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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⑥

백제 성왕 이후 역대 왕들의 불교식 시호시대 이어져

위덕왕이 혜총을 보내는 등
일본의 불교발전에 큰 기여

백제, 사비로 수도 옮기면서
왕실사찰인 일명 ‘능사’ 조성

금동향로·석조사리감 출토
부왕인 성왕을 위한 조성

위덕왕, 왕흥사지도 조성
후대 왕들이 국찰로 중창

법왕, 재위 1년 불과하지만
계율을 국가차원으로 적용

왕이 곧 부처님이라는 사상
법왕이 바로 그 정점에 있어

백제 왕실사찰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

제의 26대 성왕(聖王, 523〜554)은 대내적으로는 임시 피난수도였던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沘)로 천도하면서 국가체제를 재정비하고 불교를 통한 사상적 통일을 추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신라와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 남조왕조인 양(梁), 그리고 왜와의 빈번한 교류를 통하여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려고 하였다. 그리고 성왕은 이렇게 길러지고 조직화된 국력을 가지고서 필생의 염원인 한강 유역의 옛 땅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과의 공동작전으로, 고구려의 귀족 사이의 내분에 의해 방위력이 약화된 것을 틈타서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 유역으로 북진하였다. 성왕 29년(551) 백제군은 남평양(서울 부근)을 점령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회복하고, 신라는 한강 상류 지역으로 진입하여 죽령 이북 고현(高峴, 鐵嶺) 이남의 10군의 땅을 취하였다.

그러나 성왕 31년(553) 신라가 백제가 점유한 지역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한강 유역 전부를 독점하면서 오랜 동안의 노력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공적은 실패로 돌아갔고, 120년간이나 계속되던 나제동맹은 결렬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신라를 공격하다가 32년(554) 7월 관산성(옥천 부근)에서 전사함으로써 성왕의 중흥정책은 일단 좌절되었다. 이후 백제는 660년 멸망할 때까지 100여 년간 신라를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여 지난날의 적국이었던 고구려와 연결해서 공격의 화살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고구려-백제-왜로 연결되는 남북 연합세력과 수·당-신라로 연결되는 동서 연맹세력과의 각축전이 전개되었다.

성왕의 뒤를 이은 27대 위덕왕(威德王, 554〜598)은 부왕의 피살당한 원한으로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 남조왕조인 진(陳, 557〜589)뿐만 아니라 북조왕조인 북제(北齊, 550〜77)와 북주(北周,557〜580), 그리고 이어 중국을 통일한 수(隋, 581〜618)와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려고 하였다. 또한 바다 건너 왜에도 아우 혜(惠王)를 보내어 성왕 피살의 보복을 위한 원군을 요청하였으며, 이후 승려와 장인, 불교경전과 불상 등을 빈번히 보내었던 사실이 ‘일본서기’에 전한다.

특히 위덕왕 42년(595)년에 혜총(惠聰)을 보냈는데, 그는 고구려의 혜자(慧慈)와 함께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어 일본불교계의 동량의 역할을 하였다. 일본에 불교를 처음 전해준 인물은 성왕이었지만, 실제 일본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위덕왕이었다. 위덕왕은 원래 불교의 신심이 돈독하였던 인물로서 ‘일본서기’ 긴메이기(欽明紀) 16년(555) 8월조에는 백제의 여창(餘昌, 위덕왕)이 부왕인 성왕을 위하여 출가 수도하려고 하다가 여러 신하와 백성들의 간청에 의해서 그만두고 대신 승려 100인을 출가시키고 번개(幡蓋) 등 종종의 공덕을 지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그리고 그의 시호인 ‘위덕왕’도 불교적인 것임은 물론이다.

한편 부여 능산리사지는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조성한 왕실사찰의 절터로서 일명 ‘능사(陵寺)’로도 불리는데, 능산리고분군과 사비 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羅城) 사이의 골짜기에 위치한다. 사비시기 백제국왕 무덤들 곁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 이 절은 그들의 명복을 빌었던 기원사찰(願刹)로 이해된다. 절터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된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는데, 1993년에 진행된 2차 발굴조사에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1995년의 4차 발굴조사에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을 비롯하여 와전류, 토기류, 금속류, 목제류 등 다수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특히 국보로 지정된 위의 두 유물은 불교와 도교를 두 축으로 한 백제의 사상과 신앙, 금속공예 기술과 조형예술의 높은 수준을 유감없이 나타내준다.

그 가운데 석조사리감은 화강암제로서 윗부분을 아치형으로 처리하여 전체 모양이 능산리고분군의 2호분(중하총)의 현실(玄室)과 같은 모양이다. 그리고 감실 입구 양쪽 면에는 10자씩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절의 창건 연대와 발원자 등을 비롯한 사찰의 성격이 확실히 밝혀지게 되었다. 즉 사리감의 오른쪽에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왼쪽에 “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백제 창왕(시호는 위덕왕) 13년인 정해년에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한다”는 의미이다. 조성연대가 창왕 13년 정해년(567)(‘삼국사기’ 기록에는 즉위년칭원법에 의해 정해년은 위덕왕 14년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유년칭원법을 사용한 사리감의 연대와 1년 차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발원자가 창왕의 누이, 곧 성왕의 딸이었다는 사실 등을 사찰의 위치와 관련시켜 해석하면, 부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발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사리감의 형태가 능산리고분군 가운데 가장 오랜 형태를 보이고 있는 2호분(중하총)의 현실과 같은 모양이라는 점에서도 방증된다. 또한 사리감 명문의 글씨체가 중국 북조 계통의 글씨체인 점도 주목된다. 이것은 위덕왕이 남조 왕조인 진뿐만 아니라 북조왕조인 북제-북주와도 활발히 교류하였던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창건한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사리장엄구 일괄.

