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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법성게’ 제3구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기자명 해주 스님

“일체 끊어진 곳 굳이 이름 붙인다면 불 속서 연꽃 피우는 것”

무분별상이란 상이 아닌 상
해인삼매의 물상과 똑 같아

바다에 온갖 물상들 보이나
건져보면 바닷물밖에 없어

해인의 바다는 부처님 마음
중생번뇌 비쳐도 오염 안돼

나의 몸이 곧 법신 자체이며
둘 없기에 내가 바로 자체불

법성이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고, 제법이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한 곳은 이름으로 지목할 수도 없고 모양으로 그려낼 수도 없다. 모든 것이 끊어졌다고 해서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일체가 끊어져(無名無相絶一切)”라고 한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름과 모양을 보지 않는 것이다. 미세한 티끌도 거대한 수미산도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 곧 오척에 계합하기 때문이다. 오직 오척법성이므로 무이상이라서 처음부터 모양도 이름도 없다.

이 일체가 끊어진 자리에 대해서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혹 이 경계를 이름 짓고 모양 그린다면 그것은 마치 불속에서 연꽃을 피우는 화중생련(火中生蓮)과 같다고 하겠다. 불이 모든 것을 다 태워도 허공은 태우지 못한다. 화중연(火中蓮)은 과분(果分)의 불가설 경계를 굳이 인분(因分)의 말을 빌어서 억지로 말해 보는 것이다.

“무명무상절일체”의 세계는 중생의 분별로는 이해할 수 없으니, 무분별세계로서 무분별을 상(相)으로 한다. 무분별상(無分別相)은 곧 상이 아닌 상인 것이다. 마치 해인삼매의 물상과 같다. 바다에 비친 온갖 물상이 실제로는 물상이 없다. 바닷물에 비쳐있는 물상을 건져보면 물상은 없고 바닷물뿐이다. 그래서 해인의 상(像)은 상이 아닌 상이다. 즉 바다에 물상이 비친 현상해인(現像海印)이 곧 상이 없는 망상해인(忘像海印)이고,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은 영불현해인(影不現海印)이다. 이러한 해인의 상이 무분별상인 것이다.

‘총수록’ 대기에서는 오중해인(五重海印)으로 ‘일승법계도’의 총 제목을 해석하고 있다. 오중해인이란 망상해인(忘像海印)·현상해인(現像海印)·불외향해인(不外向海印)·보현입정관해인(普賢入定觀海印)·어언해인(語言海印)이다.

이를 각각 일승법계·도·합시일인·54각·210자에 배대하였다. 그리고 어언해인인 210자를 다시 영불현해인(影不現海印)·영현해인(影現海印) 등의 오중해인으로 나누어 배대하고, 이 가운데 “능입해인삼매중” 등 4구를 또 다시 영리해인(影離海印)·영현해인 등 5중해인으로 배대하였다. 그리하여 세 번[三重]의 오중해인을 통해 일체를 망상해인으로 포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의상 스님은 법성을 궁극적으로 증득한 경계가 해인이라고 한다. 해인의 바다는 처음 바른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의 마음이니, 부처님의 정각 보리심바다이다. 중생의 온갖 번뇌가 다 비쳐도 더러워지지 않는 보리심바다이다. 하나의 해(海)자로써 삼세간에 도장을 찍어 셋이라는 분별을 여의고 합하여 하나가 된 부처님의 마음이 해인이다.(‘심륜초’) 이 해인의 바다는 해인의 거울로도 비유된다. 해인거울 가운데 나타나는 모습은 나의 오척되는 몸이 삼세간을 갖추어 달리 머무는 곳이 없다.(‘觀釋’)

이처럼 법성은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그릴 수도 없다. 말길이 끊어지고 마음길이 멸했으니, 일체 반연과 헤아림이 모두 허용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끊어졌다는 것은 닦고 증득함도 끊어졌다는 것이다. 증분에서는 실로 닦고 증득함도 없다. 그러나 성인도 닦고 증득하니, 닦고 증득함을 필요로 한다면 어떻게 닦고 증득하는가? 중생의 오척신이 곧 법신자체로서 자체불임을 어떻게 알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이에 ‘총수록’에 수록된 ‘대기’의 다음 말씀이 주목된다.

“표훈과 진정 등 10여 대덕이 의상화상이 계신 곳에서 이 ‘법계도인’을 배울 때 ‘움직이지 않는 나의 몸이 곧 법신 자체인 뜻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不動吾身 卽是法身自體之義 云何得見)’ 라고 여쭈었다. 이에 의상화상이 사구게(四句偈)로써 답하여 일러주셨다. ‘제연근본아(諸緣根本我) 일체법원심(一切法源心) 어언대요종(語言大要宗) 진실선지식(眞實善知識). 모든 연의 근본은 나이고, 일체법의 근원은 마음이며, 말은 매우 중요한 근본이니, 진실한 선지식이다.’ 이어서 이르시기를 ‘그대들은 마땅히 마음을 잘 써야 한다.(汝等當善用心耳)’라고 하셨다.”
 

