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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학회, ‘불교학 미래’ 세미나 2. 미디어에 보이는 환생과 윤회 비판

기자명 법보

“영화·드라마 등 미디어 속 환생, 불교적 인간관 결여됐다”

미디어서 환생 증명하는 방식
전생에 대한 기억만으로 판단
불교적 인간관은 오온의 화합
환생·윤회 관한 불교담론 정리
콘텐츠에 적용하는 매뉴얼 시급

티베트 불교의 환생을 주제로 다룬 영화 ‘리틀부다(1993)’의 촬영지로 유명한 부탄 파로종 전경.

‘전설의 고향’류의 드라마나 전면에 불교를 내건 영화가 아니더라도 요즘에는 윤회 또는 환생을 소재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본다. 이런 미디어들이 환생을 소재로 하는 데에는 판타지물이라는 장르의 특성이 한몫을 한다. 환생이나 윤회는 불교를 대표할 수 있는 개념이므로 미디어에 이런 소재가 늘어난다면 불교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과연 환생이나 윤회라는 불교 개념이 본래의 맥락에 맞게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미디어가 환생 개념을 구현하려면 제작진은 환생 개념을 미디어가 지향하고 있는 주제 의식과 연관시키기 위해 어떻게든 이해하고 재해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미디어에 구현된 환생 개념을 살펴보면 환생 개념이 일반에게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이글에서는 몇 가지 미디어가 구현하는 환생과 윤회 개념을 살펴서 불교적인 맥락이 어떻게 구현되어 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본격적으로 일반 미디어에서 환생이라는 소재를 전면적으로 사용해서 알려진 영화로는 ‘환생(Dead Again, 1991)’이 있다. 현생에서 벌어진 사건의 원인이 각자의 전생에 얽힌 원한관계였다는 내용의 스릴러물인데 우리에게는 ‘전설의고향’에서 이미 낯익은 상황이었지만 이것이 할리우드 영화에서 구현되는 낯설고도 어색한 경험을 하게 하였다. 한편 불교를 전면에 내세운 ‘리틀부다(Little Buddha, 1993)’는 당시로써는 낯선 티베트 불교를 소재로 우리에게 친숙한 환생을 다루었기 때문에 또 다른 새로운 경험을 주는 동시에 티베트 불교를 한국문화에 전하는 역할도 하였다.

국내 판타지 드라마의 시초로 불리는 ‘전설의 고향’(사진 위)와 드라마 ‘도깨비’ 장면.
국내 판타지 드라마의 시초로 불리는 ‘전설의 고향’(사진 위)와 드라마 ‘도깨비’ 장면.

최근 우리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신(神) 도깨비(2016)’에도 환생 구도가 보인다. 현생의 저승사자와 써니의 전생이 각각 김신을 죽인 왕과 김신의 누이로 설정되어 있다. 이처럼 환생을 소재로 한 미디어에서 환생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쓰는 방법은 ‘기억’이다. 전생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현생의 삶이었지만 어느 날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현생의 특정 인물이 전생의 특정 인물과 같은 인물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나를 전생과 연결시키는 것이 기억이기 때문에 전생의 기억만 있으면 현생에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없다. 심지어 ‘환생’의 예처럼 현생에서 성별이 바뀐 것이 반전으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과연 외모와는 상관없이 ‘기억’만 같으면 동일 인물로 판단하는가? 불교가 사람을 오온(五蘊)으로 설명한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덩어리가 화합한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덩어리를 굳이 나누어보자면 물질적인 부분, 즉 육신인 색(色)과, 정신적인 부분인 수상행식(受想行識)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을 육신과 정신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방식은 워낙 일반적이기 때문에 이 오온이라는 설명에 특이한 점이 무엇일까 하겠지만 사실 오온의 핵심은 육신과 정신 어느 쪽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온이 ‘화합’할 때를 특정한 사람으로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판단하게 하는 것이 육신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외모와는 상관없이 기억이 같기 때문에 동일 인물로 판단하는 것은 적어도 오온에 합당한 설명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구도는 육신과 상관없이 정신만으로 정체성을 파악하겠다는 의도가 강하기 때문에 육신을 지배하는 영혼의 개념이 드러난다. 술에 취해 있기 때문에 온전한 내 정신이 아니니 그 상태에서 저지른 행동이 실제 내가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 절대로 불교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디어에서 환생을 증명하는 방식을 기억으로 하게 된 데에는 티베트 관련 미디어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경전에서 전생담을 전하거나 누군가의 전생을 이야기할 때는 천안통이 열린 이가 전생이 이러저러하다고만 할 뿐 환생의 당사자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지는 거론하지 않는다. 그런데 티베트 불교의 달라이라마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미디어로 만들어지면서 환생은 전생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부각된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이 있다. 달라이라마는 윤회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달라이라마가 중생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은 업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으로 하는 원생(願生)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전생에 다 하지 못한 중생 구제를 마저 해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에 따라 생사에 걸림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의지대로 생사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놓치면 원생하는 존재를 향해 윤회한다고 잘못 설명하는 것이고 윤회하는 중생에게 원생의 구조를 들이미는 꼴이 되고 만다. 불보살은 윤회하지 않는 존재이나 늘 중생 곁에 있다. 또 어른 스님들의 다비 때 꼭 외치는 구호가 “빛으로 다시 오소서” 아니었던가. 결국 미디어에 보이는 환생이나 윤회의 구조에는 대승불교, 넓게는 불교가 기본적으로 바라보는 인간관을 놓친 부분이 많다. 사실 근본적으로, 윤회와 환생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교만의 특징이 아니다. 인도의 모든 종교가 윤회를 거론하고 있으므로 각각의 종교가 그런 윤회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라고 설명하는지를 드러내는 것이 그 종교의 핵심을 드러내는 일이다.

최원섭위덕대 전임연구원
최 원 섭
위덕대 전임연구원

환생을 소재로 한 미디어의 몇 가지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윤회나 환생 담론이 미디어로 나타난 것은 외국의 것을 통해서였다. 우리 문화에서 자연적으로 환생 담론이 만들어졌다면 지금의 양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던 불교의 담론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하는 현실적인 콘텐츠 역시 우리의 논리가 아니라 전혀 다른 영역에서 전해진 것을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 전통 속의 불교 담론을 정리하고 그것을 콘텐츠에 적용할 수 있게 하는 불교 매뉴얼을 제작하는 일이 필요하다.
 

[1443호 / 2018년 6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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