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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역 시위의 의도와 표현

기자명 백승권
  • 법보시론
  • 입력 2018.07.16 10:18
  • 수정 2018.07.16 10:20
  • 호수 1448
  • 댓글 0

글쓰기 강의를 전업으로 하다 보니 사람들의 글을 접하고 코멘트 할 일이 잦다. 나는 글쓰기를 코칭 할 때 어휘, 문장, 표현, 문법에 대해선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글을 써가며 차차 개선해야 할 문제이지, 그게 완벽해야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입장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글을 통해 자신이 전하고자 했던 의도를 제대로 표현했느냐의 문제다. 자신이 쓰고 싶은 내용을 제대로 썼는가를 살펴보는 일이 글쓰기 강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구성을 중시한다. 구성은 결국 쓰고 싶은 내용을 잘 선택해 독자의 공감과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배열하는 기술이다. 구성의 관점에서 사람들의 글을 바라보면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주장만 이야기하는 경우다. 자신의 주장과 그것의 정당성을 쉼 없이 얘기하지만 그것을 설득해내는 근거와 이유가 없다. 둘째, 주장과 함께 근거와 이유를 제시하지만 선뜻 공감하기 어려운 경우다. 근거와 이유가 글을 쓴 사람의 입장에 서 있다. 셋째, 근거와 이유로 주장이 자연스럽게 설득되는 경우다. 근거와 이유가 독자의 입장에 서 있다. 첫째를 소통의 유아기, 둘째를 청소년기, 셋째를 성년기에 비유하면 수강자들의 고개가 일제히 끄덕거려진다.

최근 혜화역 집회에서 오고 간 메시지의 논란이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어린 남자아이까지 ‘한남유충’으로 비유하며 남자에 대한 혐오와 거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남성연대’ 성재기 대표의 투신자살을 암시하는 ‘재기하라’라는 구호의 주어로 문재인 대통령을 등장시켰다. 이 시위는 ‘홍익대 누드모델 몰카(몰래카메라) 사건’에 대해 경찰이 성차별 편파 수사를 하고 있다는 일부 페미니스트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촉발됐다. ‘재기하라’라는 구호가 나온 것은 문 대통령이 편파 수사가 아니라고 부인한 데 따른 것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 미투(#MeToo) 운동을 거치며 성차별 문제의 심각성은 우리 사회 저변에 빠른 속도로 공감을 얻고 있다. 페미니스트 입장에선 아직도 한참 모자라고 이제 겨우 빙산의 일각이 드러난 수준이겠지만 이 급류는 우리 사회를 건강한 방향으로 돌이킬 수 없이 변화시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급류 앞에서 세부적 사실로 본질의 의미를 폄훼하고, 거꾸로 성 차별적 발언의 도를 높여가는 것은 당랑거철에 불과하다.

이번 혜화역 시위는 우리 사회가 성차별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여러 갈래의 이슈가 가능하겠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의도’와 ‘표현’의 부분이다. 앞서 말한 세 개의 유형을 여기에 대입하면 첫째는 ‘의도’만 있고, 둘째는 ‘의도’와 ‘표현’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고, 셋째는 ‘의도’를 설득하는 ‘표현’의 전략을 갖춘 것이다. 혜화역 시위는 첫째와 둘째에 걸쳐 있다고 판단된다.

외아들을 잃고 비탄에 빠진 키사 고타미가 붓다를 찾아와 외아들을 살려낼 수 있는 길을 물었을 때 붓다는 세 가지 유형의 답변을 할 수 있었다. 첫째,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단도직입 말하는 것이다. 둘째, 나의 어머니도 죽었고 이 동네에 당신처럼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고타미에게 겨자씨를 얻어오라고 했다. 단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도 잃은 적이 없는 집에서 말이다.

붓다는 의도의 정당성으로 표현의 전략을 상쇄시키지 않았다. 의도가 정당하기 때문에 표현은 더욱더 전략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백승권 글쓰기연구소 대표 daeyasan66@naver.com

[1448호 / 2018년 7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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