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폴론나루와 황금기 일군 파라크라마바후-하
12.폴론나루와 황금기 일군 파라크라마바후-하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8.08.13 18:10
  • 호수 14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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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 사원 세우리라” 대원력 이뤘지만 끝없는 전쟁·불사로 국력 약화

국왕 발원으로 조성된 석굴·석불
폴론나루와 예술 최고봉 손꼽혀
열반상 머리맡 수수께끼 입상
슬픔 잠긴 아난다라는 주장 유력
성도 후 중생 고통 측은히 여긴
석가모니불이라는 주장도 제기

분열됐던 승단 통일 주도한 국왕
1000명 스님 모아 삼장 결집 후
마하위하라 중심으로 승단 정비
당시 제정된 규약 ‘카티카와타’
현재까지 상좌부 승가청규 기준
폴론나루와 시대 싱할라 불교예술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갈비하라의 열반상과 입상. 아난다상으로 추정되는 입상은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 세계에서 찾아온 불자들의 예경이 끊이지 않는 갈비하라는 상좌부불교의 종주국임을 자부하는 스리랑카 불교의 상징이기도 하다.

“나는 나의 왕국에 100개의 사원을 세울 것이다. 100개의 사원이 완성되면 이곳 바위언덕에 세 분의 부처님을 조성할 것이다.”

폴론나루와의 전성기를 연 대왕 파라크라마바후 1세의 원력은 웅대했다. 수많은 전쟁과 내전의 한 복판에 서있는 왕이었다. 왕좌를 둘러싼 내분과 친족 간의 권력다툼 속에서 단 하루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긴장과 혼란 속에서 자신을 지켜줄 부처님의 가피와 왕권을 지탱해줄 정통성이었다. 그의 견고한 신심은 몸과 마음을 의탁할 안식처인 동시에 정당한 통치자라는 증명이었다.

간절하고 그만큼 굳건했던 파라크라마바후의 원력은 성취됐을까. 폴론나루와 북쪽, 작은 연못을 지나 한적한 숲길 끝에서 마주하는 야트막한 바위언덕 위 세 분의 부처님이 그 대답을 대신해 준다. 파라크라마바후가 남긴 폴론나루와 불교예술의 최고봉 갈비하라다.

폴론나루와 불교의 중심지였던 쿼드랭글 안에 남아 있는 석비에는 ‘불치사리 수호의 임무가 왕의 사병들에게 위임되어 있다’는 명문이 기록돼 있다. 이 비문은 타밀어로 쓰여있다. 폴론나루와시대 타밀용병들의 위상과 그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준다.

바위사원이라는 뜻의 갈비하라. 정식 명칭은 ‘웃타라라마’다. 북쪽의 사원이라는 뜻이다. 파라크라마바후의 원력을 전하고 있는 역사서 ‘출라왐사’에는 파라크라마바후가 명령했던 석불의 조성 형태도 기록돼 있다. 파라크라마바후는 바위동굴에서 정진하고 있는 부처님, 선정에 든 부처님, 그리고 고요히 열반에 든 부처님의 모습을 조성했다. 바로 이곳 갈비하라의 석불이다.

바위동굴에서 정진하고 부처님을 표현한 석굴은 마치 인도 아잔타석굴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입구에서부터 수평으로 바위를 뚫고 들어가며 석굴과 불상을 조성해 나갔다. 입구에는 기둥을, 내부는 다양한 문양을 새겨 넣었다. 2m 남짓 파고 들어가 좌대와 불상, 광배를 남겼다. 석굴을 개착하고 불상을 별도로 조성해 석굴 안에 봉안한 것이 아니다. 쌓아 올리고, 붙이고, 짜맞춘 것이 아니라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바위 전체를 깎아낸 것이다. 석굴을 조성한 장인은 마치 바위를 투시하듯 심안을 갖고 필요 없는 돌들을 도려냈다. 그리고 마침내 나툰 석불은 깊은 삼매에 든 듯 편안하고 고요하다. 좌대와 광배에는 연꽃과 사자문양이 정교하게 조각됐다. 마치 나무를 깎아 짜 맞추고 흙을 빚어 조성한 듯 정교하고 빈틈없다.

석굴 왼편에 위치한 높이 4.6m의 석불좌상 또한 감탄을 자아낸다. 당당한 어깨와 굳센 체구에는 전성기를 연 파라크라마바후의 자신감이 깃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살포시 눈을 감고 선정에 든 부처님의 얼굴에서는 간절했던 파라크라마바후의 신심이 읽힌다.

갈비하라의 맨 끝에 조성돼 있는 열반상 또한 못지않다.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오른쪽 팔을 괴고 누우신 부처님의 두 발가락 끝이 살짝 어긋나 있어 지금 막 열반에 드셨음을 말해준다. 반듯하게 내려뻗은 왼팔과 법체를 덮고 있는 가사자락의 정연한 주름은 흐트러짐 없는 열반의 세계, 그 숭고한 순간을 전하고 있다.

이 세 분의 석불은 파라크라마바후가 원력대로 100개의 사원을 조성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갈비하라에는 파라크라마바후가 조성했다는 세 분의 석불 외에도 입불상이 하나 더 있다. 이 수수께끼의 입상은 열반에 드신 부처님 머리맡에 서 있다.

두 팔을 모아 가슴을 끌어안고 질끈 눈을 감았다.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는 미간은 슬픔에 잠겼다. 열반에 든 부처님을 외면하듯 살짝 고개 돌려 바위에 몸을 기댔다. 오른쪽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있지만 이미 구부러진 왼쪽 다리. 바위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땅위에 쓰러질 듯 보인다.

