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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사선(無事禪)과 서양의 선불교-하

기자명 장은화

대중적 언어로 현대문화서 일상화 된 ‘선'

서양서 ‘선' 미니멀리즘 상징
대중문화 범위의 깊이는 낮아

한국 화두선, 전통 보존한다며
현대사회 요구 부응하지 못해
지속 가능성 시험대 오른 느낌

1950년대 앨런 와츠(1915~1973) 등에 의해 대중화된 선은 자유분방한 미국 선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줬다.
1950년대 앨런 와츠(1915~1973) 등에 의해 대중화된 선은 자유분방한 미국 선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줬다.

오늘날의 서양선은 어떠할까? 1960년대 이래로 서양인들은 아시아의 선사들이 도래하면서 비로소 아시아의 전통선에 엄격한 선 수행 문화가 존재함을 알게 되었고 또한 초기의 비트선이 방종한 무사선이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오늘날 서양선은 서양문화와 습합하면서 토착문화 특히 서양 민주주의, 사회참여, 페미니즘, 심리학 등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선이 불교라는 종교와 무관하게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수많은 사례는 ‘선과 윈드서핑’ ‘선과 국제관계’ ‘바보천치의 선 생활 가이드’ 등의 책 제목에서 ‘선과 초콜릿 만들기의 기술’ ‘선과 설거지의 기술’ ‘주방수납의 선’ 등의 마케팅 분야에서 “You look so Zen today” 같은 일상 언어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바야흐로 선이란 말은 현대문화에서 일상어가 되어 있다.

서양의 대중적인 선은 명상, 자유, 자연스러움, 세상과의 합일 등을 상징하기도 하고, 인테리어 잡지 등에서는 미니멀리즘의 공간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신선함, 고요함, 맑은 정신, 집중의 원천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선에 대한 이런 개념들은 사실적인 요소를 간직하고 있지만 이처럼 대중문화에서 그 범위는 매우 넓으면서도 그 깊이는 낮다. 서양에서 대중적인 선의 개념은 더 이상 아시아의 특정한 불교전통을 가리키지 않고 주로 명상으로서,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으로서, 자아로 향하는 여행으로서, 혹은 철학으로서 소개되고 있으며 또한 보다 더 일반적인 생활의 한 방식이 되었다.

이러한 대중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선의 개념에는 전통선의 정교한 사유체계가 그다지 중시되지 않는 듯하다. 물론 이러한 사고의 이면에는 선불교의 사유체계가 본질적으로 아시아 종교문화의 산물로서 여기에서 종교적인 맥락을 떼어내고 그 대신 선의 통찰은 수용하여 현대생활에 맞게 활용하는 절충적인 양상이 드러난다. 현대생활에서 이와 같은 탈전통의 추세와 선에 대한 학문적, 실용적 담론은 무한하게 확대재생산 되면서 실제 수행의 문제는 점차 주변부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선의 이념적 사유체계는 정교해지고 수행의 영역은 상대적으로 정체성이 약화되어 간다.

정통에서 벗어난 사이비 선불교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비트세대의 무사선은 에고이즘을 깨달음으로 착각하는 일종의 자기기만적 방종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본다면 고정관념과 인습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비트세대의 노력은 이후 60~70년대의 히피 반문화세대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서양불교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전통이 되어왔다. 또한 비트세대가 종교적 속박이 없는 신비적 체험을 강조하면서도 자유로운 형식의 영성을 표출했던 것은 그들이 선불교에서 당시 암울했던 시대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선은 그들의 예술에서 상당한 창의성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런데 선을 자처하고 나서는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은 서양인의 개인주의 성향과 매우 잘 어울린다. 또한 이러한 경향은 선에 관한 대중적 출판물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데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미국을 비롯한 서양사회가 아시아의 선불교 전통을 자신들의 문화에 맞게 선별적이고 절충적으로 수용하여 새롭고도 강력한 그들만의 전통으로 정착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탈전통적이고 명상이라는 이름으로 단순화되고 대중의 구미에 맞게 재포장된 서양의 선불교가 이제 아시아로 회귀하면서 전통선과 병존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고 우리 사회에 점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물론 그것이 여러 시대를 지속해나갈 전통으로 정착하기에는 아직 그 정체성이 희박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불교가 형성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시점에서 서양불교의 지도자 골드스타인이 자신의 저서 ‘하나의 다르마(One Dharma)’에서 주창하는 말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는 서양의 실용주의를 불교적 실용주의와 연결시킨다. 여기서 불교적 실용주의는 불교의 방법과 가르침이 ‘방편’이며, 또 종파적인 관점들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전통적 개념으로 표현된다. 이 두 개의 실용주의적 전통을 결합하면서 골드스타인은 주장하기를 “우리는 우리 시대를 위한 하나의 방편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의 다르마”이다. 그는 이 하나의 다르마가 진정한 서양불교의 형태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놀라운 시대에 살고 있다. 진정한 서양불교가 이제 태어나고 있다. 그것을 규정하는 특징은 정교한 철학적 체계도 아니고, 특정한 종파적 관점에 대한 집착도 아니다. 그보다도 그것은 고대 인도의 사상에 날카롭게 의문을 제기했던 붓다의 말씀에 다시 귀 기울이는 소박한 실용주의다.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즉, 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소박한 의문에 충실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실용적인 질문을 바탕으로 골드스타인은 교리, 제도적 형식 혹은 사유체계보다는 그가 불교수행의 방법이자 결과라고 여기는 특징들을 강조한다. 즉, 서양불교에서 부상하고 있는 하나의 다르마에서 “그 방법은 마음챙김(mindfulness)이고, 그 표현은 자비이며, 그 본질은 지혜”라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800여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화두선은 오늘날까지 전통선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있다고는 하나 현대에 들어 그 지속가능성은 시험대에 오른 느낌이다. 현대 한국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초래된 일은 아닐까? 짝퉁선, 사이비선, 허세선이라고 불리던 서양의 무사선은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평가가 나오고 있으며 그 평가의 기준은 더 이상 아시아의 전통선이 아니다. 서양인에게 중요한 것은 저변에 흐르는 선의 정신이지 정통이나 사이비 논쟁이 아닌 듯하다. 고매한 깨달음이 아닌 실용과 실천을 지향하면서 어느덧 우리 곁에 다가와 있는 서양불교를 한국 선불교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고 있을까?

장은화 선학박사·전문번역가 ehj001@naver.com

[1450호 / 2018년 8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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