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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찰을 공공유산 취급하는 이들을 볼 때면

기자명 법보
  • 법보시론
  • 입력 2018.08.23 19:54
  • 수정 2018.08.24 19:18
  • 호수 1453
  • 댓글 4

석길암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

사찰은 수탈 역사 버텨낸 불교도 유산
공공유산인양 말하기 전에 역사 알아야

석길암 동국대 교수
석길암 동국대 교수

금정총림 범어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천년을 넘어 13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고찰인 만큼, 사중(寺中)에 전해지는 신이(神異)나 전설 그리고 영험담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1300년 범어사의 역사를 대표하는 수많은 고승들이 있다. 조선후기인 18세기 초, 이 절에서 수행하셨던 낭백낙안(浪伯樂安) 스님도 그 중의 한 분이다. 흔히 낭백수좌(浪伯首座) 혹은 만행수좌(萬行首座)라고 전해지는 이 스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스님은 보시행을 발원하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남을 위하여 이롭게 하고자 하는 원력을 세우고 실천하는데 충실하였다고 한다. 스님이 사실 때는 불교가 핍박을 받던 조선후기였기 때문에, 사찰에 부과된 부역의 종류만 30~40종류에 이르렀다고 한다. 종이, 붓, 노끈, 짚신, 새끼, 지게를 비롯한 특정 공납물과 온갖 농작물은 물론 하다못해 산나물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지방의 양반들에게 세금으로 내놓고 또 수탈당해야 했던 때였다.

이에 낭백수좌는 다음 생에는 반드시 재관(宰官)이 되어 사찰에 부과된 각종 수탈의 폐해를 없애고, 스님들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것이라 서원했다. 그리고 서원을 성취하기 위해 절 밑의 큰 길 주변에 오이를 심어 행인들에게 배불리 먹이고, 또 짚신을 삼아서 보시했다. 그러기를 10여년 후, 대중들을 불러 모아놓고 “내가 죽고 10년 후에 벼슬하는 이로 우리 절의 잡역을 없애주는 이가 있으면, 나인 줄 알라”고 유언을 남긴 다음 굶주린 범에게 몸을 던졌다.

과연 10년 뒤에 경상도 순찰사로 온 조엄이라는 이가 있어서, 범어사의 사정을 듣고 잡역을 면하게 해주었다. 이에 사중의 나이 든 스님들이 낭백수좌가 입적한 날과 순찰사 조엄이 태어난 날을 맞추어보니 같은 날이었다고 전한다.

단순히 영험담이나 한담, 혹은 스님들의 수행과 원력을 보여주는 인연담이라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속수무책으로 수탈을 당했던 스님들이 수탈을 면하게 해준 순찰사 조엄의 이야기와 바로 앞 시대에 범어사를 대표했던 만행수좌의 보시행과 결부하여 공덕을 기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야기 내막은 간단치 않다. 이야기는 조선시대의 스님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려준다. 공부하고 수행에 전념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수탈을 감내하기에 바빴던 스님들의 일상, 그 수탈을 꼼짝없이 감당해야 했기에 수행과 중생제도라는 출가 승려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본분조차 행할 수 없었던 시대의 스님들의 삶이다.

출가자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승하는 공간이자 신도들이 부처님에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신행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불사(佛事)를 행하기 위해서라도, 그 시대의 스님들은 왕실과 관료 그리고 지역 양반들의 가혹한 수탈을 감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신행과 수행의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갑계(甲契)였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만드는 동갑계의 기원이기도 하다. 갑계는 스님들이 사찰의 건물과 불보살상을 보수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기금을 조성하고, 그 기금을 빌려간 신도는 좀 더 많은 이자를 붙여 상환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실상을 알고 보면, 조선후기 사찰들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중창불사는 이 같은 갑계의 재물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한쪽에서 재물과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한쪽으로는 사찰을 유지하기 위한 온갖 노력들이 병행되지 않으면, 사찰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모습조차 유지할 수 없었던 세월, 그것이 조선시대의 불교였던 것이다. 그래서 당혹스럽다, 우리네 전통사찰이 모두의 공공재산이며 공공유산인양 취급하는 이들을 보면. 그 사찰의 당우(堂宇)가 어떤 수탈의 역사를 버텨낸 것인지를 안다면, 국가나 불교도 이외의 사람들이 과연 사찰이며 불교의 유산들을 공공의 유산인양 떠벌릴 수 있을까? 제발, 지나간 역사나 알고서 한마디 거드는 양식을 갖추었으면 좋겠다.

[1453호 / 2018년 8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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