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폴론나루와의 르네상스기 연 니상카말라
13. 폴론나루와의 르네상스기 연 니상카말라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8.08.27 17:42
  • 호수 14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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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계승 정통성 간절했던 인도 출신 국왕, 불교중흥에 사활 걸다

인도 칼링가왕조 출신이나
스리위자야 뿌리 내세우며
싱할라 왕권 계승자 자청
쿠데타로 칼링가 경쟁자 제거
‘신심’ 내세워 ‘차별화’ 시도
불사에 혼신 쏟으며 불심 과시

불교사상 통치이념 세우고
감세정책·평화외교·복지 등
뛰어난 통치술로 ‘성군’ 칭송
싱할라왕국 마지막 전성기
재위 9년, 39살 나이에 타계
폴론나루와 쿼드랭글에 남아있는 니상카말라의 불치사 하타다게는 60개의 방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2층 건물이었다. 현재는 1층의 흔적만 남아있지만 그 규모는 인접해 있는 이전의 불치사들과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불교도임을 천명했던 니상카말라 신심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칼링가왕조가 정당한 상속자인 스리랑카에서 비불교도가 권좌에 올라서는 안 된다.”

칼링가왕조란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싱할라왕조를 연 최초의 인물, 바로 스리위자야를 지칭한다. 스리위자야의 부모는 ‘사자의 자식’인 싱하바후와 싱하시발리 남매였다. 뱅골 지역의 공주였던 수파데비가 사자와 결혼해 태어난 싱하바후와 싱하시발리 남매는 자신들의 아버지가 사자임을 부끄럽게 여기고 아버지 사자를 죽인 후 나라를 세웠다. 바로 지금의 인도 오릿사주 인근 칼링가 지역에 위치한 싱하푸라라는 도시가 이들의 수도였다. 이 칼링가왕조(혹은 싱하푸라왕조)의 장자였던 스리위자야가 스리랑카로 이주,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세운 나라가 바로 싱할라왕국이다. 그러니 싱할라왕조의 뿌리는 칼링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천년 넘게 스리랑카 역사에서 부각되지 않았던 인도 동부의 칼링가왕조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바로 1187년 등극한 국왕 니상카말라에 의해서다. 엄밀히 따져보면 니상카말라는 왕국의 계승자가 될 수 없었다. 그는 1157년 싱하푸라에서 칼리가왕조의 일원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역사는 그가 파라크라마바후의 조카 또는 사위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니상카말라가 스리랑카, 싱할라왕국에 발을 디딘 것은 파라크라마바후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위자야바후 2세 때다. 위자야바후 2세가 왜 그를 초대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들이 없던 위자야바후 2세가 니상카말라를 처음부터 후계자로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싱할라왕조와 인척관계였던 니상카말라는 위자야바후 2세 등극 후 ‘아에파’라 불리는 부국왕의 지위에 올랐다. 하지만 등극한지 불과 1년도 안 돼 위자야바후 2세는 칼링가계의 또 다른 왕족이었던 마힌다 6세에 의해 암살당하고 마힌다 6세 또한 불과 닷새 후에 니상카말라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쿠데타의 연속이었다. 파라크라마바후 지배기 과중한 세금과 끊임없는 전쟁, 무리한 불사로 싱할라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는 땅에 떨어졌고 왕실의 권위도 추락했을 것이다. 권력자들의 암투 또한 팽배해져 있었을 터다.

이런 혼란기에 무력으로 왕좌를 쟁취한 니상카말라는 칼링가왕조의 일원이었음에도 까마득한 조상 스리위자야를 내세워 정당한 왕위계승자임을 자청했다. 폴론나루와의 사원구역 쿼드랭글에 있는 석장경 ‘갈포타’에 니상카말라가 새겨 넣은 ‘칼링가왕조가 정당한 상속인’이라는 ‘천명’은 바로 이러한 니상카말라의 ‘변명’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비불교도가 권좌에 올라서는 안 된다’는 선언은 니상카말라의 ‘책략’이었다. 스리위자야의 후손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가 쿠데타를 일으켜 내쫓은 마힌다 6세 역시 칼링가왕조의 후손 아닌가. 그와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니상카말라에게는 필요했다. 불교였다. 신심 깊은 불교도, 불치사리를 모신 싱힐라왕국의 정당한 지배자! 니상카말라에게는 이 명분을 얻는 것이 왕권을 쟁취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과업이었다. 힌두교가 흥성해있던 인도 칼링가왕조 후손 니상카말라가 처음부터 불교도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힌두교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좌에 오른 니상카말라는 철저하게 불교도가 되기로 결심한다. 아니, 국민들에게 자신이 불교도임을 보여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노력은 차라리 몸부림에 가까워보인다. ‘갈포타’만 해도 그렇다.

갈포타는 폭 1.4m, 길이 8.2m, 두께가 40~66cm에 이르는 거대한 돌덩이다. 단일 크기로는 세계 최대의 석장경이라 불린다. 이 바위 위에는 팔리어 경전에 나오는 ‘훌륭한 왕이 되는 덕목’이 새겨져 있다. 팔리어 경전을 소리 나는 대로 읽어 싱할라 문자로 적어놓은 것이다. 이 석장경 조성에 쓰인 돌은 아누라다푸라 근방 미힌탈레에서 채석됐다. 무려 25t에 달하는 바위덩어리를 100km 이상 떨어진 이곳까지 옮겨왔다. 엄청난 물적, 인적 자원이 투입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부처님의 가르침과 타밀족의 침략사, 주변국과의 외교관계 그리고 니상카말라가 어떻게 스리랑카의 왕이 되었으며 얼마나 열렬히 불교를 지원했는지에 관한 찬양을 적어 넣었다. 바위를 옮기고 갈포타를 조성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니상카말라에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실한 불교도이자 정통성 있는 국왕임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더 없이 좋은 ‘퍼포먼스’였을 것이다.
 

