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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⑤

기자명 최병헌

성왕, 양무제의 ‘불교치국책’ 수용해 불교로 백제 중흥 추진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백제와 신라, 새로운 위기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개로왕 죽고 수도 한성 함락

고구려 피해 웅진 천도 뒤
왕들 잇따라 피살 혼란 가중

성왕 때 사비로 수도 천도
나라이름도 남부여로 개칭

양나라에 수시로 사신 보내
경전과 기술자들 받아들여

불교적 이상군주 지향하며
일본에 불교 전해 국력과시

성왕의 적극적 불교 수용
백제불교사 본격적 전개

정림사지5층석탑은 무왕 이후에 건립됐지만 성왕이 사비천도와 함께 창건한 본래 정림사에는 다층의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림사지5층석탑은 무왕 이후에 건립됐지만 성왕이 사비천도와 함께 창건한 본래 정림사에는 다층의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근초고왕대(346~375)에 대내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대외적으로 정복전쟁을 추진하여 전성기를 맞았다. 그리고 26년(371)에는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쳐들어가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고구려의 남쪽으로의 진출을 저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모용씨(慕容氏)의 전연(前燕)과 백제의 침입으로 한때 위기를 맞았던 고구려가 불교 공인,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의 개혁정책을 통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이어 활발한 대외팽창의 정책을 추진하게 되자 백제는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광개토왕(391~413)의 정복적인 팽창정책을 계승하여 장수왕 15년(427) 서울을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백제와 신라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이에 백제는 비유왕 7년(433)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나제동맹을 체결하고, 또한 중국의 남조왕조인 동진(東晋, 317~420)과 송(宋, 420~479), 그리고 왜(倭)에 사신을 연이어 보내어 화친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위협이 더욱 급박하게 된 개로왕(455~475) 때는 북조왕조인 북위(北魏, 386~534)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남침을 호소하고 군사를 요청하였다. 개로왕 18년(472) 북위에 보낸 표문과 북위에서 보내온 답서의 전문이 ‘삼국사기’에 전재되어 있는데, 특히 백제에서 보낸 표문은 고대부터 조선초기까지의 명문을 모은 ‘동문선’ 권41에도 ‘백제가 위주에게 고구려를 토벌하기를 청한 표(百濟上魏主請伐高句麗表)’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그 찬술자는 무명씨(無名氏)로 표기되었으나, 당시 백제인의 한문학의 높은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북위에서 보내온 답서와 비교하면 두 나라 사이에 한문학의 실력을 경쟁한 듯한 상황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백제의 16등급으로 나눠진 관등 가운데서 12등 문독(文督)과 13등 무독(武督)의 명칭을 보아 비록 하위직이지만 문관과 무관으로 구분되어 문독은 특히 외교문서 작성 등의 일을 맡았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추진하던 북위의 효문제가 고구려를 토벌해 달라는 백제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음으로써 백제는 이를 원망하여 관계를 끊고 말았다. 결국 개로왕 21년(475) 백제의 서울 한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백제는 서울을 남쪽 웅진(熊津)으로 옮기고 겨우 나라의 명맥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백제는 개로왕의 아들인 문주왕(475~477)에 의해 웅진으로 서울을 옮겨 명맥은 겨우 유지되었으나, 실로 다난한 시기에 처하였다. 백제는 원래 귀족세력이 강성하여 왕권이 제약을 받아왔는데, 문주왕은 즉위 2년 만에 병관좌평 해구(解丘)에게 시해 당했다. 그리고 해구는 문주왕을 이은 삼근왕 2년(478)에 대두성(大豆城)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격살되었고, 그 반란에 참가하였던 은솔 연신(燕信)은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문주왕의 조카로 왕위를 이은 동성왕(479~501)은 남제(南齊, 479~501)에 자주 사신을 보내고,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15년(493) 신라의 이찬 비지(比智)의 딸을 맞아들이는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백제 중흥을 위한 동성왕의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도 23년(501) 위사좌평 백가(苩加)에게 피살될 정도로 왕위는 여전히 불안하였다. 종래의 진씨(眞氏)와 해씨(解氏) 이외에 그 지방 출신의 연씨(燕氏)·백씨(苩氏)·사씨(沙氏) 등이 새로운 귀족세력으로 대두하여 경쟁하였다. 그런데 동성왕의 아들인 무령왕(501~523)은 우선 가림성(加林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킨 백가를 처형하여 왕권을 안정시키고, 이어 고구려의 남침을 견제하고 남조의 양(梁, 502~557)과 통교함으로써 백제는 점차 중흥의 기운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성왕(523~554)은 16년(538)에 사비(泗沘)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고 개칭하였다. 백제가 중흥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웅진 같은 산골짜기를 벗어나서 넓은 벌에 새로운 도읍을 경영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내적으로 천도와 아울러 22부의 중앙관서와 5부(部)·5방(方)·22담로(擔魯)의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대외적으로는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의 남침을 저지하는 한편, 남조왕조인 양과의 교류를 빈번히 하여 불교를 비롯한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왜와의 교류를 통하여 국제적인 위상을 높였다.

