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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흐린풍경

기자명 임연숙

풍경으로 전하는 흐려진 삶의 모습

흐트러짐 없이 균일한 붓질로
어렴풋이 흐려진 풍경 담아내
한결같이 고요한 마음 의미

임태규 作 ‘흐린풍경’,160×80cm, 한지에 먹, 2018년.
임태규 作 ‘흐린풍경’,160×80cm, 한지에 먹, 2018년.

지루했던 여름도 지나고 정신없이 달려온 한 해를 돌아본다. 하던 일들도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게 되고 평소 챙기지 못했던 가족들의 안부도 물어보게 된다. 한가위라는 대명절이 있는 이 계절은 몸과 마음이 지친 우리들에게 일 년의 나머지 기간을 위한 충전의 시간인 것만 같다.

‘고향마을’이라는 정겨운 단어를 연상하게 하는 임태규 작가의 풍경화 한 점을 소개하려 한다. 흐릿한 수묵화 속에 어렴풋이 흐려진 풍경이 담겨져 있다. 힘을 뺀다는 일이 힘을 주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느끼게 된다. 힘을 빼는 것, 덜 채우는 것, 욕심을 버리는 것, 그리고 평상심을 유지하는 일이 참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이 그림은 힘을 있는 대로 빼고 아래로 아래로 낮은 자세로 봐야만 할 것 같다. 강한 먹으로 강렬하게 인상을 남기고 있지는 않지만 약한 저음으로 쑤욱 깊은 인상을 남긴다.

임태규 작가의 작품 ‘흐린풍경’ 시리즈는 전체적으로 균일하게 중간에서 흐린톤으로 그려져 있다. 조금 더하면 금방 지울 수도 없는 진한 먹그림이 될 텐데, 한결같이 흐린 화면을 유지하면서 산수풍경을 꼼꼼하게 채워나갔다. 계절적으로는 가을걷이가 끝난 늦가을의 풍경같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생활을 하고 있고 아파트가 많다지만 아직은 조금만 나가면 나지막한 뒷산과 자그만 집은 친숙하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삭막하다고 하는 아파트라는 주거와 시골집의 풍경이 공존하는 시대이다.

작가는 작품 초기에서부터 지금까지 산수풍경을 수묵이라는 재료로 다루어왔다. 그저 아름다운 자연을 화폭에 담아내는 과정을 넘어 이제는 풍경을 옮겨 담는 작가의 삶의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는 듯하다. 흐린풍경이라는 제목의 연작은 ‘흐린’이라는 단어에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흐린날씨, 흐린시야, 그야말로 흐리게 보이는 풍경에 더해 흐려지는 기억과 명료하지 않은 삶의 모습과도 같은 풍경을 함께 이야기한다.

작가는 ‘흐린’이라는 단어를 통해 시각적 이미지로서 눈보라 치는 날 소나무가 있는 풍경, 푸릇하게 밝아오는 새벽의 풍경, 비 내리고 눈보라 치는 날씨를 담은 풍경을 묘사하고 있지만 단순히 시각적 기억의 묘사라기보다 흐린 기억, 잊혀 가는 추억을 되살려내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작은 그림들에서 바라다보이는 주변 세상은 내 마음과 다르게 혼자 고요하다. 그래서 고요함을 주변에 그려 넣으려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내 밖에 세상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원인이 되어서인지 모르게 항상 이리저리 흔들린다.”(작가노트 중)

의외의 설명이다. 고요하게만 보이는 정지된 풍경 속에 작가의 수없이 흔들리는 마음이 담겼다니. 의외의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전체 화면에 하나의 흐트러짐 없이 균일하게 이어진 작가의 붓질은 고요한 작가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닌 고요하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이 담겨있는 것이다.

임연숙 세종문화회관 전시디자인 팀장 curator@sejongpac.or.kr

 

[1457호 / 2018년 9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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