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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싯다르타 태자의 개별자

기자명 김정빈

“누가 내 죽음을 대신할 수 있나요? 없습니다!”

생로병사는 그 누구도 대신 못해
그러하기에 일체는 고통이며 무상
불교는 개별자에서 시작된 가르침
부처님은 개별자의 소멸성 깨달아

그림=근호
그림=근호

왕궁을 떠나 출가한 싯다르타 태자는 마가다국에 이르러 오른편 성문으로 들어가서 왼편 성문으로 나왔다. 나라 안의 모든 남자와 여자들이 태자를 보고말하기를 “저이는 천신이다”라고 하기도 하고, “저이는 제석이거나 범천왕이거나 용왕이다”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때 마가다국의 왕 빔비사라는 신하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성 안이 이토록 조용한가?” 대답하기를 “어떤 수행자가 지나가는데 모습은 빛나고 위의는 미묘하고 기품은 아름다우므로 백성들이 감탄하여 뒤따르고 있나이다.” 이에 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태자를 뒤따라갔다.

태자가 동굴에 앉아 탁발해온 공양을 마치니 그때를 기다려 왕이 태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설산의 북쪽에 있는 카필라 국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숫도다나이고 어머니는 마야 부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싯다르타 태자가 분명합니다. 태자의 탄생에는 기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내가 이미 들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왜 고귀한 신분을 버리고 수행자가 되셨습니까? 세상에 남아 장차 임금이 되면 전륜성왕이 되어 천하 모든 사람들의 공경을 받을 것인데 어찌하여 산과 숲에 몸을 던지신 것입니까?”

태자가 대답하기를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사람의 몸은 생로병사의 고통을 떠날 수 없습니다. 또한 마음으로도 여러 가지 근심거리가 끊이지 않으므로 내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궁을 떠난 것입니다.” 빔비라사 왕과 여러 신하들이 되물었다. “생로병사와 우비고뇌는 억겁 이전부터 있어 왔고 억겁 이후까지 있게 마련인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뿐 해결하고자 하는 이가 없는데 왜 태자만이 홀로 근심한단 말입니까? 세상을 떠나 몰래 숨어 사는 것 또한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아닙니까?”

태자가 말했다. “세속에 살면서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우비고뇌에 빠지지도 않는다면 누가 세간에 남아 삶을 즐기지 않겠습니까? 또한 죽은 다음에 이곳저곳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럼으로써 또다시 생로병사와 우비고뇌를 반복하지 않는다면 누가 세간에 남아 삶을 즐기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태자는 지금 이 순간에는 생로병사와 우비고뇌를 당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내일에 올 일을 미리 끌어와 걱정하고 있습니다. 오늘 즐거우면 즐기는 것이 마땅하며, 내일 일어날 일을 미리 염려하여 스스로에게 짐 지우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내 생각에는 내일 일어날 일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하물며 생로병사와 우비고뇌는 일생의 가장 중대한 문제입니다. 미리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그 마귀가 내 앞에 닥치게 되면, 그때 가서 땅을 치고 가슴을 두드리며 미리 대비하지 않은 것을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대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늙고 병들고 죽어갈 때, 그리고 내가 우비고뇌에 빠져 있을 내 옆에는 부모, 처자, 형제가 있어서 그들이 나를 도울 것입니다. 또한 내가 죽은 다음에 내가 받들어온 신들이 나를 행복한 곳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부모, 처자, 형제, 그리고 신들은 나입니까, 남입니까?” “남입니다.” “남은 나를 대신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 부모, 처자, 형제, 신들은 나를 대신하여 죽어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여러분은 미래의 일을 미리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내가 늙고 병들어 마침내 죽어갈 때 나를 대신하여 그 재앙을 받아줄 이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인자한 아버지와 세상에서 가장 효성스러운 아들이 있어서 그들의 서로에 대한 사랑이 골수에 사무친다고 해도 그때를 당하여 서로 액난을 대신해줄 수는 없습니다.
눈먼 이에게는 등촉을 켜들어 보여도 소용이 없고, 귀먹은 이에게는 큰소리로 말해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남은 그런 존재입니다. 그들이 나를 도울 수는 있으나 나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남이 나를 돕고 내가 남을 돕는 수준의 세간적인 문제를 걱정하여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남을 도울 수 없고 남이 나를 도울 수 없는 생로병사와 우비고뇌 그 자체를 걱정하여 출가한 것입니다.
삶에는 즐거움도 있고 괴로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은 필경에는 모두 괴로움입니다. 괴로움은 괴로워서 괴로움이며 즐거움은 변해서 괴로움으로 떨어져 버리므로 괴로움입니다. 내가 미리 걱정하는 것은 즐거움까지를 포함한 그런 괴로움입니다. 세상은 무상하며, 무상한 것은 괴롭다는 것, 그 근본적인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출가를 감행한 것입니다.”
태자의 말하는 태도에 바윗돌 같은 확고함이 있었으므로 빔비사라 왕과 여러 신하들은 깊이 감동했다. 빔비사라 왕이 합장하며 공손히 말했다. “태자의 뜻은 미묘하고 의지는 강건하며 지향하는 바는 지극히 높습니다. 여느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대사를 능히 이룰 수 있을 듯합니다. 태자가 생로병사와 우비고뇌 문제를 해결하는 그때에 이 빔비사라를 기억해주십시오. 저에게도 그 감로법을 전해주십시오.”

태자가 빔비사라 왕의 청을 받아들이자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막 출가한 시절의 싯다르타에게 사람은 저마다 ‘개별자’였다. 그리하여 인간은 서로를 대신해줄 수 없다. 병들었을 때 간호를 해줄 수는 있지만 대신 아파해 줄 수 없고, 늙었을 때 부축을 해줄 수는 있지만 대신 젊어져 줄 수 없으며, 죽을 때 임종을 지켜보아 줄 수는 있지만 대신 죽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번뇌에 대해서도 위로하고 격려해줄 수는 있지만 대신 해결해줄 수는 없다.

이렇듯 불교는 개별자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이 불교의 마지막은 아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보리수 아래에서 개별자는 초월될 수 있으며, 그때 개별자의 개별자성은 소멸해버린다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것은 개별자로서의 ‘나’가 없다는 것을 통찰한다는 것이며, 대승불교는 이를 적극하여 공(空)이라 불렀다. 공만을 강조하여 개별자성을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개별자성에만 유념하여 공을 잊는 것은 더 곤란하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58호 / 2018년 10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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