무게가 25톤에 달하는 바위덩어리에 ‘훌륭한 왕이 되는 덕목’을 새겨 놓은 석장경 ‘갈포타’에는 이를 조성한 니상카말라의 출생과 그의 생애, 업적 등이 함께 기록돼 있다.

갈포타의 옆면에는 주목할 만한 흔적이 남아있다. 두 송이 꽃을 들고 있는 힌두교 여신 락슈미(비쉬누의 부인. 행운과 부의 여신)와 그녀에게 물을 붓고 있는 두 마리의 코끼리 조각이다. ‘가자락슈미’라 불리는 힌두교의 상징으로 연꽃과 물은 행복한 탄생, 다산과 축복을 의미한다. 불교 경전을 기록한 석장경 옆에 힌두교의 길상 문양이 들어가 있다. 니상카말라에게는 수바드라데비와 칼야나마하데비라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적어도 이들 중 한 명은 그의 고향, 칼링가국 출신의 힌두교도였다. 바로 이런 이유와 그의 출신, 그리고 남아있는 흔적들 때문에 니상카말라는 본래 힌두교도였거나 적어도 힌두교에 매우 친숙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가 불자가 되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는지는 폴론나루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불치사리가 봉안돼 있던 ‘하타다게’는 니상카말라의 신심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건축물이다. ‘하타’는 싱할라어로 ‘60’이라는 뜻이다. 역시나 이 건물을 60일 만에 완성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그저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이다. ‘60개의 방이 있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원래 2층 구조였으나 현재는 1층만 남아있다. 가로 27m, 세로 37m의 직사각형 형태다. 벽에는 연꽃과 사자 문양이 조각돼 있고 정면에는 세 분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지만 현재는 흔적뿐이다. 불치사리는 2층에 모셔졌지만 타밀족에 의해 파괴돼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타다게는 왕조가 또다시 외침을 받아 남쪽 담바데니아로 수도를 이전하기 전까지 폴론나루와에 불치사리가 머물렀던 마지막 장소이기도 하다.

파라크라마바후가 조성한 불치사 와타다게가 화재로 소실되자 그 옆에 새로운 불치사 하타다게를 건설했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분석이다. 하지만 파라크라마바후의 불치사보다 더 크고 화려한 불치사를 짓고 싶었던 니상카말라의 의도가 투영된 작품일 수도 있다. 와타다게, 그리고 그 이전에 지어진 아타다게와 비교라도 하라는 듯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하타다게 옆에 세워진 또하나의 건물 ‘니상카 라타 만다파야’에서도 왕의 바람을 확인할 수 있다. 니상카말라의 개인 기도실로 쓰인 이 건물은 8개의 기둥 위에 활짝 핀 연꽃조각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 형태로 건설됐다. 연꽃줄기형태로 만들어진 기둥은 S자로 구부러져 있다. 불어오는 바람에 연꽃줄기가 흔들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 기도실에 앉아 니상카말라는 하타다게에서 스님들이 독경하는 소리를 들었다. 연꽃을 흔드는 바람에 실려 오는 독경소리. 그 청정한 순간에 심취한 왕의 모습을 이 공간은 연출하고 있다.
 

니상카말라의 개인기도실이었던 니상카 라타 만다파야.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구부러지게 만들어진 기둥은 폴론나루와 시대 건축예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니상카말라는 새로운 사원을 짓는 것 못지않게 오래된 사원을 보수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타밀군을 물리친 바라감바후가 조성한 담불라의 석굴사원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니상카말라는 이때 엄청난 양의 금을 보시, 석굴 전체를 금으로 칠했다. 이때부터 담불라 석굴사원에는 ‘황금바위’라는 뜻의 ‘랑기리’라는 수식어가 덧붙었다. 물론 석굴사원을 보수하며 가장 큰 2번 석굴 안에 자신의 조각상을 슬쩍 만들어 넣고, 바위에 비문을 새겨 자신의 업적을 선명히 기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니상카말라의 수많은 불사가 과연 순수한 신심의 발현이었는지 아니면 정치적 의도였는지를 단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출신과 종교적 신념을 문제 삼을 필요도 없이 그는 통치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국가의 통치체계를 정비하고 사회의 이념을 통일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전 시대 국민들의 숨통을 조이던 세금을 대폭 줄였다. ‘과도한 세금은 강도와 같다’고 여긴 니상카말라의 감세정책은 국민들로부터 ‘강도를 막아준 영웅’이라는 찬탄을 불러왔다. 동시에 금, 소, 토지 등을 국민들에게 분배하기도 했다. 주변국가와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범죄는 확연히 줄어들었고 국민들은 왕을 칭송했다. 하지만 파라크라마바후를 능가하는 과도한 불사는 니상카말라 통치기에도 지속됐고 줄어든 세금과 시혜에 가까운 복지정책들은 결국 왕국에 파산 위기를 불러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1196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왕위에 오른지 불과 9년만이었다. 왕국이 파산하기 전에, 국민들의 원성이 쏟아져 나오기도 전에 세상을 떴으니 남은 문제는 그의 몫이 아니었다. 뒤를 이어 아들 바라바후가 등극하고 이어 10여명의 왕이 짧게는 수개월, 길어야 6년을 재위하며 왕좌를 이어 갔다. 왕국은 급격히 쇠락하고 있었다. 역사는 니상카말라를 폴론나루와의 르네상스기를 열었던 성군이라 평가한다. 동시에 그 이름은 저물어가는 폴론나루와 시대의 끝자락이라는 서글픈 상징이 되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53호 / 2018년 8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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