 명했다. 세자는 허리띠를 풀어 목을 매었고, 관리들이 달려들어 허리띠를 풀어주었다. 흥분한 영조는 그 자리에 있던 대신 네 사람을 파면했다. 세자의 아들(훗날의 정조)이 들어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임금은 관리들에게 세손을 끌고 나갈 것을 명했다.

오후 4시경, 비정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뒤주로 들어갈 것을 명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영조는 세자를 편드는 관리들을 모두 내쫓았다. 문밖으로 쫓겨난 관리들은 문 안에서 세자가 “부주(父主)여, 살려주소서!”라고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철이 든 이후 세자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세자는 뒤주 안으로 들어갔고, 아버지는 뚜껑을 덮은 다음 자물쇠를 채웠다. 다음 날, 세자를 모셨던 환관 박필수, 여승 가선, 기생 다섯 명이 참형을 당했다. 세자는 뒤주 속에서 여드레 동안 몸부림을 치다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왕조실록이 전하는 ‘기승’을 불교는 ‘진심(瞋心)’이라 부른다. 진심은 화, 짜증, 분노, 우울 등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감정을 모두 포함하지만 그 중심은 분노이다. 분노는 대부분의 경우 타자를 향해 폭발하며, 때로는 자신을 향해 폭발하기도 한다. 분노가 절제되지 않을 경우 공격적인 행위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타자와 자신을 향해 폭력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분노로부터 유발된 타자를 향한 폭력은 상대방에 이르러 그의 분노를 야기한다. 그리하여 그 또한 폭력으로써 대응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대체로 서로 이익이 충돌하는 사람 간에서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 점에서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례는 특별하다.

그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며, 부자지간은 이익이 충돌하기보다는 이익을 공유하는 면이 많은 관계이다. 물론 아버지와 아들일지라도 몸이 각각 다르고 마음 또한 따로따로이므로 기본적으로는 남남 간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가족은 남남 간의 관계를 넘어서는 끈끈한 애정으로 뭉쳐져 있다. 가족 간의 정을 유난히 중시하는 유교적 기풍이 돈독했던 조선조라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부자는 극심한 분노로써 충돌했고, 그 결과 아버지에 의해 자식이 뒤주에 갇혀서 죽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방 한 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 안에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뜨겁고 컴컴한 그 공간 안에서 세자가 몸부림을 치며 여드레를 보내는 동안 아버지의 분노는 잦아들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분노를 불길에 비유하신 적이 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례에서 우리는 그 불길이 모든 인간관계를 다 태워버릴 수 있다는 진실을 여실히 보게 된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42호 / 2018년 6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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