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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미완성 피에타와 마투라의 여신상

기자명 주수완

곧 무너질 것 같이 축 늘어진 묘사로 슬픔과 충격 극대화

미켈란젤로 피에타 3점 제작
세밀한 근육서 추상으로 진화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 외에
나머지는 미완성으로 남아

처절해 보이는 모습을 통해
희망 보게 하는 절묘한 모순

인도 ‘술 취한 여신상’ 모습
피에타 반디니 예수와 비슷

출가한 남편 때문에 실신한
야소다라 절망 절절히 담아

피렌체 두오모 박물관의 미켈란젤로 작 피에타 반디니(왼쪽)와 인도 뉴델리 박물관의 2세기 마투라 시대 조각상 ‘쓰러진 여인을 부축하는 사람들’(오른쪽)
피렌체 두오모 박물관의 미켈란젤로 작 피에타 반디니(왼쪽)와 인도 뉴델리 박물관의 2세기 마투라 시대 조각상 ‘쓰러진 여인을 부축하는 사람들’(오른쪽)

‘르네상스 미술가 열전’을 저술한 바자리의 기록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3점의 피에타를 제작했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로마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 피에타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 중 하나는 피렌체 두오모 성당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피에타 반디니(Pieta Bandini)로 불리는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밀라노에 있는 피에타 론다니니(Pieta Rondanini)이다. 특이한 것은 미켈란젤로가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를 완성한 것은 1499년이었고, 피에타 반디니는 1546년경부터 작업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의 나이 이미 70세가 넘어가고 있던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원래 이 작품은 자신의 무덤 위 제단을 장식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을 위한 조각이었다니 뭔가 특별한 의미가 더 담겼을 것 같다. 그럼에도 워낙에 많은 주문을 받았던 미켈란젤로였기에 틈나는 대로 이 작업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어지길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돌연 성모 마리아의 팔꿈치 부분을 부숴버리고 말았다. 이후 그는 포기한 미완성의 피에타를 사환이었던 안토니오에게 주었고, 이를 탐냈던 조각가 티베리오 칼가니(Tiberio Calcagni)가 프란체스코 반디니(Francesco Bandini)의 주선으로 안토니오에게 200크라운을 주고 넘겨받았다. 미켈란젤로는 티베리오에게 원형을 참작하여 작품을 손질해도 된다고 허락했지만, 티베리오가 머지 않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마 거의 원래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추정되는 가운데 다시금 피에타는 프란체스코 반디니의 아들 피에르 안토니오 반디니의 정원으로 옮겨오면서 ‘피에타 반디니’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바티칸의 피에타와 다르게 여기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고 이를 예수의 왼쪽에서 부축하는 여인은 성모 마리아이고, 오른쪽에 추가된 조금 작게 묘사된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이다. 더불어 예수의 뒤에서 듬직하게 예수의 몸을 받치고 있는 큰 인물은 예수의 장례에 참여한 니코데모이다. 흔히 이 장면에 등장하는 남자는 둘인데, 또 한 사람은 아리마대의 요셉이지만, 바자리의 기록에는 이 인물이 니코데모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니코데모는 미켈란젤로 자신의 자화상으로 표현되었다. 아마도 그의 깊은 신심을 반영한 것인 듯하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미켈란젤로 작 ‘피에타 팔레스트리나’

이 피에타 속 예수는 바티칸의 피에타 속 예수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바티칸의 예수가 어느 정도는 편안하게 열반에 드신 것처럼, 그래서 금방이라도 부활할 것을 암시하듯이 표현되었다면, 반디니의 피에타 속 예수는 우리에게 중력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가끔 드라마에서 보면 술 먹고 정신을 잃은 역할을 하는 배우를 보게 되는데, 아무래도 온몸에 힘이 풀린 것을 단지 연기로 재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보니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말로 술에 취에 정신을 잃은 사람을 보면(주변에 종종 있다) 그야말로 완전히 몸이 축 늘어지고 몸무게는 정신이 멀쩡할 때보다 몇 배로 무겁다. 이 피에타 속 예수는 정말 그렇다. 온 몸에 힘이 완전히 빠져나갔을 때 그야말로 완벽하게 축 처진 몸을 이렇게 처절하게 실감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싶다. 저렇게 섬세한 근육이 이렇게 힘없는 몸을 드러낼 수도 있구나 깨닫게 된다. 그래서일까, 다른 작가들의 피에타, 혹은 예수의 장례를 다룬 작품들이 한편의 비극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라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어쩌면 바티칸의 피에타와 달리 니코데모가 추가로 등장한 것은 완전히 늘어진 무거운 몸이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는 시각적 장치가 아닐까 생각된다.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만으로 이 늘어진 시신을 부축하고 있다면 그 무게가 실감나지 않았을 것 같다. 언뜻 하나님이신 성부처럼도 보이는 니코데모가 받쳐주고 있기에 간신히 몸을 세우고 있는 것이 절실히 느껴진다.

