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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폴론나루와 시대 개막

남인도 촐라왕조 침략 극복하고 제2 전성기 연 싱할라의 새 심장

촐라왕 라젠드라1세 침입에
수도 뺏기고 53년간 지배당해


1039년 태어난 위자야바후1세
열여섯 살에 등극하며 대반격
1070년 촐라 물리치고 국권수복


황폐해진 아누라다푸라 버리고
폴론나루와 천도로 싱할라 중흥


새로운 불치사 아타다게 건립은
수도 위상 천명하는 최우선 과제
8일 만에 건물 완공했다는 설화는
급박했던 당시 시대상 담고 있어

남인도 촐라왕국의 지배를 극복하고 싱할라왕국의 국권을 수복한 위자야바후는 폴론나루와를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모실 불치사 ‘아타다게’를 건립했다. 불치가 있는 곳에 싱할라의 지배자가 있다는 믿음은 불치사 조성을 더욱 서두르게 만들었다.

10세기 후반 남인도는 요동치고 있었다. 소수 원주민에 불과했던 타밀족을 규합해 907년 독립국가 촐라왕조를 세운 파란다카1세의 등장 이후 200여년 간 촐라는 남인도의 패권을 장악했다. 촐라왕국은 라자라자1세(985~1014)와 그의 아들 라젠드라1세의 통치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영토 확장에 전념했던 라자라자는 인도의 중남부를 비롯해 서쪽의 섬들, 지금의 몰디브까지 손에 넣었다. 스리랑카 북부지역도 촐라왕국에 점령당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싱할라왕국 전체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라자라자의 뒤를 이어 1014년 등극한 라젠드라는 아버지의 업적과 능력을 뛰어넘는 더욱 강한 군주였다. 당시 바닷길을 통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던 아랍 상인들과 중국 사이의 교역권을 손에 넣고자 했던 라젠드라는 무역의 거점이었던 동남아시아로 지배력을 확장했다. 북부로는 갠지스강 하구와 방글라데시지역을 넘어 인도차이나반도 서부 해안가와 말레이반도를 거쳐 지금의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벵골만을 아우르는 남아시아의 대국을 건설한 것이다. 인도사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촐라왕국의 급격한 팽창은 스리랑카 역사에도 회오리를 불러왔다.

라젠드라는 아버지 라자라자가 점령했던 스리랑카 북부에 만족하지 못했다. 1017년 대군을 이끌고 싱할라왕국의 심장, 아누라다푸라로 진격했다. 남인도를 통일하며 막강한 군사력을 다져온 촐라의 기세에 싱할라는 속수무책이었다. 수도 아누라다푸라는 순식간에 라젠드라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 후 53년, 섬의 대부분은 촐라의 지배하에 놓였다.

점령당한 왕국의 운명은 비참했다. 싱할라의 국왕 마힌다5세는 포로가 되어 인도로 압송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마힌다5세는 남인도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생을 마쳤다.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상징하던 수많은 사찰들도 ‘시바신(힌두교 최고의 3신 가운데 파괴의 신)의 독실한 숭배자’임을 자처하던 라젠드라의 군대에 철저히 파괴당했다. 아누라다푸라에 대한 파괴는 단순한 종교적 배척만은 아니었다. 촐라왕조의 문을 연 파란다카1세는 영토를 확장하며 남부지역에 자리하고 있던 판디아왕국을 복속시켰다. 판디아는 싱할라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촐라와 싱할라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라젠드라는 자신의 조상을 괴롭혔던 싱할라왕국에 대한 복수를 한 셈이었다.

아타다게에 예배 올리는 스님들의 기도처였던 투파라마. 폴론나루와 시대의 건축물 가운데 유일하게 지붕이 보존돼 있다.

하지만 적군의 칼날아래 숨이 끊어지는 이에게, 이런 역사의 셈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특히 싱할라왕국의 승가는 철저히 파괴됐다. 무엇보다 단 한 사람의 비구니도 살아남지 못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그야말로 절멸이었다.

왕족과 귀족들은 수도를 버리고 남쪽 해안가 루후나지방으로 도망쳤다. 싱할라왕조는 루후나 지역에서 숨을 고르며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이때부터 루후나는 침략자로부터 스리랑카를 지키는 저항운동의 거점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반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으리라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수도는 파괴되고 승가는 도륙 당했다. 섬은 촐라왕국의 지방 도시로 전락해 촐라의 왕자들이 섬의 지배자로 파견됐다. 싱할라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보였다. 여명이 밝기 전 가장 짙은 어둠이 섬을 뒤덮고 있었다.

1039년 루후나에 칩거하고 있던 싱할라왕조에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왕가의 혈통을 계승한 아이의 이름은 ‘키티’였다.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서는 ‘키티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정치적 실권자였던 로키사라를 물리치고 열여섯 살에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적을 물리치고 불과 열여섯 살에 왕위에 오른 이 범상치 않은 아이가 바로 싱할라왕국 제2의 전성기, 폴론나루와 시대를 연 위자야바후 1세다. 스리랑카 역사는 위자야바후의 등장을 싱할라왕국의 재건으로 평가한다. 위자야바후의 대관식은 그가 왕좌에 오르고도 십 수 년이 지난 후에야 열렸다. 위자야바후의 관심은 온통 왕국의 수복에 쏠려있었기 때문이다. 촐라와의 격전은 불가피했다.

1066년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수복하기 위한 촐라와의 전투가 벌어졌다. 결과는 실패였다. 하지만 절치부심, 4년 뒤 위자야바후는 아누라다푸라를 점령하고 있던 촐라의 왕 아티라젠드라촐라를 마침내 물리치고 아누라다푸라에 입성한다. 촐라왕국의 지배를 끝낸 대반격이자 위대한 승리였다.

