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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⑧

신라시대 전성기 구분, 불교와 유교 입장에 따라 달라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신라시대 3분법으로 구분

신라시대 지배자 칭호는
시대에 따라 계속 달라져

읍락국가 시작해 몰락까지
현재 신라를 5시기로 구분

불교로 사상적 기반을 마련
부족을 넘어 국가정신 수립

교학연구와 대중운동으로
한국불교사 최고 정점 이뤄

경주 불국사 전경.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때인 751년에 건립했다. 사진에 보이는 탑은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각각 국보20호와 21호로 지정돼 있다.
경주 불국사 전경.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때인 751년에 건립했다. 사진에 보이는 탑은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각각 국보20호와 21호로 지정돼 있다.

1000년 왕국 신라 역사에 관해서는 종래 2종의 시대구분법이 전해져 왔다. 첫째는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시대구분론으로서 상대(上代, 1대 박혁거세거서간~28대 진덕여왕) 중대(中代, 29대 태종무열왕~36대 혜공왕) 하대(下代, 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의 3분법이다. 둘째는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시대구분론으로 상고(上古, 1대 박혁거세거서간~22대 지증마립간) 중고(中古, 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 하고(下古, 29대 태종무열왕~56대 경순왕)의 3분법이다. 이상의 2종 시대구분에서 공통적인 것은 28대 진덕여왕대(647~654)에서 29대 태종무열왕대(654~661)로 바뀐 시기뿐이고, 또한 두 사서 모두 그 시기의 구분기준으로 삼은 것은 왕실의 골품이 성골(聖骨)에서 진골(眞骨)로 바뀐 사실이다.

‘삼국사기’의 ‘상대·중대·하대’의 3기 구분에서 방점을 찍은 시기는 ‘중대’라고 할 수 있으며, 반면 ‘삼국유사’의 ‘상고·중고·하고’의 3기 구분에서 방점을 찍은 시기는 ‘중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중대’는 삼국통일, 강력한 왕권, 유교정치사상 등의 면에서 신라의 전성기로 평가하고, 그 이전 ‘상고’를 성장기, 그 이후 ‘하고’를 쇠퇴기로 설정한 것은 유교적 입장에서 볼 때 타당성을 가진 구분이라고 본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중고’는 국가발전과 왕권강화과정에서 불교가 주역을 담당했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신라 전성기로 평가하고, 역시 그 이전 ‘상고’를 성장기, 그 이후 ‘하고’를 쇠퇴기로 설정한 것도 불교 입장에서 볼 때는 일면 타당성을 가진 견해라 할 수 있다. 결국 ‘중대’와 ‘중고’ 가운데 어느 시기를 전성기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유교와 불교의 입장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구분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각각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고, 이미 그 때까지 전해지던 여러 시대구분설 가운데서 각자의 입장에 따라 취사선택한 것으로 본다. 신라말기인 진성여왕 2년(888)에 각간 위홍(魏弘)과 대구(大矩和尙)에 의해 편집된 향가집을 ‘삼대목(三代目)’이라고 이름부친 것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신라 멸망을 앞둔 시점에서 신라인 자신들이 이미 신라의 역사를 초기·중기·말기의 3기로 구분하고 자신의 시대를 말대(末代)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3기로 구분하는 신라말기의 말대사관은 불법 전승의 역사를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 등 3시기로 구분하는 불교역사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한편 신라 지배자의 칭호가 시대에 따라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니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왕(王) 등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가운데 거서간은 존장자(尊長者), 차차웅은 무(巫), 니사금은 계군(繼君), 마립간은 높은 마루에 있는 우두머리 등의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는데, 23대 법흥왕 이후의 중앙집권적 국가의 제왕과 같은 존재와는 구별된다. 그런데 거서간은 1대 박혁거세(朴赫居世), 차차웅은 2대 남해(南解)에 그치고, 이후 3대 유리(儒理)부터는 니사금으로 통칭되었다. 그리고 거서간에서 마립간으로 바뀐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사이에 다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서는 19대 눌지(訥祗)부터 마립간 칭호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전하는데 반하여 ‘삼국유사’에서는 17대 나물(奈勿)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전해주고 있다. 19대와 17대 가운데 어느 설이 사실에 부합되는가의 문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왕권의 성장과정이라는 점에서 이해하면 두 주장 모두 타당성이 없지 않다. 그 문제는 왕권의 성장과 불교의 전래과정을 추적하는 내용을 다루는 다음호에서 검토하기로 하고, 이곳에서는 일단 통설에 따라 17대 나물마립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논지를 전개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시기구분론에 대해 논의해온 내용을 종합하면, 신라의 역사는 5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1대 박혁거세거서간, 또는 3대 유리니사금부터 16대 흘해(訖解)니사금까지 413년간, 제2기는 17대 나물마립간부터 22대 지증마립간까지 159년간, 제3기는 23대 법흥왕부터 28대 진덕여왕까지 140년간, 제4기는 29대 태종무열왕부터 36대 혜공왕까지 126년간, 제5기는 37대 선덕왕부터 56대 경순왕까지 156년간이다. 그 가운데 제1기는 국가의 초기 성장기로서 진한 12개의 ‘소국(小國)’ 가운데 하나인 사로국(斯盧國) 시기에 해당되며, 주위의 다른 소국들과의 연맹체 형성을 위한 움직임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박씨(朴氏)·석씨(昔氏)·김씨(金氏)의 3성(姓)이 교대로 왕위를 이었기 때문에 지배자의 칭호를 거서간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 시기를 잠정적으로 읍락국가(邑落國家) 시대, 또는 거서간 시대로 부르기로 한다.

