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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고대불교-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④

기자명 최병헌

백제, 불교 통해 국가관념 수립했던 고구려 신라와 다르게 성장

북방의 부여족 유이민 집단
한강 유역서 소국으로 출발

가장 먼저 국가체제를 정비
4세기 강대한 국가로 성장

체제정비 동시에 불교수용
고구려 신라와 확연한 차이

백제, 강한 국가로 성장한 후
한참 늦게 불교를 받아들여

왕실이 불교공인 주체 아닌
귀족이 불교수용 주체 차이

백제불교 130년 기록공백도
백제불교 제한적 위상 증표

서울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 3호분. 사적 제243호로 지정된 이 고분은 백제시대 초기 무덤으로 추정되며 백제가 가장 왕성했던 4세기경의 대외관계 혹은 삼국시대의 문화 연구에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서울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 3호분. 사적 제243호로 지정된 이 고분은 백제시대 초기 무덤으로 추정되며 백제가 가장 왕성했던 4세기경의 대외관계 혹은 삼국시대의 문화 연구에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백제는 A.D. 2세기 즈음 북방으로부터 남하한 부여족 계통의 유이민 집단의 하나로서 한강 유역에서 대두한 백제국(伯濟國)이 발전한 나라였다. 백제는 처음에 목지국(目支國)이 맹주가 되어 성립된 마한 50여 소국의 하나로 출발하였으나, 마한 지역을 점차로 병합하면서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갔다. 백제는 먼저 온조집단(溫祚集團)을 중심으로 인근지역에 정착한 같은 계통의 유이민 집단들인 비류집단(沸流集團)과 해루집단(解婁集團)을 통합하여 연맹체를 형성하고, 이어 선주민인 마한의 여러 소국세력들을 정복해 가는 방향을 취하였다.

3세기 중엽인 고이왕(古爾王, 234〜286) 때에 이르러서는 동북방면에서 밀려오는 말갈족을 방어하면서 고대국가로서의 기반을 확립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의 압력을 배제하기 위하여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한군현의 압력은 이 지역의 정치세력의 성장에 큰 저해작용을 하였기 때문에 이의 배제는 자체 통일을 위해서도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고이왕 13년(246)년에는 대방태수 궁준(弓遵)을 전사케 할 정도로 강대한 결집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고이왕은 대외적으로 한군현과 상쟁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 국가체제의 정비를 활발히 추진하였다. 고이왕 27년(260)에 6좌평(佐平)을 두어 각기 직무를 분장케 하고, 16품의 관등을 설정하고, 또 등급에 따라 관복의 색깔을 정하였다. 그리고 29년(262)에는 관리로서 뇌물을 받은 자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는 3배를 바치게 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禁錮)에 처한다는 등의 관료조직의 정비와 연관된 조치들을 잇달아 내리었다. 6좌평제는 6전(六典) 조직을 방불케 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세련된 중앙관제의 성립은 곧 상당한 정도의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정비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뒤 4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중국대륙에서의 5호16국시대의 혼란기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낙랑군을 축출하게 되면서 백제도 크게 정복적 팽창을 추진하였다. 종래의 낙랑군과 대방군의 토착사회 지배망을 이용한 듯한 백제는 급속히 발전하여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 때에는 대외적으로 정복적인 팽창정책을 추진하여 24년(369) 즈음 남쪽으로 마한의 나머지 땅을 병합하였다. 그리고 북쪽으로 한군현의 잔여세력을 놓고 고구려와 투쟁하여 26년(371)에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쳐들어가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는 등 남진하는 고구려의 세력을 저지시키고 대방군의 대부분을 확보하여 비옥한 서반부를 통괄하였다. 이는 경제적인 자원과 함께 낙랑군과 대방군의 잔여 주민들을 흡수하여 그들의 지식과 기술을 확보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현재의 경기·충청·전라 3도의 전부와 강원·황해 양도의 일부까지를 점유하는 커다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은 서쪽으로 동진(東晋), 남쪽으로 왜(倭)와 통교하여 국제적인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근초고왕은 대외적인 정복적 팽창과 함께 대내적으로 왕권의 강화를 추진하여 부자상속(父子相續)에 의한 왕위계승을 정착시키고, 진씨(眞氏)를 왕비로 맞아 이른바 진씨왕비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를 연출하게 되었다. 또한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백제의 역사서인 ‘서기(書記)’를 편찬케 하여 강화된 왕권의 정통성과 정비된 국가의 면모를 과시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 근구수왕(近仇首王, 375〜384)을 거쳐 침류왕(枕流王) 원년(384)에 불교를 수용하여 고대국가의 새로운 관념체계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이상에서 백제에서 불교를 수용하게 될 때까지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을 좀 장황하게 서술하였는데, 고구려·신라의 그것과 비교할 때 국가의 발전과정과 불교공인의 순서가 뒤바뀐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고구려에서는 17대 소수림왕(371〜384) 때에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설치하는 등 국가체제의 정비와 동시에 불교의 공인을 통하여 새로운 초부족적인 국가관념체계의 수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체제의 정비와 관념체계의 수립을 기반으로 하여 이후 19대 광개토왕(391〜413)과 20대 장수왕(413〜492) 때에 대외적인 팽창을 정력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바야흐로 고구려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신라의 경우에도 시기적으로 고구려보다 150여년의 차이가 있지만, 23대 법흥왕(514〜540) 때에 율령을 반포하고 병부를 설치하는 등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의 강화를 위한 개혁정책의 추진과 함께 불교의 공인을 통한 초부족적인 국가관념체계의 수립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체제의 정비와 관념체계의 수립을 기반으로 하여 이후 24대 진흥왕(540〜576) 때에 정력적인 대외팽창을 추진하여 삼국 사이의 항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런데 백제의 경우에는 8대 고이왕(234〜286) 때부터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13대 근초고왕(346〜375) 때에 본격적인 대외팽창 정책을 추진하여 백제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그리고 15대 침류왕(384) 때에 와서 비로소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국가발전과 불교를 통한 국가관념의 수립이라는 발전의 순서가 뒤바뀌게 되었다. 26대 성왕(523〜554) 때에 백제의 중흥을 모색하게 될 때까지 130여년 사이의 불교 관련 기록의 공백은 이러한 불교사의 전개과정과 무관할 수 없다고 본다.

