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불치사리궁전 ‘스리 달라다 말리가와’
15. 불치사리궁전 ‘스리 달라다 말리가와’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8.10.22 15:53
  • 호수 14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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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불가침의 종교다” 간절해 더 서글픈 망국의 마지막 외침

1593년 캔디로 전해진 불치사리
궁전 안에 봉안하고 국왕이 예경
후대 왕들 중창불사로 이중 구조

1815년 캔디조약으로 왕국 패망
불교·불치사리 보호 약속한 영국
지배권 천명하는 수단으로 악용
30여년 간 불치사리 장악한 후에
불교계 넘겨주며 국교 지위 박탈
교회 내 학교 두고 기독교도 우대
훼불·불교비하 집요히 계속됐지만
마음 속 신심만은 훼손하지 못해
불치사리가 봉안돼 있는 스리 불치사의 정식 명칭은 ‘스리 달라다 말리가와’다. ’위대한 불치사리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바깥 쪽 건물 안에 또 하나의 건물이 들어있는 이중구조다. 붉은 지붕 건물에는 경전이 봉안돼 있고 회색 지붕 건물에는 법당, 박물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맨 안쪽 황금색 지붕이 불치사리가 봉안돼 있는 향실이다. 불치사는 원래 캔디왕조의 왕궁이었으나 불치사리가 봉안되면서 불치사 뒷편과 옆에 궁전건축물들이 자리하게 됐다.

싱할라왕국을 침략한 포루투갈의 불교박해를 피해 델가무와사원에 숨겨져 있던 불치사리는 1593년 캔디로 전해진다. 사분오열돼 있던 싱할라왕국의 소왕조들이 차례차례 포르투갈의 침략에 무릎 꿇고 이제 남은 곳은 캔디에 수도를 둔 위말라다르마수리야1세 뿐이었다. 불치사리를 전해 받은 왕은 명실상부한 싱할라왕조의 계승자이자 섬 전체의 통치자였다. 그러나 실상은 옹색하기 그지없었다. 1589년부터 싱할라왕국은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다. 왕에게는 실권이 없었다.

하지만 국왕은 정성을 다해 불치사리를 봉안했다. 왕은 궁성 안에 불치사리를 봉안할 2층의 건물을 짓고 직접 공양 올리며 예경했다. 이후 불치를 모신 건물은 몇 차례 복원과 증축을 거치며 팔각형의 건물과 해자 등이 추가되었다. 왕궁 안에 불치가 모셔진 건물은 불치를 뜻하는 ‘달라다’와 궁전을 뜻하는 ‘말리가와’가 합쳐져 ‘스리 달라다 말리가와’라 불렸다. ‘위대한 불치사리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치아사리 사원’이라는 뜻의 ‘Temple of the Tooth Relic’이라 부르고, 우리나라에서는 불치사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다.

현재의 불치사는 1층 석조, 2층 목조로 지어져 있다. 건물 밖에서 보면 해자에 둘러싸인 긴 회랑과 전면에 팔각형 건물 등이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불치사는 바깥쪽 건물과 안쪽에 또 하나의 건물이 들어있는 이중 구조다. 캔디의 왕들이 불치사를 증축하며 두 겹의 건물이 된 것이다. 그 중 안쪽에 위치한 황금색 지붕의 건물 2층이 불치사리가 봉안돼 있는 향실이다.

불치사리가 봉안돼 있는 불치사 ‘스리 달라다 말리가와’의 향실 입구. 거대한 코끼리 상아로 장엄돼 있다.

바깥쪽 건물은 각국에서 모셔온 불상을 봉안한 법당과 불치사리에 공양된 각종 귀중품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쓰인다. 스리랑카의 역사, 그 중 불치사리가 전래된 역사도 상세히 전시돼 있다. 법당에는 우리나라 불상도 있어 눈길을 끈다. 스리랑카인들은 어느 나라 불상인지를 따지지 않고 꽃을 공양하고 기도를 올린다. 눈길을 끄는 팔각형 건물에는 경전이 봉안돼 있다.

