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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다비드와 사유상

기자명 주수완

역설적 표현으로 순간의 장면을 넘어 마음까지 담아낸 걸작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수많은 예술가들 모티브

도나텔로·베로키오 작품
골리앗 머리 밟은 표현은

거인 골리앗과 싸움에서
다윗의 극적인 승리 표현

미켈란젤로 다비드상은
목욕가는 듯 평온함 자체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선
정적 끝의 역동성 느껴져

(좌)미켈란젤로, 다비드, 1501~1504년, 높이 5.17m.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우)삼산관 반가사유상, 국보83호. 6세기후반, 높이 93.5㎝. 국립중앙박물관.

피렌체는 세계인의 로망인 관광지인 만큼 수많은 인파가 몰리기 때문에 자칫하면 줄서다 하루가 다 지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 특히 우피치 미술관, 아카데미아 미술관, 두오모 성당은 일단 무조건 아침에 일찍 가서 줄서야 다음 일정을 소화할 시간을 벌 수 있다. 만약 일정이 정확히 잡혀있기만 하다면 예약도 좋은 방법이다. 다만 배낭여행자들은 다음 목적지에 정확히 예상한 날에 도착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으므로 예약이 어려운 편이다.

지난 일정 중 가장 큰 기대와 흥분으로 기다렸던 장소는 미켈란젤로를 대표하는 작품, 다비드가 전시된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이었다. 개관 시간보다 한 시간 앞서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도착해 아직 열리지 않은 정문 앞에 맨 처음 줄을 섰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곳은 단체관람객이 들어가는 곳이고, 옆에 있는 좀 더 작은 문이 개별 관광객이 줄을 서는 곳이라 한다. 그곳으로 옮겨 여하간 맨 앞에서 기다린 끝에 드디어 문이 열렸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유명한 그 다윗을 묘사한 이 다비드상은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이지 않을까? 성서의 ‘사무엘 상’에 의하면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으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내세웠지만 결국 사울이 버림을 받자 새롭게 이새의 아들 다윗을 미래의 왕으로 축원했다. 어린 다윗의 입장에서는 매우 당황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겠지만, 성서 속에는 별다른 묘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담담하게 이를 받아들인 것 같다. 그리고 이윽고 전쟁터에 나간 형들에게 음식을 전해주기 위해 전선으로 나간 다윗은 마침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있던 키 290㎝ 가량의 거구에 번쩍이는 구리갑옷을 두른 골리앗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을 상대할만한 장수를 내보내라 고함치며 이스라엘을 모욕하던 골리앗을 보던 다윗은 자신이 골리앗을 상대하겠다며 자원하지만, 그의 형도, 사울왕도 만류할 정도로 그는 어렸다. 겨우 허락을 받아 전선에 나갔지만 골리앗도 그를 우습게보며 조롱했다. 그 끝에 얻은 승리였다.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표현은 이제 누가 보기에도 상대가 되지 않는 약체인 존재가 그보다 월등한 존재와 싸워 이기는 경우를 상징하는 표현이 되어 버렸다. “달걀로 바위치기”와 유사한 개념 같지만 가능성이 없는 경우를 말하므로 조금 뉘앙스가 다르다. 여하간 이 유명한 성서 이야기는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모티프가 되었고, 그만큼 많은 걸작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다른 예술가들이 묘사한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매우 특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보다 앞서 만들어진 도나텔로의 다비드를 보자. 이 작품 속에서 다비드는 한껏 앳된 소년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가 들고 있는 큰 칼은 마치 미성년자가 맥주라도 들고 있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다윗은 원래 칼을 들고 골리앗 앞에 나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막상 골리앗의 머리를 자를 때는 골리앗의 칼을 사용했는데, 그래서인지 유독 칼이 그에게 커 보인다. 그는 막 잘린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있는데, 그 큰 머리만으로도 골리앗이 얼마나 거대한 덩치의 인물이었는지 웅변한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달걀로 바위치기 같았던 싸움이었음을 다윗의 소년적 이미지와 골리앗의 거대함을 통해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도나텔로의 제자였던 베로키오의 청동 다비드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머리가 잘린 상태인데도 마치 마지막 한숨을 내쉬고 있는 듯한 골리앗의 얼굴에서 이 장면이 방금 전에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오게 한다는 특징이 부각된다.
 

(좌)도나텔로의 다비드, 1440년경. (우)베로키오의 다비드, 1473~1475년. 모두 피렌체 바르젤로 미술관 소장.