백제가 고구려·신라와 달리 불교 공인을 통한 초부족적인 국가관념의 수립이라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국가체제의 정비와 대외적인 팽창을 가능하게 하였던 원인은 유이민 집단의 일원이었다는 백제왕실의 성격과 함께 백제의 국가기반을 마련한 한강유역의 지정학적 조건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백제는 초기국가의 발전과정에서 고구려의 압력으로 축출되는 낙랑군과 대방군의 잔여 유민의 일부를 흡수하면서 재래 낙랑군과 대방군이 추구했던 한강 이남 지역의 토착사회에 대한 지배방식을 답습하여 팽창정책으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백제의 지배체제 정비과정과 팽창정책의 추진에서 일시적으로 지배망을 구축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으나, 삼국 간의 항쟁과정에서 한계점을 노출하게 되어 토착적인 기반을 가지고 착실하게 성장해온 신라에게 결국 패망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고구려·백제·신라 3국은 불교 수용에 선후의 차이가 있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 전진(前秦)에서 순도(順道)가 와서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고, 백제는 그보다 12년 뒤인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東晋)으로부터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와서 불교를 전하였다. 두 나라는 각기 우호관계에 있던 북조의 전진과 남조의 동진으로부터 국가적인 사절을 매개로 하여 불교를 전래하였다. 한편 신라는 처음에는 고구려로부터 사적인 전도를 통해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박해 속에 끝나고 말았으며, 양(梁)의 사신인 승려 원표(元表)에 의해 왕실에 알려진 것을 계기로 하여 법흥왕 14년(527)에 비로소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세 나라의 불교 수용을 주도한 것은 왕실이었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불교내용과 사회적 성격은 상당히 달랐다. 고구려는 북조불교의 왕즉불사상을 주로 받아들임으로써 국가불교·왕실불교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졌던데 비하여 백제는 남조불교의 청담이나 현학적인 귀족불교를 주로 받아들여 상대적으로 국가불교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신라는 처음에는 고구려를 통해 불교가 전래되었고, 뒤에는 남조불교를 받아들이면서 공인되기에 이르렀으나, 수용과정에서 귀족세력과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국가불교·왕실불교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런데 백제불교가 귀족적인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 원인은 단지 남조불교를 받아들였다는 점에만 있지 않았다.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은 백제 지배세력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백제의 지배세력은 왕족인 부여씨(扶餘氏) 이외에 유력한 가문으로서 사(沙)·연(燕)·협(劦)·해(解)·진(眞)·국(國)·목(木)·백(苩) 등 8성(姓)이 있었다고 하며 이들 가운데 전기에는 특히 진씨와 해씨가 왕비와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다시피 하였고, 후기에는 연씨·백씨·사씨가 새로 대두하여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재상을 투표에 의하여 선거한 것으로 해석되는 정사암회의(政事巖會議) 같은 제도는 귀족연합적인 정치운영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물론 고구려에서도 수상인 대대로(大對盧)의 임명이 귀족들의 선출에 의하였고, 신라에서는 상대등(上大等)을 의장으로 하는 화백회의(和白會議)가 있어서 각각 부족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는 왕실인 부여씨가 유이민 집단의 하나로 한강 유역에서 대두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와 신라 왕실보다 상대적으로 토착적인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으며, 국왕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빈번히 일어났다. 결국 백제에서는 불교 수용의 주체가 왕실일 수만은 없게 되었으며, 귀족들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백제불교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처음 불교를 전해온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백제에 들어온 것은 침류왕 원년(384) 9월이었고, 다음해 2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열 사람을 득도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다. 처음 전래된 지 5개월 만에 사찰을 짓고, 10인의 승려를 득도시켰다는 사실은 불교가 순탄하게 수용되고 있었던 상황을 나타내준다. 그런데 그 이후 불교관련 사실이 26대 성왕(聖王, 523〜554) 때까지 130여년 동안 일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오늘날 백제불교사는 사실상 백제의 중흥기라고 할 수 있는 성왕대부터 서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17대 아신왕(阿莘王) 즉위년(392) 2월에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라는 명을 내렸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으나, 아신왕이 실제 즉위한 것은 그해 11월이었기 때문에 사실과 맞지 않게 되었다. 더욱이 ‘삼국사기’에서는 같은 해인 고국양왕 9년 3월에 고구려에서 똑 같은 내용의 왕명을 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위의 ‘삼국유사’ 기록은 고구려의 사실에 대한 착오로 보인다.

백제불교 전개과정에서의 130여년의 기록 공백은 백제사에 대한 사료 인멸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으나, 고구려와 신라의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의 불교의 역할과 비교할 때 왕권의 강화와 국가의 발전과정에서의 백제불교의 제한적인 역할과 위상의 일단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49호 / 2018년 7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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