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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북한산 부왕사지(扶旺寺址)

기자명 임석규

북한산 일대는 삼국시대 당시
치열한 쟁탈전 벌어진 요충지

조선시대 산성 축성과 함께
창건된 스님들의 승영사찰

6·25 한국전쟁 포화 속에서
부왕사지의 대부분 파괴돼

표석·승탑 같은 유물 존재
극락전지 등 건물지도 확인

축대가 무너져 건물지 훼손
전면적 발굴조사 이뤄져야

부왕사지 전경.

사적 제162호 북한산성에 대한 문화재청 누리집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치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중략)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중략)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던 중요한 곳이었다.”

문화재청의 설명을 인용한 것은 위 내용이 바로 우리가 북한산성에 대해 그동안 배워왔던 국가에서 공인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북한산성이 정말 삼국시대 토성이었던 것을 1711년에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이고, 그 사이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산성이 위치한 삼각산은 지세가 험준하여 방어에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군사적 중요성이 높았던 곳이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132년(개루왕 5)에 북한산성을 축성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곳을 방어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각축을 벌이기도 하였다. 475년에는 고구려 장수왕이 침공하여 개로왕(蓋鹵王)이 전사하고 한성도 함락되었으며, 고구려는 이곳을 북한산군(北漢山郡)이라 불렀다. 이 후 551년(진흥왕 12)에 신라·백제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였고, 신라는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555년 10월에 진흥왕이 이 지역을 돌아보았는데, 이를 기념하여 지금의 서울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 비봉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세우게 된다. 557년(진흥왕 18)에는 신주를 북한산주로 개명하였다. 이후 고구려군이 몇 차례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즉 삼국시대에 이미 이곳은 중요 격전지였고, 삼국은 강성하던 시기에 차례로 북한산성을 점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북한산은 한산주에 속하는 대당관계의 요충지였다. 신라는 9주마다 중앙군이 주둔하는 정(停)을 1개소씩 설치하여 지방을 통제했는데, 한산주에만 2개의 정을 설치했었다.

고려시대에도 몇 차례 성을 고쳐 쌓았으며, 8대 국왕 현종은 거란이 침입하였을 때 북한산 계곡 중흥동에 피난하기도 하였다. 1232년에 몽고가 다시 침입하였을 때에는 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1388년(우왕14)에는 최영이 북한산에 중흥성(重興城)을 축조하여 군대를 주군시키기도 하였다.

도읍을 한양에 정한 조선에게 북한산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1451년 문종은 도성을 방어할 성을 쌓고자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들은 중흥성(북한산성)과 광진성 등 기존의 성들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는데, 모두 무너져있으니 이를 수리하는 것이 더 급하다는 의견을 내었고, 성을 개축하기 위해서는 우선 돌을 모으는 것이 시급하다고 하였다. 즉 문종 때에도 중흥성(북한산성)과 광진성은 이미 돌로 쌓은 석성이었던 것이다.
 

만세루지 발굴조사.

북한산은 불교적인 시각에서도 신성한 곳이었다. 이는 북한산 주요 봉우리들의 명칭이 문수봉, 보현봉, 원효봉인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의상 스님의 사상을 전파했던 화엄십찰 중에서 청담사(靑潭寺)가 북한산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아 조성된 사찰들 중 상당수가 이미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 중 기록상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찰은 지금 세검정초등학교에 있던 장의사(壯義寺)이다. 이 절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장춘랑과 파랑이라는 두 장수를 기리기 위해 659년(무열왕 6)에 건립되었으며, 그 터에는 현재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 당간지주(보물 제235호)와 고려시대에 조성된 귀부가 남아 있다. 이 사찰에서는 고려 광종대에 명성을 떨쳤던 원종대사 찬유 스님과 법인국사 탄문 스님이 구족계를 받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이 국태안민을 기원하기 위하여 중흥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려 현종은 즉위하기 전 왕실 내의 세력 다툼을 피하여 북한산 신혈사에 은신한 적이 있었고, 거란의 침입 당시 태조의 재궁을 북한산 향림사로 옮기기도 하였다. 삼천사와 문수사가 고려시대에 창건됐으며, 신라의 수태대사는 당나라에서 관음의 화신으로 칭송되던 승가대사를 흠모하여 삼각산 남쪽에 승가굴을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이 승가굴에는 고려 현종 15년(1024)에 지광 스님과 성언 스님 등이 승가대사상을 만들어 봉안하기도 하였다. 이 승가대사상은 보물 제1000호로 지정되어 현재 북한산 승가사 승가굴에 모셔져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1711년(숙종 37)에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기로 한다. 하지만 전란으로 노동력과 군사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승려들을 그 대안으로 삼는다. 그 결과 산성의 축성과 수비에 승군이 동원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이다. 특히 북한산성에는 축성과 더불어 기존의 중흥사, 태고사, 문수사를 제외한 11곳의 사찰(용암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원각사, 국녕사, 상운사, 서암사, 진국사, 봉성암, 원효암)이 건립되었다. 이 사찰들을 승영사찰(僧營寺刹)이라고 하는데, 본래의 역할인 종교적인 기능 외에 성을 쌓고 지키는 역할도 했다. 산성 안에 건립된 승영사찰들은 중흥사를 수사찰로 삼았으며, 팔도도총섭이 겸하는 승대장 1명과 각사승장 11명, 수승 11명, 의승 35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의승은 각 도에 있는 승려들 중에서 차출하여 2개월씩 복무하도록 하였다.

