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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⑦

백제 무왕 후반기부터 불교식 대신 유교식 시호시대 시작

고구려와 수당의 혈투 계속
백제는 치열하게 신라 공격

왕들이 해마다 죽어나가자
무왕이 익산에 미륵사 창건

미륵사탑은 한국석탑 시원
돌을 목재처럼 다듬어 사용

발견된 사리봉안기 통해서
창건 주체 사택왕후 확인

선화 공주의 창건 설화는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

당에서 유학을 받아들이며
유교식 시호가 일반화 돼

미륵사지 서원의 탑. 2009년 수리과정에서 금제사리봉안기가 나왔다. 현재는 수리 이후 모습.

7세기 전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고구려-백제-왜로 연결되는 남북 연합세력과 수·당-신라로 연결되는 동서 동맹세력과의 각축전이 전개되었는데, 이 양대 진영을 대표해서 직접 대결한 것이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이었다. 고구려가 수·당과 혈투를 계속하는 동안 백제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급히 서둘렀다. 30대 무왕(武王, 600~641)과 31대 의자왕(義慈王, 641~660) 때의 연이은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는 수와 당에 구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고, 치열한 3국 사이의 전쟁은 마침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로 귀결되었다. 먼저 무왕은 ‘삼국사기’ 무왕조에서 “풍모가 영특하고 지기(志氣)가 뛰어났다”고 표현되었고, ‘삼국유사’ 무왕조에서는 용의 아들이라는 설화를 전해주었다. 사람과 동물이 혼인하는 인수교혼(人獸交婚)의 설화 형태는 영웅적인 인물의 출생을 상징적으로 윤색하기 위하여 역사상 종종 등장시키는 모티브였다. 백제의 신라 침공은 무왕 3년(602)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원광으로부터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받았던 귀산과 추앙이 전사한 것도 이 첫 번째 전투에서였다. 이후 무왕은 국경에 산성들을 쌓으면서 쉴새없이 신라를 공격하는 한편, 수와 당에 연이어 사신을 보내는 양단책을 구사하였다. 그리고 왕권 강화를 위하여 사비성을 중수하고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축조하는 등의 토목공사를 추진하는 한편,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서 웅진에 군사를 주둔케 하고, 경상도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새로운 기지로서 옛날 마한의 마지막 중심지였던 익산에 별도(別都)를 건설하였다.

무왕의 불교정책은 부왕(父王)의 업적을 계승하여 법왕이라는 시호를 바치고, 법왕이 중창하려던 왕흥사(王興寺) 공사를 재개하여 35년만인 무왕 35년(634)에 낙성하였다. ‘삼국사기’에서 이 사찰의 준공 사실을 전하면서 “왕흥사는 강물에 임하고 채색이 장려하였는데, 왕이 매양 배를 타고 절에 가서 행향(行香)하였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백마강변에 위치하여 절에 갈 때는 배를 타고 가는데, 세속의 세계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가는 효과를 나타낼 수 있었다. 2000년부터 연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으로 배치된 사찰의 면모가 드러났다. 그리고 목탑지 심초석의 사리공에서 발굴된 청동제 사리함기의 명문에 의해 왕흥사는 원래 창왕(위덕왕) 24년(577)에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실의 원찰로 세웠던 사찰임을 알게 되었다. 이 사찰은 신라의 호국도량인 황룡사, 그리고 고려의 최대 사찰인 흥왕사(興王寺)에 비견되는 백제 제일의 국찰(國刹)이었다.

