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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옥천사 주지 백졸 스님

능엄주는 선악과 시비에 물들지 않는 깨어있음의 안테나

소원을 크게 확대시키면
불교에서 말하는 서원 돼

‘육조단경’은 능력 확장하는
인공위성과 다르지 않아

바른 깨달음 보리는 핸들
핸들 움직이는 것은 마음

마음만 제대로 쓰게 되면
핸들은 항상 바른길 향해

움직이지 않는 정진의 힘
‘능엄주’ 화두로 수행 가능

다른 마음 들어오지 않도록
오롯한 집중만이 번뇌 소멸

우리는 소원이 있습니다. 소원이 있는데 크게 확대하면 서원이 됩니다. 우리가 일생을 기준으로 소원을 확대시켜서 서원을 갖는 겁니다. 자신이 교사라면 우리 반 학생, 교장이라면 학교 전체 학생을 위하게 되고 지도자라면 포부가 커질 것입니다. ‘다 함께’라는 언어에는 확대되었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은 원이든 큰 원이든 투자하는 시간은 같습니다. 하루는 24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서 같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그 시간을 소원에 투자할 수도 있고 서원에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을 배움으로 인해서 시간도 변형하고 공간도 변형합니다. 과학과 의학이 발달되니까 시야가 넓어지고 지식도 넓어집니다. 시간의 개념, 공간의 개념도 넓어집니다. 이러한 시대에 나밖에 모르고 살아간다면, 좌충우돌이 발생합니다. 부처님께서 3천 년 전 하신 말씀이고 오늘날 과학이 그 말씀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연장해서 확대해 보는 법을 배우면 남보다 좀 더 실력이 늘어날 수 있는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흔히 말하는 소원성취는 정확한 판단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같은 눈이라도 2.0의 시력으로 보았을 때가 0.1보다는 정확하겠지요. 판단력에도 정확한 윤곽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판단력이 흐리면 아무리 공덕을 들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정확한 판단력의 과녁이 우리의 관념 속에서 어느 부분인지 윤곽이 잡혔다면 다음에는 시간적으로 얼마나 연장할 수 있는가 살펴야 합니다. 1분 연장할 수 있다면 1분, 2분 연장할 수 있다면 2분, 그렇게 3분을 세 번 하면 10분입니다. 10분 연장할 수 있습니까?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개념이 정립이 된 상태까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개념이 없는 노력은 활을 과녁 밖으로 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노력을 해도 결과가 없습니다. 그럼 정확한 판단력의 기준은 어디일까요? 참선이나 경전 공부와 같은 간경 등 여러 공부의 과정에서 포착해야 합니다. 포착한다 하더라도 딴생각이 들어오기 때문에 쉽게 없어집니다.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정진해야 합니다.

판단력을 흐리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사대(四大)라고 하면 물질적인 세계의 사대가 있고 정신적인 세계의 사대가 있습니다. 정신적인 세계에서 사대는 희로애락(喜怒哀樂)입니다. 희로애락은 다시 지수화풍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의심하는 마음은 흙이 되어 가로막고, 성내는 마음은 불이 되어 타고, 사랑하는 마음은 물이 되어 빠지며, 기뻐하는 마음은 바람이 되어 나부낀다. 사대가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 줄 통달하면 땅을 밟듯 물을 밟고 물을 밟듯 땅을 밟아 자유인이 됩니다.” 기뻐했지만 그때 뿐이고 흔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꿈과 같고 허깨비 같습니다.

분명히 있었는데 찾아보면 없습니다. 허깨비 같은 줄 통달하면 물과 땅이라는 고정관념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 능력은 본래 있었지만 우리가 쓸 줄 몰랐을 뿐입니다.

인간의 능력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과학만 믿을 수 있을 뿐 다른 것은 믿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은 과학 이전입니다.

‘육조단경’을 보면 나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나옵니다. 요즘 ‘육조단경’ 1000독 읽기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단경을 한 번 읽는데 25분 정도 걸립니다. ‘금강경’ 한 편 읽은 정도 됩니다. 1000독을 3년 동안 읽겠다는 원을 세워 보시길 바랍니다. 원을 세우면 원대로 실천하면 됩니다. 천일이 좀 넘어도 되고 천일 되기도 전에 완성할 수도 있습니다.

‘육조단경’의 내용은 주고받는 차원이 아닙니다. 10만원을 주면 10만원을 받는 거래의 법칙이 아니라 거래를 초월하는 법칙입니다. ‘육조단경’을 열심히 읽으면 인공위성을 갖게 됩니다. 인공위성에서 지구를 보는 차원은 거래를 떠난 자리, 360도를 다 보는 자리입니다. 유무를 떠나고 선악을 떠나고 거래를 떠난 차원, 우리에게 그런 안목이 생겨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유무, 선악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렇게 다 버리면 무엇이 남습니까? 나만 손해 보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아직 이런 생각 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유무, 선악, 시비를 다 버리면 공간적인 차원이 생깁니다. 선악이라고 해서 영원히 선악은 아닙니다. 악한 것이 선할 수도 있고 선한 것이 악한 것 일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표현의 한계를 경험합니다. 언어의 한계를 불교 용어에서도 ‘공(空)’이나 ‘무(無)’라고만 표현했습니다. 언어의 한계 때문에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없어서 무가 아니고 비어서 공이 아닙니다. 허공이 비었다고 하지만 에너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허공에 무엇인가 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도 유, 무를 떠났을 때에는 선, 악에 머물지 않는 차원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차원이 도대체 이해가 안갑니다. 아무것도 없으면 노력할 필요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의 한계를 가집니다. 주입식으로만 배워 왔기 때문입니다. 주입식을 떠난 자리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공, 무는 모든 가능성을 다 갖고 있는 세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한계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짐작도 못 하고 어안이 벙벙해지기도 하지만 부처님의 세계에 대해 보다 친숙해질 수 있습니다. 가능성에 대해서 두려움이 일어나기 전에 오기가 생깁니다. 나의 능력은 왜 이것을 초월하지 못하는가. 노력이 촉발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문도 듣고 교재도 봅니다. 처음에는 독송 25분도 싫은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억지로라도 해 보시길 바랍니다.