북한산 승영사찰 중 팔도도총섭이 머물던 중흥사(경기도 기념물 제136호)와 북한산성 수문일대의 산성수비를 담당하던 서암사(경기도 기념물 제140호)는 이미 발굴조사를 마치고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만세루지의 장초석과 극락전지 등 주요 유구가 노출되어 있음에도 전혀 정비되지 못하고 있던 부왕사지는 최근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시·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법당(극락전지)과 만세루지 및 고래시설이 있는 승방, 부속전각 등과 함께 승영사찰의 특성을 보여주는 창고건물지 등에서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유구가 확인되었다.
 

부왕사 극락전지 석축.

부왕사지는 조선시대 북한산성을 다시 쌓을 때 함께 창건된 승영사찰로서 20세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법맥을 유지해왔던 곳이다. 북한산성이 축성(1711년)된 후 1712년 심운대사(낙성당 민환 스님)에 의해 111칸 규모로 창건되었으며, 북한산성 보수와 부왕동 암문의 2차 방어 및 승영창고를 이용한 군기보관이 주요역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왕사에 대해서는 조선후기 북한산을 찾은 추사 김정희의 ‘완당선생문집(院堂先生文集)’, 실학자 이덕무의 북한산 유람기인 ‘기유북한 (記遊北漢)’, 정조 17년 8월에 이옥이 북한산을 둘러보고 쓴 ‘중흥유기(重興遊記)’ 등에 전각과 탱화가 언급되어 있어서 북한산성 내 사찰 중 기록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호국사찰로 유지되던 부왕사는 일제강점기 군영제가 폐지된 후에도 1950년대까지 사세가 유지되었으나, 한국전쟁 과정에서 대부분 건물과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현재 부왕사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78번지에 있으며, 사역 진입부에 남아있는 만세루지에는 사다리꼴로 치석한 기둥모양 초석(높이 2.02m) 16기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배치되어 있고, 북편 측면에는 장대석으로 조성한 계단이 남아있다.

루(樓)지에서 극락전지로 가는 중간에는 자연석을 이용한 계단이 조성되어 있으며, 거칠게 다듬은 장대석이 5~6단 정도 쌓여있는 축대가 있다. 마당 양측에는 건물지가 있으나 교란이 심해 규모를 확인할 수 없다. 극락전지는 13×6m 규모로 정면과 양 측면에 장대석을 4단 정도 쌓아 기단을 조성하였으며, 정면에 6단의 계단을 설치하였다. 건물지 상면에는 다듬은 초석 7기와 자연석 초석 2기가 남아있으며, 건물지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극락전지 좌우에서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평탄지와 석축으로 보이는 유구가 확인된다.

부왕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유물로는 표석 1기, 승탑 1기, 소대 1기, 추정 절구 1기, 맷돌 1기 등이 있다. 표석에는 ‘부황사(扶皇寺)’라고 새겨져있다. 승탑은 원형 기단석과 원종형 탑신석, 방형 옥개석을 각기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기봉당찬우지탑(箕峯堂贊愚之塔)’이라고 각자되어있다. 조사구역에서는 조선시대 기와편과 백자 저부편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부왕사지에서 용학사 갈림길을 따라 약 500m 떨어진 곳에는 작은 평탄지에 승탑 1기가 남아 있는데 어느 스님의 승탑인지는 알 수 없다.

현재 부왕사지에는 임시건물이 극락전지 서남쪽 요사채 부지에 건립되어 사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사지에 대한 정비 방안 등이 고양시와 부황사(주지 재연 스님)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우리 연구소에서는 부왕사지의 사역을 확인하고, 주건물지인 극락전지의 규모와 가람의 중심축을 확인하기 위해 최근 시·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주불전지(극락전지)와 만세루지는 건물지 전면 좌측 기단 및 축대가 붕괴되면서 건물지가 훼손되고 있기 때문에 유구정비를 통한 보존대책이 시급하다고 판단되었다. 또한 실제 조사 기간 1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시굴조사라는 한계 때문에 규모 및 특성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속전각(응향각지), 승방지, 승영창고시설 등은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전체규모를 확인하고 별도의 보존대책 또한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부왕사지는 북한산성과 관련하여 승영사찰의 역할이나 승군제도 파악에 있어 중요한 사찰 중 하나이다. 금번 조사된 대상지가 문헌상에서 확인되는 부왕사지와 동일한 곳으로 확인되었고, 문헌기록 또한 상세하게 남아있으므로 향후 발굴조사를 포함한 중장기적인 정비계획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절터를 문화재로 지정하고 체계적인 보존대책 또한 수립하여야할 것이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54호 / 2018년 9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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