제2기는 국가의 제2단계의 성장기로서 사로국은 연맹과 정복의 과정을 통하여 신라(新羅)로 비약적인 발전을 추구하던 시기이다. 나물마립간(356~402) 때는 낙동강 동쪽의 경상북도 일대를 지배하는 연맹왕국(聯盟王國)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고 세습하게 되었다. 이러한 김씨왕권의 확립을 계기로 하여 니사금 대신에 마립간이라는 새로운 지위에 어울리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후 22대 지증마립간(500~514)에 이르는 기간에 부자상속제를 확립하고, 6촌(村)을 6부(部)로 개편하여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를 국가의 발전단계 면에서 연맹왕국 시대, 왕호의 면에서 마립간 시대, 그리고 지배체제의 면에서 부체제(部體制) 시대로 부르기로 한다. 한편 이 시기부터 불교가 전래되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고구려를 통해서 북조의 불교를 받아들이고, 뒤에는 백제를 통해서 남조의 불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주체세력의 등장은 다음 시기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3대 시기구분에서는 신라의 성장기에 해당하는 제1기와 제2기를 독립적인 시기로 설정하지 않고, 제3기 이하에 통합하여 다루었다.

제3기는 국가의 비약적 발전기로서 신라는 23대 법흥왕(514~540)때부터 대내적으로 율령반포와 골품제·관등제 정비 등을 통하여 중앙집권적 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완성하였으며, 대외적으로 전쟁을 통하여 가야를 정복하고 고구려·백제와의 항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한강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또한 법흥왕 14년(527) 불교를 공인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통일을 위한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 부족의식을 극복하여 초부족정신(超部族精神), 또는 국가정신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세계종교로서의 불교를 통해서였던 것이다. 이후 28대 진덕여왕(647~654)까지 역대 국왕들은 모두 전륜성왕이나, 석가족의 이름 등 불교식 이름을 칭하는 불교식 왕명시대를 연출하였다. 지배체제 면에서는 성골(聖骨)을 정점으로 하는 골품제를 완성한 시기라는 점에서 골품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상고·중고·하고’의 3대 구분에서 제3기를 ‘중고’라고 하여 가장 중요한 시기로 설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4기는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지배체제를 확대 정비하였으며, 왕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리고 문물의 정비를 통하여 신라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또한 지배체제를 운영하는 이념으로 새로 유교를 주목하게 되면서 불교는 정치와 구분되어 불교라고 하는 종교적 관념이 정치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현저히 축소되었다. 신라 왕실의 혈통을 석가족의 가계와 동일시하는 점이나, 전륜성왕의 이념을 추구하였던 점에 변화가 일어나서 이제는 국왕의 권위도 불교가 아닌 유교의 이념에 의거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제정일치시대의 여운을 강하게 남기고 있던 불교식 왕명시대는 끝나고 유교적인 한식(漢式) 시호시대가 전개되었다. 29대 태종무열왕(654~661) 때부터 왕실의 골품도 성골에서 진골로 바뀌었는데, 골품의 강등이나 타락이 아니라 정치사상의 발전 결과로 이해된다. 한편 불교계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상응하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불교 교학의 연구와 대중화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역설적으로 불교의 수준을 그 이전 시기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높이어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최고의 정점을 이루게 되었다. ‘삼국사기’의 ‘상대·중대·하대’의 3대 구분에서 제4기를 ‘중대’라고 하여 가장 중심적인 시기로 설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제5기는 중앙의 진골귀족들이 치열한 왕위쟁탈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점차 몰락해 가고 있던 반면, 중앙의 하급귀족인 육두품 출신들이 새로운 지식인으로 대두하여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지배체제와 정치적인 문란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점차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는 사회변화가 일어났다. 주체세력의 교체라는 사회전환에 상응하여 불교계에서는 교학불교의 전통과 권위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실천불교로서 선종(禪宗)이 성립되었다. 이 선종의 성립은 불교의 내용이 교학불교에서 실천불교로, 그리고 불교의 주체세력이 중앙의 진골귀족에서 지방의 호족세력으로, 나아가 불교의 중심무대가 중앙에서 지방으로 바뀌게 하는 사상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나아가 경제적·사회적·문화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시대적인 변화를 자극하고 추동하는 의의를 갖게 되었다. 고려중기의 유학자인 김부식(1075~1151)이 ‘삼국사기’의 ‘상대·중대·하대’의 3대 시기구분에서 제5기를 ‘하대’라고 하여 신라의 쇠퇴기로 설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반면 고려 후기의 선승인 일연(1206~1289)은 ‘삼국유사’에서 고대불교를 종합정리하면서 제5기를 독립적인 시기로 설정하지 않고 새로 성립되는 선종을 일체 제외시켰는데, 선종을 고대불교와 구분하려는 일연의 불교사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57호 / 2018년 9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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