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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하면 건강하고 생활도 즐거워집니다

중국 정곡 스님의 '무량수경청화' 법문 ⑦

명예와 이익에만 끌려 다닌다면
당신은 결코 깨닫지 못하게될 것

일체중생이 자비심 일으키려면
자비심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보살은 중생 고통받는 모습보고
자신도 고난받는다 생각하는 것

정공 스님은 “보살에게는 중생을 제도하고 중생의 짐을 지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정공 스님은 “보살에게는 중생을 제도하고 중생의 짐을 지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대비심을 일으키고 유정을 불쌍히 여겨서, 모범과 자비한 변재로 전수하여 법안을 뜨게 하며, 삼악도의 길을 막고 삼선도의 문을 열어준다(興大悲 愍有情 演慈辯 授法眼 杜惡趣 開善門).’

우리는 어디서부터 실천하여야 합니까? 무엇부터 시작하여야 합니까? 이 경문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그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모두 원칙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칙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원칙을 틀어쥐고 그것에 머물면 당신은 일상생활 속에서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분명코 진실한 공덕을 닦고 쌓을 것입니다.

대비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당신을 끌고 가는 힘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갖가지 직업에 종사하면서 왜 이렇게 고생해야 합니까?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면서 모든 노력을 다 쏟아 부어 일합니다. 당신을 끌고 가는 힘은 무엇입니까? 명예와 이익입니까? 명예와 이익에 끌려 다니면 당신은 윤회하는 업을 짓고, 결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이 경문을 읽고서 깨달았다면 당신을 끌고 가는 힘은 무엇입니까? 자비심과 애민심입니다. 일체중생은 미혹 전도되어 온갖 욕망과 감각세계에 빠져 있으므로 당신은 대자비심을 발하고 유정중생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이러한 자비심과 애민심은 반드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연(演)은 다른 사람에게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고, 변(辯)은 경전을 강설하고 설법하여 가르침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중생에게 의문이 있으면 옳고 그름을 또렷하게 일러주어 그가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수(授)는 전수(傳授)함이고, 법안(法眼)은 바로 깨달은 마음입니다. 이 눈은 육안이 아니라 심안입니다.

악취(惡趣)는 삼악도에서 떨어지는 업인을 말합니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 삼악도에 떨어지는 업을 짓지 못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육도윤회의 업을 지으면 과보를 받고 다시 윤회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문(善門)은 삼선도(三善道)에 태어나는 선한 문입니다. 그러나 삼계를 벗어나 정토에 왕생하는 법문이 진정한 선입니다. 다른 선은 삼선도에서 생을 받는 것으로 진정한 선이 아니고 여전히 윤회를 해야 합니다.

이 경문에서는 또한 정토종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방식을 이야기 합니다. 불법은 반드시 강당 위에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사람을 만날 때 가장 온당한 방법으로 불법을 소개하면 됩니다. 그가 불법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을 때 한마디 ‘나무아미타불’을 염하여 그가 천천히 불법을 알게 합니다. 이후 그가 당신이 한마디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모습을 보면 교학의 목적은 달성됩니다.

불법을 전하는 방법은 매우 많습니다. 예를 들면 불법을 배우는 사람은 마음이 유쾌하고 몸이 건강합니다. 이는 일반대중이 매우 바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건강하고 즐거워 보이면 그는 가르침을 청할 것입니다. “어떻게 생활하기에 이렇게 즐겁습니까?” “염불합니다. 염불하면 정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한차례 이치를 설명해 주면 그는 이를 듣고 기뻐합니다. 일상생활의 행복과 원만, 즐거움은 불교를 알리는 좋은 간판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면 불교에 마음이 쏠리고 부러워하여 배우고 싶어 할 것입니다.

어떻게 삼악도에 떨어집니까? 악업을 짓지 않으면 결코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삼악도의 길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악한 생각입니다. 악한 생각이 인(因)이 되어 악을 행하면 반드시 악한 과보가 있게 마련입니다. 악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우리의 생각이 청정하고 순정하면 절대 악한 과보가 있을 리 없습니다. 삼선도의 문을 여는 것은 사람에게 악을 그치고 선을 닦을 것을 권하는 것을 말합니다. 악을 그치고 선을 닦는 이득은 누구나 닦으면 누구나 얻습니다. 자신이 닦아 자신이 좋은 과보를 얻어서 다른 사람에게 삼선도의 문을 증명하여 줍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삼계를 벗어나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라고 말하면 두렵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서 큰 부자가 되고 큰 인물이 되라고 말하면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인간과 천상에 나는 작은 선의 문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삼계의 괴로움을 알아 비록 천상의 복보가 크고 수명이 길지라도 언젠가 죽는 날이 있어서 삼계를 벗어나길 희망한다면 그에게는 삼계를 벗어날 방법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이는 큰 선의 문입니다. 그러나 실재로 말해서 어떤 법이든 이번 일생에 성취하려면 오직 염불법문 뿐입니다. 이는 제가 불문에 들어와 40여 년간 체득한 경험입니다. 염불법문은 확실히 수승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정토법문이야말로 지극한 선의 문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보다 더 선한 것은 없습니다.

‘또한 모든 중생을 자신처럼 여겨서 제도하고 중생의 짐을 지고서 모두 열반의 피안에 이르게 하고, 빠짐없이 다 제불의 무량공덕과 거룩하고 밝은 지혜를 얻도록 하시니, 불가사의하다(於諸眾生 視若自己 拯濟負荷 皆度彼岸 悉獲諸佛無量功德, 智慧聖明, 不可思議).’

보살의 마음속 한가운데 중생은 자신과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중생이 고난을 받는 모습을 보면 자신이 고난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중생을 제도하고 중생의 짐을 지는 책임과 사명은 보살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보살의 본분으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모두 열반의 피안에 이르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지장경’의 말씀처럼 보살은 중생이 성불하지 못하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합니다. 보살에게는 반드시 중생을 도와 성불시키겠다는 위대한 홍원이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한 깨달음입니다.

그리하여 대보살은 일체중생 한 사람 한 사람 빠짐없이 다 부처님처럼 원만한 공덕을 얻을 수 있게 합니다. 설사 등각보살일지라도 복덕과 지혜는 여전히 부족하고 원만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원만한 불과를 증득해야 복덕과 지혜가 원만합니다. 대보살이 이와 같은 원만한 복덕과 지혜를 일체중생에게 빠짐없이 다 얻도록 하시니, 이는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허만항 번역가 mhdv@naver.com

[1447호 / 2018년 7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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