하지만 사찰이 파괴되고 대탑이 무너진 아누라다푸라는 더 이상 빛나는 신성도시가 아니었다. 위자야바후는 이미 아누라다푸라로부터 동쪽으로 100km 가량 떨어진 폴론나루와를 사실상의 수도로 삼고 있었다. 아누라다푸라는 싱할라왕국이 촐라를 물리쳤다는 상징일 뿐이었다. 그렇게 아누라다푸라는 싱할라왕국의 심장, 신성도시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싱할라왕국은 폴론나루와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갔다. 싱할라왕국 제2의 전성기였다.

외세를 물리친 위자야바후는 가장 먼저 승단 재건에 힘을 쏟았다. 출가자에게 계를 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비구조차 없었기에 미얀마로부터 계맥을 전수해 왔다. 당시 미얀마에는 최초의 통일국가인 바간왕조를 세운 아노야타(1044~1077)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미얀마 불교는 5세기보다도 더 이른 시기에 스리랑카로부터 전래됐다. 싱할라왕국은 자신들이 전한 계맥을 다시 이어온 셈이었다.

승단의 재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수도에 사찰과 탑을 건립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치아사리, 불치를 봉안할 불치사의 건립이 시급했다. 도심 가운데 불치사가 들어설 자리가 정해졌다. 위자야바후는 이곳에 돌기둥을 세운 2층 규모의 법당을 지었다. 1층에는 3기의 불상을 모시고 2층에 치아사리를 봉안했다. 사람들은 이 건물을 아타다게(Atada ge)라 불렀다. 싱할라어로 ‘아타’는 숫자 8을, ‘다게’는 집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아타다게에는 8개의 유골, 즉 사리가 모셔졌다거나 부처님의 전생을 소재로 한 8개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고 믿어진다. 8개의 방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심지어는 이 건물이 8일 만에 완공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전설도 있다.

투파라마 내부에는 벽돌을 쌓아 조성한 거대한 입불상이 봉안돼 있었지만 지금은 기단부의 흔적(사진 왼쪽)만 남아있다.

하지만 현재는 1층에 봉안됐던 삼존불 가운데 1기와 2층의 사원을 떠받치던 54개의 돌기둥, 그리고 원래 이 사원이 2층이었음을 말해주는 계단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이름에 얽힌 여러 가지 추정 가운데 8일 만에 법당이 완성되었다는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불치 봉안을 위한 불치사의 건립이 얼마나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는지가 이 이야기 속에 엿보인다.

싱할라 고대 건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문스톤(MoonStone)이다. 왕궁이나 사찰 등 중요한 건물 입구에 놓이는 반원형태의 돌장식이다. 문스톤에는 다양한 문양들이 조각된다. 반원의 바깥쪽 테두리에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상징하는 불꽃문양이 조각된다. 그 아래로 생로병사를 상징하는 코끼리, 말, 사자, 소가 자리한다. 이 네 동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생로병사의 끝없는 반복이다. 그 다음에는 번뇌를 상징하는 엉겅퀴잎사귀와 지혜를 상징하는 백조가 자리한다. 반원의 가장 중앙에는 열반, 해탈을 상징하는 연꽃문양이 있다.

문스톤의 이런 도식이 지켜지는 것은 아누라다푸라 시대뿐이었다. 이후로 문스톤에서는 힌두교에서 성스럽게 여기는 코끼리와 싱할라족이 조상으로 여기는 사자가 사라진다. 발로 밟고 지나가는 문스톤에 성스러운 동물들을 새길 수 없다는 세속적 기준 때문이었다. 조각 순서가 뒤바뀌는 경우가 많아지고 반원형태의 모양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해 후대로 갈수록 다양한 형태의 문스톤이 등장한다. 장식적 요소가 강조되고 화려한 문양들이 가미되지만 이는 문스톤이 본래 갖고 있던 세계관과 해탈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깊은 뜻을 상실한 채 화려한 겉모습에만 치중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폴론나루와의 아타다게 앞에 놓여 있는 문스톤은 아누라다푸라 시대 문스톤의 도식을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다. 아타다게를 건설하며 아누라다푸라에 있던 문스톤을 갖고 와 재활용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를 통해 당시 아타다게의 건립이 매우 급박한 과제였음을 추정한다. 8일 만에 완공됐다는 이야기는 이런 상황을 빗댄 표현일 것이다.

아타다게에는 세 분의 부처님이 모셔졌다. 현재는 한 분의 부처님만 온전한 모습이다. 그 옆에 사라진 부처님의 발만 남아있다.

아타다게 앞에는 위자야바후가 세운 또 하나의 건축물이 남아있다. 투파라마로 불리는 법당이다.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돌기둥과 벽돌만으로 지어진 이 건물의 벽 두께는 2m에 달한다. 이처럼 두꺼운 벽을 쌓아 올렸기에 지붕까지도 벽돌을 이용해 덮을 수 있었다. 내부에는 벽돌을 쌓아 조성한 입불상이 모셔졌지만 현재는 기단부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이 건물은 위자야바후의 손자인 파라크라마바후 시대에 건축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건축양식이 아누라다푸라 시대의 기법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자야바후가 세운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불치를 봉안한 아타다게와 불치사에 예배 올리는 스님들의 기도처였던 투파라마 등 중요한 불교건축물들이 함께 들어서면서 이곳은 폴론나루와의 중심, 싱힐라왕조의 새로운 심장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불치가 있는 곳, 불치를 모신 자가 바로 스리랑카의 주인이라는 싱할라족의 믿음은 이민족, 이교도의 침략 속에서도 견고하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44호 / 2018년 6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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