이 입상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머리에 표현된 나발, 어깨에 닿을 듯 길게 늘어진 귀, 그리고 연꽃좌대 등으로 보아 분명 부처님상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표정과 자태로 보아 스승의 열반에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고 있는 아난다의 모습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지만 열반에 든 스승의 모습만은 차마 볼 수 없었던 아난다. 바위에 머리를 묻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보이는 깊은 슬픔 앞에서 이 입상의 주인공이 분명 아난다라 섣부른 판단을 해본다.

이 입상이 어느 시대 어떤 이유로 조성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파라크라마바후 시대 이후 추가되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부분의 의견이 일치한다. 최근에는 두 팔을 교차해 가슴을 끌어안고 있는 형태에 대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성도 직후 보드가야에 머무시는 동안 세상을 살펴보시며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일으킨 순간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어느 쪽도 아직은 확실하지 않지만 이 입상은 갈비하라를 더욱 묵직한 감동으로 각인시켜주고 있다.

웃타라라마가 바위사원 갈비하라로 불리게 된 것 또한 세 분의 석불 조성 이후다. 웃타라라마는 파라크라마바후의 ‘승단통일’이 결행된 역사적인 장소다. 분열과 경쟁, 계율의 혼란과 일부 스님들의 부패로 혼란에 빠진 스리랑카의 승단을 마하위하라파, 즉 대사파로 통일하며 상좌부불교의 전통을 확립한 국왕의 결단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웃타라라마에서는 1000명의 스님이 운집한 가운데 삼장의 결집이 단행됐다. 부주석서인 ‘아누티카’도 편찬됐다. 또 승단규약인 ‘카티카와타’를 제정해 스님들의 생활규범으로 삼았다. 카티카와타는 지금까지도 상좌부불교계 승단 청규의 기준이 되고 있다.

파라크라마바후는 자신의 이 모든 업적을 갈비하라의 암벽에 새겨 놓았다. 웃타라라마는 갈비하라로 이름이 바뀐 후에도 스님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으로 활용됐다. 아마도 갓 출가한 스님들에게 카티카와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철저히 익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파라크라마바후 1세가 조성한 불치사 와타다게.

파라크라마바후는 불치사리를 모실 불치사와 대탑 건립 등 여타의 불사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왕궁이나 접견실 등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건축물 못지않은 정성이었다. 아누라다푸라를 신성도시로 만든 보리수 스리마하보디와 불치사 이수루무니아가 있었다면 폴론나루와에는 불치사 ‘와타다게’가 있어 싱할라왕국의 명실상부한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와타다게는 위자야바후가 건설했던 불치사 ‘아타다게’ 맞은편에 세워졌다. 촐라왕국을 물리치고 수도를 옮기 후 불치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8일 만에 지어졌다’는 전설이 만들어질 정도로 서둘렀던 아타다게와 달리 파라크라마바후는 공들여 크고 화려한 불치사를 세웠다. 자신이 불치를 봉안한 왕국의 정당한 지배자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와타다게’는 둥글다는 뜻의 ‘와타’와 집을 뜻하는 ‘다게’가 합쳐진 이름이다. 말 그대로 ‘둥근집’이라는 뜻이다. 직경 18m의 원형 건축물 중앙에 사리를 모시고 네 방향에 불상을 봉안했다. 각각의 입구에서 들어와 4면의 부처님께 참배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사원의 천장은 나무지붕으로 덮었다. 전형적인 싱할라 건축 양식이다. 원형의 건축물 주변으로는 지붕을 받쳤던 기둥의 흔적이 남아있다.

기록에 따르면 파라크라마바후는 폴론나루와에 세 곳의 불치사를 세웠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둥근 구조의 석조사원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이곳 와타다게가 파라크라마바후 1세에 의해 건축된 불치사로 추정된다. 하지만 파라크라마바후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니상카말라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파라크라마바후가 세웠고 니상카말라가 보수해 오늘날의 형태를 만들었다는 절충안도 설득력을 갖는다.

파라크라마바후의 왕비 수바드라가 세운 사원 키리비하라.
스리랑카의 보석’이라 불리는 사원 랑카탈리카.

와타다게를 누가 지었는지에 관한 논쟁은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두더라도 파라크라마바후가 폴론나루와 곳곳에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 대규모 수행처였던 알라하나프리베나에는 식당, 병원, 공동목욕탕을 비롯해 다비장까지 완비돼 있었다. 높이 18m의 사원 랑카탈리카에는 높이 13m에 달하는 불상이 조성됐다. 스리랑카의 보물로 불리는 이 사원은 후대 타밀족의 침입으로 상당부분 파괴되고 불두도 사라졌다. 어깨까지만 남아있는 불상이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불상이었고 웅장한 건물이었는지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파라크라마바후의 왕비였던 수바드라가 세운 사원 키리비하라도 폴론나루와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손꼽힌다.

강력한 왕권과 견고한 신심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전쟁과 내전이 끊이지 않는 시대였다. 전쟁은 엄청난 자원과 물자를 집어삼켰다. 전쟁에 동원되는 용병들에게는 금화를 지불해야 했다. 그 와중에 100개의 사원을 짓는 등 수많은 불사를 강행했다. 파라크라마바후가 아무리 풍요로운 시대를 열었다 해도 재정 조달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국민들의 허리는 조여들기만 했다. 과도한 세금에 끊이지 않는 전쟁과 불사는 결국 국가재정을 악화시켰다. 33년간 싱할라왕국의 절대권력자였던 파라크라마바후가 세상을 떠난 후 또 다시 벌어진 왕권다툼과 분열, 그리고 니상카말라의 등극을 마지막으로 싱할라왕국이 쇠락의 길에 접어든 것은 파라크라마바후가 남긴 결과였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드리우는 법. ‘대왕 파라크라마바후’의 명암이 이곳 폴론나루와에 고여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51호 / 2018년 8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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