육조 스님께서는 일자무식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도를 깨치셨겠습니까? 우리는 배워야 깨친다는 착각을 갖고 있습니다. 육조 스님께서는 나무 장사이셨는데 그날 지게를 지고 일을 하다가 ‘금강경’ 한 구절 딱 듣고 깨치셨다고 합니다. 육조 스님은 읽을 줄은 모르지만 들을 줄은 아는 것입니다. 구태여 시험공부를 하지 않아도 직감으로 아는 차원이 있습니다.

어떤 사념이든지 유무, 선악에 속하지 않는 생각을 하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자세히 모를 때에는 운전을 할 때 내비게이션을 의지해서 가듯이 공부에도 내비게이션이 있어야 합니다. 제방 대덕 스님, 불교의 여러 매체를 통해 많이 보고 듣지만 오직 깨달음만을 집중적으로 향하는 교재가 있습니다. ‘육조단경’ ‘전심법요’ ‘선문정로’ 가 여기에 속합니다. 악한 사람도 성불할 수 있는, 오로지 깨달음에 대한 교재입니다.

그 ‘육조단경’ 중에서도 ‘무상송(無相頌)’이 있습니다. 이 시가 아주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디 가서 좋은 산책길을 가다가도 무상송을 외우면서 다니신다면 좋겠습니다. 제가 처음 이 게송을 봤을 때 첫 단락의 “해가 허공에 떠오름과 같나니” 이 구절을 읽을 때 아무 감각이 없었습니다. 이 구절이 와 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해가 허공에 떠오른다”를 비유하자면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불을 딱 켜면 밝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안다고 할 것도 없이 다 있는 것입니다. 찾을 것도 없습니다. 어두울 때는 무엇인가 찾으려고 하면 찾아도 있어도 나오지 않습니다. 불을 딱 켜면 찾을 것도 없습니다. 밝음과 어둠이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무상송의 네 번째 단락에서는 “바름이 오면 번뇌가 없어진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름은 유무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선악에 시비에 함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무에 빠지지 않고 선악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섯 번째 문단에 힌트가 있습니다. “보리는 본래 깨끗하나 마음 일으키는 것이 곧 망상이라. 깨끗한 성품이 망념 가운데 있나니 오직 바르기만 하면 세 가지 장애를 없애는도다” 눈으로 입으로 귀로 코로 촉감으로 느끼는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근본마음이 있습니다. 근본마음이 보리입니다. 운전을 할 때 핸들을 잡으면, 좌회전, 우회전, 직진을 하기 위해 핸들을 돌립니다. 그런데 좌회전하는 핸들 따로 있고 우회전하는 핸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근본적인 핸들 자체가 보리입니다. 좌회전, 우회전, 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누구든지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 본래 마음 그 자체는 깨끗합니다. 허공과 같고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분별이 없습니다. 그 한 마음에서 악도 짓고 선도 짓습니다. 깨끗한 성품과 악을 짓고 선을 짓는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깨끗한 마음도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그 마음속에 같이 있습니다. 핸들의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탐, 진, 치로 인해서 벌어지는 장애가 팔만 가지 아니 팔십만 가지에 달하지만 그런 장애도 생각이 바르기만 하면 소멸됩니다.

‘바르다’는 유무, 선악, 시비에 마음이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구름이 보입니다. 저 구름이 좋아서 안고 싶다고 해서 비행기를 멈추어야 할 일은 아닙니다. 유무, 시비에 관여하지 않으면 내 길을 가는 겁니다. 관여하지 않으려면 마음의 안테나가 있어야 합니다. 목표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 목표물로 능엄주가 좋습니다. 물론 방법은 다양합니다. 어떤 도량은 108배를 정하기도 하고, 다른 도량에서는 관세음보살을 부르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제가 권하는 방법은 능엄주를 화두로 열심히 정진하는 것입니다. 능엄주 3천자가 넘는 단어에 안테나를 세우는 것입니다. 왜 능엄주를 권하는가. 처음에 우리의 소원은 정확한 판단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목표는 생각이 착각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능엄주를 5분 만에 완료하는 사람은 5분 동안 능엄주를 틀리지 않고 완성하기 위해 착각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받아들이면 능엄주라는 차선에 교란이 생깁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단어 9~10자에 안테나를 세운다면 다른 차가 끼어들기를 해도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5분대로 능엄주를 완료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5분 동안 다른 차의 끼어들기를 허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끼어들기를 하더라도 그 상황을 알게 됩니다.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에 번뇌라는 장애물을 빨리 발견하고 빨리 비껴가게 됩니다. 유무의 편견에 빠지지 않는 생각을 얼마나 유지하느냐, 그 안테나를 유지하다 보면 분명히 목표가 가까워 질수 있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8월4일 부산 옥천사에서 봉행된 ‘능엄주 매월 108독 철야정진 10년 결사 회향법회’에서 옥천사 주지 백졸 스님의 설법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1452호 / 2018년 8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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