그런데 무왕은 왕흥사의 창건에 만족하지 않고, 5년 뒤인 무왕 40년(639) 익산에 미륵사를 새로 창건하였다. 미륵사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바와 같이 미륵하생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사찰인데, 앞서 598년 위덕왕, 599년 혜왕, 600년 법왕이 해마다 1명씩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한 무왕으로서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세상을 펼치고 싶다는 염원의 발로였다. 미륵사는 3회 설법의 미륵하생신앙에 의거하여 3탑-3금당의 3원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구조인데, 중원에 목탑, 동원과 서원에 각각 석탑을 건설하였다. 중원의 목탑과 동원의 석탑은 완전히 소실된 뒤 최근 동원 석탑만이 복원되었다. 서원의 석탑은 결실부분이 많지만,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최대 규모이며 가장 오래된 탑이다. 이 석탑은 전체의 부재를 마치 목재처럼 다듬어 하나하나 결구함으로써 목탑의 구조를 완벽히 석탑으로 구현하였다. 그러므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히 보여주는 한국 석탑의 시원(始原)으로 평가 받는 기념비적인 석탑이다. 백제탑의 역사는 한성 시기인 침류왕 원년(384) 불교가 전래된 다음해(385) 한성에 사찰을 창건한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그 유적이 확인되지는 못했다. 그 뒤 성왕 때에 이르러 백제가 중흥되고 불교가 부흥됨에 따라 웅진과 사비에 새로운 사찰들이 건축되었다. 백제사찰의 유적으로는 성왕 5년(527) 웅진의 대통사지(?), 16년(538) 즈음 사비의 정림사지, 위덕왕 14년(567)의 능산리사지, 위덕왕 24년(577)의 왕흥사지, 무왕 40년(639)의 미륵사지 등이 확인되었다. 이들 사찰에는 중문-목탑-금당-강당으로 배치된 일탑일금당의 백제 가람 구조의 한 요소로서 목탑이 건축되었는데, 미륵사에 이르러 목탑과 동시에 처음으로 목탑을 충실히 번안한 새로운 석탑이 축조되었다. 그리고 이 석탑 건축은 멀지 않은 시기에 재건축된 정림사지 5층석탑 양식으로 변형 발전하였다. 그리고 신라통일 뒤의 왕궁리 5층석탑을 거쳐 고려시기의 보원사 5층석탑, 그리고 무량사 5층석탑으로 이어졌다. 통일신라 시기와 고려시기로 내려오면서 각 시기의 새로운 양식이 가미되는 변형과정을 겪게 되었지만, 기본구조나 옥개석의 처리 등에서는 백제시대의 미륵사지석탑이나 정림사지 석탑의 양식을 따랐다.

한편 미륵사지에서는 2009년 서원 석탑의 해체 복원 공사 중에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어 미륵사 창건의 연대와 주체가 구체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즉 미륵사 창건 시기는 무왕대 초반이나 늦어도 634년 이전으로 추정되어 왔으나 기해년(639) 정월 29일로 수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창건 주체도 신라의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아닌 백제의 사택왕후(沙宅王后)로 밝혀지게 되었다. 중원의 목탑과 동원의 석탑의 창건 주체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창건 주체를 사택왕후 1인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삼국유사’ 무왕조의 선화공주 관련 설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재검토가 요구된다. 신라 진평왕의 딸로는 선덕여왕인 덕만(德曼)과 김용춘의 부인인 천명부인(天明夫人) 등 2인만이 확인되는데, 선화공주가 이들의 자매로 추가된다면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과 김용춘의 아들인 무열왕(김춘추)은 이종사촌간이 되는데, 의자왕과 무열왕은 최대의 적대적인 관계였음은 물론이다. 결론적으로 선화공주 설화는 삼국통일 뒤에 백제와 신라 두 지역 주민들의 화합을 추구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리고 설화의 역사적 배경은 동성왕 15년(493) 동성왕이 신라의 이벌찬 비지(比智)의 딸을 맞아들인 사실과 진흥왕 14년(553) 진흥왕이 백제의 왕녀를 소비(小妃)로 맞아들였다는 사실 등 두 나라 사이의 혼인 사실이었다. 반면 사택왕후의 사택씨는 백제 8대성의 하나로서 특히 백제 말기에는 가장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일찍이 1948년 부여에서 발견된 사택지적비(沙宅智積碑)에서는 의자왕 14년(654) 대좌평을 지낸 사택지적이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고 원찰을 건립한 사실을 전하는데, 미륵사의 창건 주체인 사택왕후의 아버지 사택적덕(沙宅積德)과 형제 사이거나 가까운 친족 관계로 보인다.

