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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시리마 ①

기자명 김규보

“네가 감히 내 남편을 유혹해?”

왕실의 총애로 고급유녀 되어
탐욕에 가득한 하루하루 보내
보름동안 아내 역할 해달라는
요청에 진짜 아내 된 듯 착각

낮은 시리마에게 항상 지루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한가로이 잠을 자거나 뜰을 산책해 보아도 지루함은 도무지 달래기 어려웠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과 활기찬 거리의 분위기 역시 따분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길고 긴 낮의 따분함은 어스름이 내릴 즈음부터 햇살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한다. 하늘을 물들인 노을처럼 빨갛게 화장을 하고, 취객의 술주정처럼 요란하게 몸을 치장하고 나면 시리마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떠오른다. 그녀는 왕사성에서 제일가는 유녀. 온갖 금은보화를 손에 쥐고 자신을 찾는 남자들을 바라볼 때마다 시리마는 짜릿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시리마는 왕실의 유녀 사라와티의 딸로 태어나 춤과 노래를 배우며 자랐다. 어머니가 왕의 총애를 받았기에 그녀 또한 나라 최고의 선생들을 사사하며 고급 유녀로 성장해갔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눈부신 외모에 더하여 마음을 녹이는 기예까지 갖춘 시리마는 성인이 되는 순간, 왕사성의 유명인이 되었다. 남자들은 저마다 금과 은, 보물을 손에 들고 그녀를 찾았다. 문 앞에서 절절매는 남자들을 보는 일은 늘 기분 좋고 만족스런 경험이었다. 시리마는 그들 가운데 외모가 빼어나거나 흡족한 물건을 가져온 이를 골라 방으로 들였다. 밤의 매순간은 언제나 그녀에게 황홀함을 선사해 주었다. 탐욕과 자아도취에 중독된 하루하루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하인이 서신 한 통을 전해 주었다. 기묘한 내용이었다. 황금 1만5000냥을 줄 테니 보름 동안 남편을 시중들어달라는 부탁이었다. 단순한 시중이 아니라, 실제 남편인 것처럼 정성껏 대해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흥미로운 제안이라고 생각하고 짐을 꾸려 서신에 적힌 집으로 향했다. 시리마에게 이 기묘한 부탁을 한 이는 ‘웃타라’라는 여인으로 왕사성의 내로라하는 거부의 아내였다. 그녀는 붓다의 설법을 듣고 싶었지만 다른 종교를 믿는 남편 때문에 외출조차 쉬이 못하는 상황이었다. 웃타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시리마를 남편에게 소개하며 말했다.

“여보. 앞으로 보름 동안 이 사람이 당신 곁을 지키게 해 주세요. 나는 그동안 붓다의 설법을 듣고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리려 합니다. 괜찮으신가요?”

평소라면 진노가 하늘을 찌를 듯했겠지만, 시리마의 아름다운 외모에 눈이 먼 남편은 대뜸 아내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웃타라가 미소를 가득 머금고 집을 나가자, 시리마는 비로소 어떤 연유에서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인지 알게 되었다. 많은 남자를 만나왔지만 누구도 남편처럼 대해본 적은 없었기에 처음엔 어색하기만 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흠뻑 빠져 온갖 정성을 다하는 남자의 모습에서 문득 자신이 아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으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져버렸다. 하룻밤 스쳐가는 사랑이 아닌, 안정적이고 온전한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은 시리마에게 생소하면서도 소중한 것이었다. 시리마는 이 집의 주인은 자신이라고, 이 남자의 아내는 자신이라고 되뇌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리마에게 진실이 되었다.

보름이 지나고 웃타라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더욱 밝아져 있었고 남편과 살갑게 인사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먼발치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리마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저 여자가 내 남편을 유혹하고 있구나.’

불같이 타오르는 질투심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시리마는 미친 사람처럼 집안 구석구석을 헤집다가 부엌으로 들어가 펄펄 끓는 기름을 들고 나와서는 웃타라에게 욕지거리를 하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웃타라는 차분하게 앉아 웃기만 할 뿐이었다.

“감히 내 남편을 유혹해? 하늘을 대신해 너에게 천벌을 내리겠다.”

시리마가 손을 크게 휘젓자 펄펄 끓는 기름이 웃타라의 얼굴에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김규보 법보신문 전문위원 dawn-to-dust@hanmail.net

[1451호 / 2018년 8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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