그런데 이에 비해 다시금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보자. 이 다비드는 앞서의 두 청동 다비드와 같은 극적 생생함이 없다. 칼을 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골리앗의 머리도 없다. 그의 손에는 성서에 나온대로 돌팔매질을 할 물매와 돌을 들고 편안히 서있는 모습일 뿐이다. 아마도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 그 거인 앞에 서있는 다윗을 표현한 것일 텐데, 자칫 그 모습은 마치 수건과 비누를 들고 목욕하러 가다 거울 앞에 선 사람의 모습처럼 편안하다. 왜 미켈란젤로는 골리앗과 싸우러 가는 다윗을 이렇게 긴장감 빠진 모습으로 묘사했을까? 너무 상황에 맞지 않는 표현 아닐까? 혹시 다윗의 이야기를 빌리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저 남자가 지닐 수 있는 완벽한 몸매를 표현한 것일까? 실제로 이 걸작은 처음부터 미켈란젤로가 의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누군가 만들다 포기한 거대한 대리석을 발견한 미켈란젤로가 인수하여 다비드라는 작품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때문에 이런 맥없는 자세는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석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켈란젤로 같은 거장이 이건 원래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발뺌을 할 것 같지는 않다. 다비드를 극찬했던 사람들에게 했다는 그가 남긴 유명한 말, “작품은 이미 돌 안에 있었고, 나는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냈을 뿐”이라는 표현은 지금의 “다비드”의 모습을 분명 그는 처음부터 예상하고 조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이었는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관운장이 청룡언월도를 쓰듯 다윗이 돌팔매질을 잘 했다는 사실이었을까? 그저 작은 고추가 맵다는 교훈이었을까? 아니면 다윗이 매우 용맹하고 영리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을까? 그러나 다윗이라는 인물이 성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사실상 그런 데에 있지 않다. 그는 유독 하나님 말씀에 잘 복종하고 누구보다 철저히 하나님을 믿었다. 사울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으로 지목받았을 때, 이미 그는 하나님이 결코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골리앗의 조롱에 그가 분노했던 이유는 오로지 하나,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골리앗과의 싸움이 하나님에 대한 모욕에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추호도 자신의 패배를 의심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긴장감 없이 표현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단 한 순간도 자신이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골리앗 앞에서 담대하고 여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미켈란젤로 이전의 다비드는 다비드가 골리앗을 이겼다는 행위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가 전해주고 싶었던 교훈은 결과로서의 다비드의 승리가 아니라 원인으로서 그의 100% 믿음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그 보이지 않는 믿음을 시각화한 셈이다. 거대한 적 앞에서도 여유롭게 서있는 모습으로써 말이다. 가장 긴장감이 넘쳐야할 순간을 이렇듯 가장 여유롭게-심지어 돌팔매질을 할 준비조차 하고 있지 않다- 표현하는 역설적인 방법은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보여준다. 무엇인가 보여주어야 할 부분을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방법으로 묘사하는 작가들은 뛰어난 작가들이다. 그러나 거장들은 오히려 반대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극적인 효과를 거둔다. 이것이 수작과 걸작의 차이가 아닐까.

그러나 단지 맥없이 표현해놓고 이것을 믿음이라고 우긴다면 그토록 공감을 얻을 수는 없었으리라. 긴장감 없는 다비드라고 했지만,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다른 다비드와 달리 앳된 소년이 아닌 건장한 청년이다. 또한 그의 눈빛은 결코 목욕탕 가는 눈빛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뚫어지게 상대(골리앗)를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는 곧 죽을 그 젊은 팔레스타인 용사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이 보일 정도다. 이미 다비드의 이 시선 속에서 싸움은 끝났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승리를 예상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이겼다. 완벽한 믿음의 승리다. 이토록 성서의 교훈을 완벽히 드러낸 작가가 또 있을까!

그런데 불교에는 이에 견줄만한 작가가 있다. 바로 국보83호 삼산관 반가사유상을 만든 이름 없는 예술가이다. 보통의 반가사유상은 사유하고 있는 모습 자체를 강조하느라 매우 정적인 형태를 취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삼산관 사유상은 늘어뜨린 다리 옆의 옷자락이 좌우 비대칭으로 흘러내려 유독 불안정한 구도를 보이며, 느슨한 자세를 통해 금방이라도 반가한 다리를 풀 것 같은 모습이다. 사유를 그만둘 것 같은 사유상이라니! 하지만 사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이 목적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사유는 끝난다. 삼산관 사유상을 만든 장인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묘사함으로써 사유의 종료를 선언하는 듯한 극적인 사유상을 만들어냈다. 자칫하면 산만하게 사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위험한 도전이었지만, 오른발의 무릎이 선명한 포물선을 그리며 솟구치는 듯한 긴장감을 통해 금방이라도 “유레카”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 같은 폭발력을 지닌 상으로 승화되었다. 사유의 과정이라는 기존의 틀을 깨고 깨달음의 순간이라는 극적 표현을 통해 사유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낸 것이었다.

자칫 작품 원래의 의도에서 벗어난 듯한 기법을 사용해 오히려 작품의 본질을 드러내는 이러한 표현이야말로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천재들의 기법이었다. 찬한다.

세상이여, 부디 기억해주시라
비록 무수한 사람이 다녀갔으나
2017년 4월 29일만은 이 사람이
다윗왕의 첫 번째 알현자였음을!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47호 / 2018년 7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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