성왕이 추진한 백제의 중흥정책 가운데 특히 주력한 것은 불교의 발전과 이를 통한 국가의 정신적 토대를 굳게 하는 것이었다. ‘삼국사기’ 성왕조에서, “이름이 명농(明穠)이고 무령왕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에 결단성이 있었다. 무령왕이 돌아감에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성왕(聖王)’이라고 일컬었다”라고 평한 것을 보아 성왕은 불교를 치국의 요체로 삼아 당시의 사람들에게 불교의 이상적인 제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칭송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성왕은 사비로 천도하기 이전부터 이미 남조인 양과 교류하면서 양무제의 불교치국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성왕 5년(527) 웅진에 양무제를 위해 절을 세우고 대통사(大通寺)라고 하였다. 이해는 신라에서 흥륜사 창건의 문제로 이차돈이 순교를 당한 때인데, 그보다도 더 주목되는 것은 양무제가 그해 3월에 동태사(同泰寺)에서 사신(捨身)을 행했던 사건이다. 양무제는 이것을 시작으로 하여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사신을 행했다. 사신이란 ‘법화경’·‘열반경’·‘금광명경’ 등에 설해진 가르침으로 몸을 버려 부처를 공양하거나 중생에게 보살행을 베푸는 행위를 말하는데, 양무제가 행했던 것은 사찰의 노예가 되어 봉사하며 재물을 보시하는 것이었다. 양무제는 사신했다가 궁궐로 귀환하면서 막대한 재물을 보시함과 아울러 새로 연호를 반포하였는데 527년 첫 번째 사신 때는 대통(大通), 529년 두 번째 사신 때는 중대통(中大通)이라는 연호를 반포하였다. 성왕이 양무제가 첫 번째 사신한 해에 웅진에 새로 사찰을 창건하면서 사찰 이름을 대통사라고 이름하였다는 사실은 양의 불교, 나아가 양무제의 불교치국책을 받아들이려는 의지의 산물이었음을 나타내 준다. 최근 공주 대통사지 북쪽, 반죽동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다량의 수막새와 암키와·수키와, 지두문 암막새와 더불어 나한상의 두상으로 보이는 소조상의 파편이 소량 출토되었는데, 앞으로의 조사 결과에 따라 대통사의 구조와 성격이 좀 더 밝혀질 것이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수록된 ‘미륵불광사사적(彌勒佛光寺事蹟)’에 의하면, 대통사의 창건에 앞서 전해인 4년(526)에 겸익(謙益)이 인도에서 돌아와서 가져온 범본(梵本) 5부율(五部律)을 번역하고, 이어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이 이에 대한 율소(律疏) 36권을 저술하였으며, 성왕도 비담(毘曇)과 신율(新律)의 서문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사실도 우연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오늘날 ‘미륵불광사사적’이라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그 자료의 내용이나 성격을 전연 알 수 없고, 또한 그 자료 이외에 이 사실을 달리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의문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성왕 5년(527) 대통사의 창건 사실은 백제의 중흥과 함께 불교가 국가정신의 토대로써 새삼스럽게 주목받았음을 의미한다. 일찍이 침류왕 원년(384) 불교가 수용되고 다음해(385) 한산(漢山)에 사찰이 창건된 이후 실로 142년 만이었다. 그 동안 불교사 관계 사료가 전무한 것은 단순한 사료 인멸의 결과일 수도 있으나, 그러한 이유보다는 백제의 다난한 역사가 불교의 발전을 어렵게 한 것으로 보인다. 