불치사는 스리랑카 내전 당시 반군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다. 내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98년 반군단체인 ‘타밀타이거’는 불치사에 폭탄테러를 감행했다. 차에 폭탄을 실은 채 불치사를 향해 돌진했다. 차는 내부로 들어오지 못한 채 입구에서 폭발했고 화재도 크게 번지지 않았다. 불치사리는 무사했다. 스리랑카인들은 불치사리의 영험함이 테러를 막아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손상된 전각을 2003년 수리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왕궁 안에 불치사리를 봉안했던 까닭에 불치사를 둘러싼 건물 대부분은 왕이 사용하던 궁전과 알현실, 법원, 목욕탕 등 왕궁 유적이다. 물론 지금은 박물관, 경찰청 등으로 그 쓰임이 바뀌었다.

불치사리를 친견하기 위해서는 2층의 향실로 올라가야 한다. 황금색 지붕의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바깥쪽 건물 2층으로 올라가면 향실과 연결돼 있다. 향실 1층을 통해 바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그 문을 통과하려면 정부와 불치사관리국 등 여러 곳에서 발급하는 증명서와 허가서가 있어야 한다. 향실 1층 문을 통해 드나드는 사람은 이곳 사원의 스님과 불치에 공양하는 소임을 맡은 재가자들뿐이다.

이중구조로 돼 있는 불치사의 바깥 건물에는 세계각국의 불상이 봉안돼 있는 법당이다. 벽에는 스리랑카 역사화가 있다.

불치사에서는 새벽 5시30분, 오전 9시30분, 오후 6시30분 세 차례 공양의식이 봉행된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루 세 번 공양을 올리는 것과 같다. 오전에는 죽이나 밥 과일 등 씹어서 먹을 수 있는 공양물들이 준비되지만 오후에는 오후불식을 지키는 상좌부불교의 스님들에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딱딱한 음식은 공양되지 않는다. 불치사리를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여기는 까닭이다. 캔디왕조의 역대 국왕들은 보름날이 되면 깨끗이 목욕을 하고 불치사를 찾아 홀로 향실에 들어가 직접 빗자루를 들어 청소하고 예경을 올렸다.

불치사에는 물론 스님들도 많이 상주하지만 불치사리를 수호하고 공양하는 것은 스님이 아닌 재가불자들의 임무다. 이 소임을 맡은 사람을 ‘다야와다나 닐라메(Diyawadana Nilame)’라고 부른다. 비록 정부 관료는 아니지만 직급이 장관에 해당해 흔히 ‘불치사 장관’이라고도 불린다. 주요 불교종단의 스님들과 종교국 관리 등으로 구성된 선출위원회에서 선거로 선출하고 임기는 10년이다. 1815년 캔디의 마지막 왕이 영국에 의해 폐위되기 전까지 왕실에서 임명하는 궁전관리였으며 이후에는 1931년 영국이 불교조례에 명시하면서 다야와다나 닐라메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치아사리를 수호하고 공양 올리는 임무가 재가자에게 맡겨진 이유는 ‘여래의 다비와 그 사리에 관해 출가자들은 관여치 말라’는 부처님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고 스리랑카인들은 말한다. 국왕이 폐위되고 나라가 망했는데도 지켜진 전통이다.

1815년 캔디왕조의 마지막 국왕 스리위크라마라자싱하가 폐위되면서 싱할라왕국, 싱할라왕조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1796년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싱할라왕국을 식민지배하기 시작한 영국은 선전포고를 하고 1803년과 1815년에 캔디를 공격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전투에서 싱할라왕조는 폐배한다. 국왕은 영국의 포로가 되었고 통치권을 영국에 넘긴다는 캔디조약에 서명한 후 폐위된다. 왕좌에서 쫓겨난 왕은 인도로 압송돼 작은 시골마을에게 초라하게 생을 마감했다. 기원전 6세기 스리위자야가 이 섬에 발을 딛고 기원전 4세기 아누라다푸라를 수도로 나라가 세워진 후 무려 2300여년 간 이어져왔던 싱할라왕국의 마지막이었다.

