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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Truth

기자명 임연숙

수묵산수 고귀함 땅으로 끌어내리다

입체·질감 배제한 평면회화
빈 공간까지 균일하게 호흡
화려함 이면 고독감 전달해

‘Truth’, 148×140cm 한지에 먹, 2015년.
‘Truth’, 148×140cm 한지에 먹, 2015년.

이채영 작가의 수묵화는 기존의 수묵화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한다.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산수‘의 주제는 전통재료인 ‘수묵과 맞물려 수묵화는 곧 산수화라는 생각 때문에 현재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실감되지 않는 그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허나 이채영 작가는 수묵산수의 고귀함을 땅으로 끌어 내린 느낌이다. 그것은 낮은 데서 다시 시작하는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접근으로 먹은 작가의 감정 표현의 수단처럼 느껴진다.

평면회화에서 작가들이 끊임없이 평면 위에 입체감을 부여한다거나 질감을 강조한다거나 하는 것에 비하면 이채영 작가의 그림은 지극히, 너무나도 평면적이다. 화면 전체가 회화 그 자체이다. 그 속에서 작가의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감성을 서서히 끌어올리는 듯한 느낌과 차분하고 조용하게 천천히 작가가 생각하는 어떤 표현의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일상을 조용히 관조하는 시각으로, 특히 어떤 공간에 대한 생각, 그 공간을 스쳐 지나가는 역사성과 의미에 대한 관심이 일상 속의 어떤 특정 장소에 대해 다른 시각을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그 장소를 스쳐 지나간 인연과 혹은 이루어질 인연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그림에 표현된 장소는 곧 재개발되어 무엇인가 건물이 들어설 텅 빈 공간이다. 넓은 이 공간은 곧, 혹은 시간이 걸려서 어떤 다른 주거지로 개발될 것이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 잡초가 무성히 자라고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이곳은 문득 작가에게는 이질적 풍경이 되었고, 도시의 번잡한 이면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더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화면은 넓은 수평적 구조다. 화면 전체가 중심부나 시각적 착시가 무시된 넓고 텅 빈 공간이다. 그것은 수평선이 보이는 무한의 풍경이 아닌 공사장 가림막으로 막혀진, 그래서 텅 비어있는 어떤 공간이다. 가림막 너머에는 또 다른 풍경이 이어진다. 그 과정에 원근법은 없다. 그래서 풍경의 사실묘사라기 보다는 초현실적인 풍경에 가깝다. 텅 비어있는 공간 구석구석까지도 똑같은 균일한 호흡으로 묘사한 결과 작가가 생각한 쓸쓸함은 담담함으로 다가온다.

이 그림은 이채영 작가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 볼 때 보기 드물게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작품 제목은 ‘Truth’다. “… 이러한 도시의 풍경들 즉. 일상에 연관된 장소들, 나 또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거리들, 도시의 주택가와 낡은 건물 주변의 풍경들 사이 속에서 느껴지는 비정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아주 고독하기도 한 것들이 뒤섞여 있는 풍경들을 보여주고 싶었고, 주변의 풍경들 사이 속에서 다른 시간과 공간이 가동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작가 노트 중에서) 그가 말한 것처럼 인물의 뒷모습은 궁금증을 자아낼 만큼 쓸쓸하다.

수묵산수라는 전통의 기법을 현대를 살고 있는 작가가 표현해 낼 때는 분명 옛것이 아닌 다른 모색이 필요할 것이다. 어떠한 준법이나 기법이나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때 보는 사람의 느낌도 공유되고 전해질 것이다. 이채영 작가는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작가의 진지함이 담겨있는 한 장의 풍경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겉의 화려함과 경치 좋은 풍광의 이면과 작가이기 때문에 느끼는 슬프고 고독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언어로 차분하게 전달함과 동시에 모든 감정을 녹아내어 버리게 하는 그런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임연숙 세종문화회관 전시디자인 팀장 curator@sejongpac.or.kr

[1445호 / 2018년 6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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