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무원과의 부적절한 메시지 및 유치원 부정수급 의혹을 받고 있던 지홍 스님이 최근 불광사 회주직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한때 일었던 불광사 내홍이 가라앉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지만, 신도회 자체 내에서의 반목이 아직 남아 있다는 전언도 있기에 우려스럽기도 하다.
현대불교사연구 자료에 따르면 1908년 범어사가 창건한 ‘동래 포교당’이 첫 도심 포교당이라고 한다. 이후 본사급 사찰 중심의 포교당이 하나둘씩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해방 전후에 몰아친 격동의 정세 태풍에 이어 6·25한국전쟁이 발발하며 1970년대 들어서기 전까지 도심 포교당 건립은 급격한 침체기를 맞는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암흑의 전법 길에 횃불을 들어 올린 건(1974) 불교 대중화의 선구자였던 광덕 스님이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광덕 스님이 전법일로에 들어선 배경이다.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무장한 채 불교정화 운동의 선두에 서기도 했던 광덕 스님은 총무원 총무부장직을 수행하며 종단의 기틀을 세워 가는데도 일조한 바 있다. 그러나 종단은 갈등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종정·총무원장 중심제를 놓고 내부 갈등이 표출(1973)되기 시작한 것이다. 승려의 본분이 수행과 전법에 있다는 결단을 내린 건 바로 그때다. ‘월간 불광’에 담긴 광덕 스님의 고백이 방증한다.
“불교정화가 한국 불교의 정맥을 찾고자 한 일이었는데 만약 자체의 내실화와 포교화가 확충되지 않으면 그 동안의 불교정화가 한낱 종권탈취였다는 지탄을 면키 어려웠습니다. 불교의 존재 이유가 이 땅의 빛이 되고자 하는 것인데 그것(정화)의 당위성만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불광사가 중창불사를 전개하며 창건 31년 만에 새로운 불광사를 세운 건 ‘제2 불광운동’을 펼치기 위함이었다. 책임져야 할 건 분명하게 지고, 추슬러야 한 건 지혜롭게 추슬러야 ‘제2 불광운동’ 전개 동력을 유지·확보 할 수 있다. 현 시점에서 불광사 사부대중이 떠올려야 할 건 골방에 홀로 앉아 ‘월간 불광’ 원고에 매달린 광덕 스님일 것이다.
[1444호 / 2018년 6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