한편 무왕을 이은 의자왕 때에 이르러 신라에 대한 공략은 더욱 치열해졌다. 의자왕은 ‘삼국사기’에, “무왕의 원자(元子)로 웅위 용감하고 담력과 결단성이 있었다. 무왕 재위 33년 태자에 책립되었는데, 어버이 섬기기를 효도로써 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로 일컬어졌다”고 기록된 바와 같이 유교의 이상적인 인물로 칭송받고 있었다. ‘의자’라는 명칭도 사후 올린 시호가 아니고 태자 때부터의 본래 이름이었다. 그의 부왕인 무왕은 평생 불교치국책을 추구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올린 시호인 ‘무왕’이 한식(漢式) 칭호였다는 점을 아울러 고려하면 불교식시호를 칭하였던 이전의 왕들과 다르게 불교에서 유교로의 사상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변화의 계기는 무왕의 말년 즈음인 41년(640) 당의 국학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던 사실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본다. 원래 백제는 중국 남조의 동진-송-제-양-진으로부터 현학적이며 귀족적인 불교를 주로 받아들였다. 특히 성왕 때는 보살황제로 칭송되던 양무제의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전륜성왕을 염원하였다. 그리고 성왕을 이은 위덕왕대 후반부터는 수문제의 불교치국정책을 받아들이면서 불교식시호시대를 연출하였다. 수문제는 남북조의 대립시대를 종식시켜 중국을 통일하면서 불교를 통일국가의 정신적 지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 결과 북주 무제의 폐불 사태를 벗어나 불교는 다시 국가종교로 부흥되었다. 수문제 불교정책의 기본은 국가 흥륭을 위하여 불교를 채용한 것으로 ‘나라를 위하여 행도(行道)하는 불교’였다. 그를 이은 수양제도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학문연구와 대중교화가 성하게 되었다. 특히 교학으로는 삼론종과 천태종이 융성하게 되었는데, 고구려와 백제에 전파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곧 수가 멸망하고 당이 새로 건국되면서 불교는 다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당의 종교정책은 도교를 우대하여 도선불후(道先佛後)의 석차를 정하고, 유교를 국가통치의 이념으로 삼으면서 불교의 종교적인 위상과 정치적인 역할은 크게 약화되었다. 백제에서는 무왕대 후반부터 당의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새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무왕 41년(640)에는 당의 유교진흥정책에 따라 국학에 유학생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의자’라는 왕의 이름과 ‘무왕’이란 왕의 시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불교식시호시대를 마감하고 한식(漢式), 또는 유교식(儒敎式)시호시대를 맞게 되었다.

의자왕은 즉위 초부터 신라에 대한 공격을 급히 서둘러 2년(642)에 신라의 백제에 대한 일선 요지인 대야성(大耶城, 陜川)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시키고, 이어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신라의 당항성(党項城, 南陽)을 공략하여 당과의 통로를 차단하려고 하였다. 백제에 대한 방어선을 낙동강까지 후퇴시키는 위기에 처한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으나 실패하고, 마침내 당에 가서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 요구를 받아들인 당은 나당연합군을 편성하여 먼저 백제를 정복한 뒤 고구려를 남북에서 협공하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 결과 백제는 의자왕 20년(660년) 멸망하기에 이르렀는데, 귀족세력의 내분이 멸망을 재촉하는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일본서기’ 권24에는 의자왕 2년(642) 의자왕의 모친이 사망한 것을 계기로 왕족과 귀족 40여인이 축출된 사건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말년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면서 귀족들 사이의 분열 대립은 극을 치닫게 되었다. 그러나 침략군에 대항하여 승려인 도침(道琛)이 왕족인 복신(福信)과 함께 전개한 부흥운동은 백제불교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건이었다.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일컫고 군사를 일으켰다. 백제부흥군은 주류성(周留城, 韓山)에 웅거하면서 한때 기세를 크게 떨쳐서 200여 성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으로부터 왕자 풍(豊)을 맞아다가 국왕을 삼고 여러 차례 당과 신라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부흥운동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풍이 또 복신을 죽이는 내분이 생겨 와해되고 말았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55호 / 2018년 9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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