위덕왕 24년(577)에는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한 사실이 최근에 새로 확인되었다. 2007년 부여 왕흥사지를 발굴 조사할 때, 목탑지 심초석 남쪽 중앙 장방형의 석재 안에 사리장엄구가 안치되었는데, 청동제 원통형 사리함, 은제 사리호, 금제 사리병 등 3종으로 구성되었다. 그 가운데 청동제 사리함의 표면에는 6행 29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 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정유년 2월 15일 백제 창왕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사찰을 세웠고, 2매였던 사리가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라는 내용이다. 이로써 사찰의 창건과 사리구의 제작이 창왕 24년(577)에 이루어졌고, 창왕, 곧 위덕왕이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한 원찰임을 알 수 있다. 이 사리구에는 사찰 이름은 나오지 않았으나, 이 절터는 1934년 ‘왕흥(王興)이라고 찍힌 고려시대 문자와편이 수집되어 일찍부터 왕흥사지로 비정되어 왔는데, 2000년부터 연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점차 사원의 면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통상적으로 중문이 위치하는 장소에 T자형의 석축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왕흥사지에 관한 가장 큰 논란은 창건연대이다. 새로 발굴된 사리함기에는 창왕 정유년(577) 죽은 아들을 위해 절을 세웠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서는 법왕 2년(600) 봄 정월에 왕흥사를 창건하고, 30인이 승려가 되게 하였고, 무왕 35년(634)에 준공되었다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삼국유사’에서는 법왕 2년(600) 터를 닦고, 무왕이 완성하여 절 이름을 미륵사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자료를 종합하여 왕흥사사리함기에 따라 왕흥사는 577년 창왕이 창건한 것이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문헌기록에 나오는 법왕과 무왕 때의 왕흥사는 익산의 미륵사를 말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익산의 미륵사는 ‘삼국유사’에 별도의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고, 더욱 2009년 발굴된 금제사리봉안기에 의해 법왕과 무왕 때의 왕흥사와는 별개의 사찰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나로서는 사리함기에는 특별한 사찰 이름이 보이지 않으므로 창왕 때 한 왕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왕실의 원찰로서 창건하였지만, 법왕과 무왕 때에 이르러 국가불교를 상징하는 국찰(國刹)로 크게 중창하면서 사찰의 이름을 왕흥사로 바꾼 것으로 본다.

위덕왕은 45년간 재위하면서 백제의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여 안정을 찾게 하였으나, 그 뒤를 이은 28대 혜왕(惠王, 598〜599)과 29대 법왕(法王, 599〜600)이 각각 1년 만에 서거함으로써 백제의 중흥 작업은 지체되었다. 그 가운데 혜왕은 성왕의 둘째 아들로서 위덕왕 원년(554) 부왕이 신라군에 피살되자 왜에 사신으로 가서 보복을 위한 군사를 요청한 사실이 있었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혜왕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은 법왕(‘수서’에서는 위덕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은 재위 기간이 불과 1년에 불과하였지만, 백제불교사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우선 즉위한 해(599) 12월에 왕명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 같은 새들을 놓아주게 하고, 또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하는 도구를 모두 불태워버리게 하였다. 이로써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계율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철저하게 지키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2년(600) 정월에 왕흥사를 세우고 30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고, 날씨가 크게 가물게 되자 왕이 몸소 칠악사(漆岳寺)에 가서 비를 빌었다. 그는 그해 5월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삼국사기’의 법왕조에 기록된 행적 3건이 모두 불교 관련 사실뿐임을 고려할 때, 그리고 ‘삼국유사’에 백제 관련 사실로서 법왕이 살생을 금하고, 왕흥사를 창건하였다는 사실이 한 조목으로 독립되어 서술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법왕은 불교를 국교로 하는 이른바 ‘불교국가’를 꿈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그는 단명으로 끝나게 되어 그가 염원하였던 불교국가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지만, 그의 아들인 무왕(武王, 600〜641)이 법왕(法王)이라는 시호를 올린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법왕은 범어 dharmarāja의 번역어로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말이다. 원래 왕은 가장 수승하고 자재하다는 뜻이며, 부처님도 법문의 주인이며, 중생을 교화함에 자유자재한 묘용이 있으므로 법왕이라고 부른다는 의미를 고려할 때, 백제의 법왕은 바로 부처님 같은 존재, 곧 왕이 곧 부처님이라는 ‘왕즉불사상(王卽佛思想)을 그대로 받아들인 표현으로 본다. 2009년에 익산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굴된 금제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백제인들이 실제 부처님을 법왕이라고 칭하였던 사실이 확인된다. 법왕의 할아버지인 성왕이 전륜성왕(轉輪聖王) 같은 이상적인 제왕을 염원한 바 있었는데, 법왕은 그것에서 한 단계 발전하여 자신이 곧 부처님과의 일체를 꿈꾸었던 것이다.

같은 시기 신라 왕실에서도 24대 진흥왕(540〜576)이 자신의 아들 이름을 금륜(金輪, 또는 舍輪)과 동륜(銅輪)이라고 하여 전륜성왕 같은 위대한 제왕의 출현을 염원하였던 데 비하여 그를 계승 발전시킨 26대 진평왕(579〜632)은 자신의 이름을 정반왕(淨飯王, Ṥuddhodana), 부인의 이름을 마야부인(摩耶夫人, Mahā-māyā)이라고 칭하여 부처님과 의제(擬制) 가족적인 관계를 이루려고 하였던 사실과 대비된다. 백제의 국왕 가운데 26대 성왕-27대 위덕왕-28대 혜왕-29대 법왕 등 4왕의 시호는 모두 불교에서 취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를 이른바 ‘불교식시호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바로 그 정점에 법왕이 위치하였던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53호 / 2018년 8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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