미켈란젤로는 왜 이러한 구도를 택했을까? 바티칸의 피에타가 스스로 부활하는 신성화된 예수를 표현한 것이라면, 혹 이 반디니의 피에타는 교회라고 하는 존재가 아무리 신성하더라도 평범한 사람들, 신도들이 아니면 결코 서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편으로는 십자가에서 예수의 몸을 내리고 있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예수를 둘러싼 인물들에 의해 예수가 세워지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예수의 부활은 믿음을 지니고 그 죽음을 지켜보았던 열렬한 신도들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완벽하게 맥없이 늘어진 몸, 그래서 더욱 처절해 보이는 죽음임에도 마치 이들에 의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보게 하는 이 절묘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그런데 지난번 소개한 아카데미아 미술관에는 미켈란젤로의 걸작 다비드 외에도 그의 여러 점의 미완성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데, 거기에도 피에타가 있다. 이는 보통 ‘피에나 팔레스트리나(Pieta Palestrina)’라 부르는데, 메디치의 ‘팔레스트리나’라는 주택에서 발견된 것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진작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그의 또 다른 미완성 피에타로 보고 있다. 반디니의 피에타와 비교해서 아마도 그 작품을 포기한 직후 새롭게 시작한 작품이 아닐까 추정된다.

반디니 피에타와의 차이점은 자화상에 가까웠던 니코데모 성인을 없애고 그 자리에 직접 성모 마리아를 위치시킨 것이다. 축 늘어진 무겁디무거운 예수의 몸은 여기서 더욱 강조되어 있다. 니코데모라는 인물까지 등장시키려던 것이 너무 번잡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런데 표현상 이 작품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새로운 변화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롭고 중요하다. 이것은 조각이지만, 조각에도 일종의 원근법이란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바티칸과 반디니의 피에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 인물들이 눈앞에 서있는 것처럼 깊이 있는 공간이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팔레스트리나 피에타에서는 예수, 성모, 막달라 마리아가 마치 원근이 축약된, 압축된 공간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앞의 두 작품이 50mm 표준 렌즈로 찍은 사진 같다면, 후자는 망원렌즈로 멀리서 포착한 장면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순수하게 조형적으로 고도의 집중력을 느끼게 된다. 세 인물의 머리가 일부러 삼각형의 구도로 나란히 떠있는 것처럼 보이게 추상적으로 의도했다고도 생각된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무거운 중력과 함께 동시에 마치 또 한편으로는 공중에 떠있는 것 같은 두 힘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켈란젤로의 첫 번째 피에타인 바티칸상에 비해 두 번째, 세 번째 피에타의 성모는 예수의 얼굴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 있어 그 비중이 더 커졌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미완성이지만 여기에 무엇을 더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과정마저 아름다운 것이 천재일까.

이렇게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서서히 등장하는 추상성은 그의 말년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특히 나중에 정식으로 소개할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피에타인 ‘론다니니의 피에타’로 넘어가는 중간단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불교미술 속에서 마치 반디니의 피에타를 연상시키는 작품을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롭다. 흔히 ‘술 취한 여신상’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인도 뉴델리 박물관 소장의 마투라 시기(기원후 2세기경) 조각이다. 중앙에는 힘없이 쓰러진 여인이 보이고, 그 옆에서 두 인물이 부축하는 듯 보이며, 다시 그 뒤에는 니코데모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 관람자를 바라보며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다. 마치 이 상황을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듯한 인물이다. 물론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나타나는 그 단단하던 근육이 완전히 힘이 빠졌을 때의 정교한 묘사 같은 것은 보기 어렵다. 그러나 점차 추상화되어 가는 그의 조각양식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혹 미켈란젤로도 이와 같이 바짝 마른 핵심만 남은 작품을 꿈꾸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여하간 이 마투라 조각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필자는 이것이 남편인 석가모니가 출가를 하고, 기어이 돌아오지 않겠다는 소식을 전해오자 그만 실신해 버린 부인 아쇼다라를 묘사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조각 뒷면에는 마치 출가를 결심하는 듯한 석가모니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여인을 부축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인간의 모습을 한 천신들일 수 있다. 석가모니가 출가하면서 받게 될 부인의 충격을 보듬어주기 위한 천신들의 배려라고 할까. 그래서 힘없이 늘어진 몸을 부축하면서도 그녀의 남편의 출가가 인류에게 가져올 그 엄청난 일을 상기시키며 위로하려는 듯이 보인다.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이는 마치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도 염려 마시라, 이 슬픈 부인도 결국 석가모니의 제자로 출가하여 평화를 얻게 될 운명이었던 것이었다.”

당장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지만, 예정된, 그리고 극복되어야만 하는 슬픔이라는 이 무지막지한 주제가 이들 작품 속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 있다. 거기다 기독교와 불교가 놀랍도록 유사한 구도로 이를 표현했다는 것이 신비롭기만 하다. 아, 저 예수의 무게를 그의 어머니가 아니라면 정녕 누가 감당할 것인가! 아쇼다라의 저 충격은 부처님을 대신한 천신의 위로가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감당되었을 것인가!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49호 / 2018년 7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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