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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망각의 적절한 조화

기자명 심원 스님

설일체유부 5위75법의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에 속하는 ‘한(恨)’은 아주 강력한 번뇌이다. 유부의 대표 논서인 ‘구사론’에서는 “한은 마음으로 하여금 분노의 대상을 자주 여러 번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 대상에 대해 원한을 품게 하고, 또 그렇게 하여 품은 원한을 버리지 않게 하는 마음작용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자주 여러 번 생각하게 하고’ ‘버리지 않게’ 도와주는 힘은 ‘념(念)’ 심소로 모든 마음작용의 바탕이 되는 대지법(大地法)이다. 그런데 일단 작용을 시작한 ‘한’은 ‘념’에 의해 그 세력이 강화되면서 무서운 파괴력을 지니게 되고, 복수와 같은 형태로 구체화 된다. 원한을 품은 사람은 누차에 걸친 다짐과 각인된 기억을 통해 복수해야 할 이유를 끊임없이 재확인한다.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

춘추전국시대, 양쯔강 하류에 국경을 맞댄 적대국 오나라와 월나라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유명한 고사성어를 남겼다. 치열하고 집요했던 두 나라의 복수전인 와신상담은 ‘부차(夫差)의 와신’ 장과 ‘구차(句踐)의 상담’ 장으로 전개된다. 발단은 월왕 구천이 오왕 합려와 세자를 죽이고 오나라를 침략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살아남아 오왕이 된 둘째 왕자 부차는 복수를 다짐한다. 그는 매일 장작더미 위에서 자면서[와신(臥薪)] 부하들에게 인사 대신 구천에게 원수 갚을 것을 상기시키도록 하였다. 드디어 수년 후 월나라를 쳐들어간 부차는 구천을 생포해 온갖 치욕을 주고 월나라를 철저히 유린하였다.

한편 갖은 수모를 감수하며 부차에게 신임을 얻은 구천은 구사일생으로 월나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곰 쓸개를 핥으면서[상담(嘗膽)] 복수를 다짐하며 기다리길 20년, 마침내 구천은 오나라를 침범해 합병하였고 오왕 부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와신상담의 대서사극은 여기서 막을 내리지만 후일담은 이어진다. 복수에 성공한 구천은 월나라의 전성기를 열고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고난을 함께했던 범려가 떠나고, 명신(名臣) 문종(文種)은 반란을 계획했다하여 토사구팽한다. 이어 구천도 오래가지 않아 병사한다.

오왕 부차는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고[臥薪], 월왕 구천은 곰의 쓸개를 핥으면서[嘗膽] 치욕과 수모의 기억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복수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했고, 어느 나라도 번영을 누리지 못했다. 원한도 전쟁도 끝나지 않았다.

‘법구경’에는 원한과 복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싯구가 전해진다. “무릇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의해 결코 가라앉지 않는다./ 원한은 원한을 버릴 때에만 가라앉는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지난 8월21일,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던 총무원장 설정 스님이 의혹에 휘말려 자진사퇴 하는, 종단사상 초유의 상황이 펼쳐졌다. 이에 따라 조계종단은 9월28일 예정된 제36대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후보등록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선거 국면으로 전환됐다. 그런 와중에 9월6일 개원한 중앙종회 임시회에서는 해종행위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고 한다.

지금 종단이 직면한 가장 큰 과제는 누구를 총무원장으로 선출하느냐가 아니라, 상처투성이로 얼룩진 승가를 어떻게 화합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나만 옳고 당신은 잘못되었다’로 단죄하기 시작하면 원한은 원한을 낳을 뿐, 화합승가는 요원한 일이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한국불교 전체를 나락으로 추락시키고 승가 공동체를 파괴한, 이러한 중차대한 허물을 어물쩍 없던 일로 묻어버린다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덮을 것인가? 기억과 망각의 적절한 조화, 중도의 지혜가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이다. 한국불교 미래를 위한 대중의 공의를 모아야 한다.

심원 스님 중앙승가대 강사 chsimwon@daum.net

 

[1455호 / 2018년 9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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