개로왕 때 고구려의 첩자로 승려 도림(道琳)이 백제에 침투하여 과도한 토목사업으로 백제의 국력을 소모케 하여 쉽게 패전케 하였다는 사실은 백제불교사의 이해에 시사하는 바 크다. 오늘날 남아 있는 자료에 의거하는 한 백제불교사의 본격적인 전개는 성왕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백제의 중흥정책은 성왕 16년(538) 사비로 천도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성왕은 12년(534) 양에 사신을 보내고, 이어 19년(541) 다시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동시에 모시박사(毛詩博士)와 ‘열반경’ 등의 주석서, 그리고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의 기술 공인을 요청하여 받아왔다. 성왕은 사비 천도 이후 도시를 정비하는 가운데 사찰을 왕궁과 함께 국가적인 상징적 건축물로서 중요시하였고, 이때 창건한 사찰이 왕궁 남쪽, 사비도성의 한 가운데 위치한 정림사(定林寺)였다. 따라서 양에 요청한 ‘열반경’ 등의 불경 주석서와 공장·화사 등의 기술 공인은 이 사찰의 건축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부여 정림사지의 사찰 이름은 고려시대 제작된 기와의 명문에서 유래하지만, 5~6세기 중국 남경 종산(鍾山)과 7세기 일본 아스카(飛鳥) 등의 지역에서도 각각 정림사라는 이름의 사찰이 있었던 사실을 보아 ‘선정지림(禪定之林)’에서 유래한 정림사의 명칭은 백제시대까지 소급시킬 수 있다고 본다. 정림사지는 1979~1980년 충남대학교박물관의 조사, 2008~2010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조사에 의해 사찰 구조와 다량의 소조상 등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조사된 유적과 유물을 종합해 볼 때 장육존상이 봉안된 금당과 탑내소조상으로 장엄된 다층의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로의 천도에 앞서 성왕 5년(527)에 웅진에 건립된 대통사에도 금당과 목탑, 그리고 탑내소조상이 건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현존 정림사지의 5층 석탑은 원래의 목탑이 어느 시기에 소실되고, 후대의 무왕 40년(639)년에 건축된 익산 미륵사지의 석탑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새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 양식을 그대로 석재로 표현한 것인데 비해 정림사지 석탑은 석탑의 새로운 양식으로 변형 발전시킨 것을 알 수 있다.

성왕은 23년(545)에 장육불상(丈六佛像)을 조성하여 천하의 모든 중생이 다 함께 해탈하기를 기원하였다. 이 사실을 전하는 ‘일본서기’ 긴메이기(欽明紀) 6년(545) 9월조의 기사 내용은 정림사에 봉안된 것과 같은 장육불상 조성의 공덕으로 제왕이 훌륭한 덕을 얻어 다스리는 나라가 다 같이 복과 도움을 얻고, 또한 천하의 일체중생이 모두 해탈하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성왕 자신이 불교적으로 이상적인 제왕, 곧 양무제가 추구했던 것과 같은 전륜성왕으로서의 권위를 높이려는 염원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성왕 16년(538), 또는 성왕 30년(552)에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사실도 불교적인 이상적 제왕으로서의 권위를 국제적으로 과시하려는 의도가 내포된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51호 / 2018년 8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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