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사, 안 할 거예요.”
새롭게 찾아온 인연에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말 뿐이었다. 뒤늦게 불교대학을 마친 시동생이 포교사 시험을 권하며 서울에서 자료를 보내왔다. 직장을 마치면 자료 들고 카페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했다.
삼법인, 제행무상을 배웠다. 삼라만상이 영원한 게 없으니 집착할 이유도 없었다. 더 가지려고 아등바등할 일이 아니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답게’ 살다 가는 게 중요했다. 포교사 품수를 받고 제일 먼저 남명 스님을 만났다. 함께 암 병동을 돌며, 불자들을 위로하고 염불기도를 올렸다. 시다림이 있는 날은 밤늦게까지 장례식장에 머물렀다. 어디를 가나 선지식들이었다. 호스피스 봉사에서 만난 암 병동 침상 위 환자들은 삶의 무상함을 설해줬고, 감투를 쓰려고 애쓰는 이들은 명예의 허무를 일깨워줬다.
아직 제주지역단에는 호스피스팀이 없다. 만들어 보겠노라고 다짐을 했지만 생각에만 머물러있다. 포교사 고시에 합격한 뒤 소년원에서 활동한 경험으로 교정교화팀에 자원했다. 매월 소년원 법당에서 법회를 했다. 10여명의 학생 중 한 명과 인연을 맺었다. 매주 멘토링을 시작했다.
소년원은 성인이 되지 않은 청소년들이 사회에서 크고 작은 문제들을 일으켜 들어오는 곳이다. 그래서 소년원이 아닌 ‘학교’(한길정보통신학교)라는 명칭을 쓴다. 멘토링을 한 학생은 만기 2개월을 앞두고 소란을 피웠다는 죄목(?)으로 1년 이상 형량을 받고 제주도로 이송 온 아이였다. 모습은 아이돌 가수 못지않은데 분노 조절이 힘든 아이였다. 대학 시절 상담학 상식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 아이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방송통신대 청소년교육과에 입학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심리학부터 다시 배웠다. 돌이켜보면 그 아이는 스승 역할을 한 셈이었다. ‘부처님, 그 아이가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해주세요. 그 아이가 부처님의 제자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제가 신심을 다하여 부처님 법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합장해본다.
전문포교사 과정 중 중간점검을 위한 연수교육때 일이다. 비구니스님이 사무량심을 설법해줬다. ‘인생을 살아오며 가장 기뻤던 시간은?’ ‘지금 내게 고통을 주는 걱정이 있다면?’ ‘살아오면서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특히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이라는 질문이 그랬다.
곁에서 30여년을 한결같이 함께 해준, 남편이다. 간섭받거나 얽매이는 게 싫어 신혼 초에는 불협화음이 잦았다. 그러던 중 남편은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에 갔고, 난 혼자 딸아이를 낳고 키워야 했다. 임신 중에도 항상 남편이 걱정됐다. 면회를 가지 않으면 양심수라 독방에 있던 남편이 한 발자국도 바깥에 나올 수 없다는 생각에 매일 면회를 갔다. 딸이 태어난 지 20일 만에 난 서울에서 대구법원으로 가서 남편의 최후진술을 들었다. 남편은 딸아이 생후 6개월 되던 해 출감했다. 이제 결혼 생활 33년이 돼 회갑을 맞이했지만 남편은 나와 다르게 한 번도 거친 말을 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여전히 내 든든한 지원자로 곁을 지켜주는 남편이다.
상담을 하거나 심리학 공부를 하다보면 자신을 위해 필요한 공부라는 생각이 든다. 매번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이제 포교사 2년차다. 참으로 미흡하다. 하지만 신심을 내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살아있음이 참 행복하다. 감사하다. 열심히 수행해 열반의 언덕에 이르러 ‘하화중생 상구보리’하며 다시는 윤회의 수레바퀴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namok7220@daum.net
[1452호 / 2018년 8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