처음부터 이름과 모양을 보지 않는 무명무상의 과분은 망정을 돌이켜보는 자리인 반정견처(反情見處)이다. 사진은 부석사 무량수전 아미타불. 부석사 제공
처음부터 이름과 모양을 보지 않는 무명무상의 과분은 망정을 돌이켜보는 자리인 반정견처(反情見處)이다. 사진은 부석사 무량수전 아미타불. 부석사 제공

의상화상이 표훈 스님과 진정 스님 등의 제자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움직이지 않는 나의 몸이 곧 법신 자체’인 뜻을 볼 수 있는 길을 4구게로 제시하면서 마땅히 마음을 잘 써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마음을 잘 쓰는 것[善用心]’을 증분의 실천도로 제시해준 것이다. 의상 스님이 마음을 잘 써야 한다고 당부하면서 보여준 이 4구게 법문은 자체불인 ‘나’의 마음을 잘 쓰도록 한 것이다. 연기 제법의 근원이고 근본인 것이 바로 오척신인 나의 몸과 마음이며, 나의 몸 또한 마음이다. 그 마음을 잘 써야한다는 것이다.

또 이 4구게로 자체불을 관하는 법에 대해서 ‘자체불관론’(‘自體佛觀論’ 의상계 저술로 간주됨) 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붙이고 있다.

“일체법원심(一切法源心)이란 자체불이다. 대요종(大要宗)’은 자체의 원만한 원인이며, 진실선지식(眞實善知識)은 자체의 원만한 결과이다. 세 뜻을 갖춘 까닭에 ‘나’이니 곧 자체불이다.”

‘나’는 자체불이며 마음이다. 그 자체의 원만한 원인과 결과는 말[語言]과 선지식이다. 이는 대법계의 인과방편을 빌어 말한 것이나, 그 말은 말하는 바가 없는 말이며, 진실이 바로 선지식이다. 큰 허공 안에 일체 법이 허공 아님이 없듯이 닦음과 닦지 않음도 마찬가지이고, 삼세간에 부동이라서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 또한 다르지 않다. 나의 마음은 움직이고 큰 허공은 움직이지 않으니,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여의는 것이 자체불의 증득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법을 기준으로 하면 닦음과 닦지 않음을 여의나, 처음 닦는 사람은 닦는 방편의 말이 필요하다. 그런데 마음을 가지고 몸을 찾으며 몸을 가지고 마음을 찾으니, 마음이 몸에 두루하고 몸이 마음에 두루한다. 서로 두루하기 때문에 방편의 말이 말하는 바가 없는 말이다. 또 법계의 모든 법은 나의 몸과 마음 아닌 것이 없으니, 모두 수순함이 선지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체불을 관함에 대하여 논(論)에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남은 의혹을 풀어주고 있다.

“그렇다면(닦음과 닦지 않음이 둘이 아니라면) 미혹과 깨달음이 다름이 없을 텐데 무엇을 부처라 하는가? 둘이 있기 때문에 중생이고 둘이 없기 때문에 곧 자체불이다. 이와 같이 관하면 바른 관이 된다.”

자체불은 지금 범부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부처이며, 지금 나를 교화하고 계시는 부처님은 바로 나의 미래불이다. 금일 오척범부신이 삼제에 칭합하여 부동인 것이 무주이며 법신자체인 그 도리를, 의상 스님은 이와 같이 4구게로 보여주면서 마땅히 마음을 잘 써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동오신인 법신 자체의 부처님 마음을 관하여 그 마음을 잘 쓰는 것이 자체불의 출현임을 알 수 있다. 자체불의 용심은 여래성기구덕심(如來性起具德心)을 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법의 성품이 일어남이 없이 그대로 일어난 법성성기이다. 법의 성품이 일어남이 없이 일어난 법성성기는 법성이 분별을 떠난 보리심가운데 나타나 있다. 이 도리를 ‘법계도주’에서는 일체 방편과 사량이 모두 허용되지 않아서, 말하고자 하나 말이 미치지 않으니 수풀 아래에서 잘 상량(商量)하라고 한다.

처음부터 이름과 모양을 보지 않는 무명무상의 과분은 망정을 돌이켜보는 자리인 반정견처(反情見處)이다. 반정이란 집착이 없음이다. 보고 듣는 등의 법을 따라서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법의 실성을 깨닫는 것이다. 법의 실성은 무주의 근본이고 무주는 무분별상이며 그것은 증득한 자의 경계인 것이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50호 / 2018년 8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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