불치사 내부는 불치사리에 공양물을 올리고 예경하기 위해 기다리는 불자들로 늘 북적인다.

수없는 외침과 내전으로 인해 국왕이 암살당하거나 왕실이 분열되고 방계 왕족들이 소왕조를 세우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그 명맥을 이어온 싱할라왕국이었다. 그런데 캔디조약, 그 몇 장의 종이 때문에 싱할라왕조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고 말았다니.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여기에 약간의 상상력도 필요하다.

캔디조약을 살펴보면 이 같은 의문에 해답이 될 만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캔디조약에는 왕의 폐위와 왕실의 폐지 그리고 모든 지배권을 영국이 갖는다는 규정들이 우선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 ‘불교는 불가침의 종교이며 불교의 유지와 보호는 보장된다’는 조항이 명시된다. 나라가 사라짐을 선언하는 문서에 불교를 보호하겠다는 규정을 넣은 국왕의 절절한 신심이 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영국의 속내는 달랐을 것이다. 싱할라의 역사에서 불교를 유지하고 보호해야할 의무는 곧 통치자의 권리이기도 했다. 그러니 불교의 새로운 보호자인 영국은 이 섬의 새로운 지배자라는 사실상의 상징이었다. 불교의 구심점이던 치아사리를 손에 넣는 것이야말로 영국이 싱할라왕국을 손아귀에 넣는 진짜 방법이었을 것이다.

국왕을 폐위시키고 식민지배를 시작한 후 영국총독은 마치 싱할라의 새로운 왕처럼 행동했다. 이전의 싱할라국왕들이 했던 것처럼 불치사리 의식에 참석했다. 영국총독이 불치사리의 새로운 수호자, 새로운 ‘왕’임을 보여주기 위한 행보였으리라. 하지만 이런 영국인들의 행보는 ‘기독교계에서 반대한다’는 이유로 불치사리와 관련된 의식 자체를 중단 시키는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불치사리 만큼은 이후로도 30여년 간 자신들의 관리 하에 둠으로써 싱할라의 통치권이 영국에 있음을 공공연히 상징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다. 이후 영국은 치아사리 관리권과 함께 옛 왕실의 관례에 따라 총독부가 행사했던 불교계 최고 장로 임명도 불교계에 넘겨버렸다. 불교계가 더 이상 영국, 즉 스리랑카의 지배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국교로서 불교의 지위, 왕실과 더불어 섬의 또 다른 지배자라는 역사, 그리고 국민들의 믿음까지 말살하려는 영국인들의 계략이었을지 모른다.
 

불치사리가 봉안돼 있는 사리함. 불자들은 문밖서 예경하는 것으로도 환희심에 젖는다.

영국 식민지배시기 불교를 말살하려는 획책은 치밀하고 집요했다. 기독교선교사들을 적극 후원하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공공연하게 불교를 비난하고 폄훼했다. 사찰이 담당하던 교육시설 기능은 모두 박탈됐고 학교는 교회 내에 설치됐다. 기독교인이 아니고서는 출생신고도 결혼신고도 할 수 없었다. 공무원이 되기 위한 교육은 교회 안에서 이뤄졌고 불교를 비하하는 온갖 인쇄물들이 수없이 제작돼 배포됐다.

하지만 이런 영국의 불교탄압책은 겉으로 보이는 만큼의 효과를 얻지는 못한 셈이다. 기독교계로 개종을 하고 교회 내의 학교에 다니기도 했지만 스리랑카 민중의 절대 다수는 여전히 신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영국의 민족분열정책은 꽤나 효과적이었다. 다수민족이었던 싱할라족 대신 이들과 대립해왔던 타밀족을 중용했다. 특히 고산지대에서의 차 재배를 위해 남인도의 힌두교 타밀들을 대거 노동자로 유입시키며 민족 간 갈등을 부추겼다. 이 같은 정책은 후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스리랑카가 타밀족과의 민족갈등을 겪고 결국 수십 년 간의 내전에 휩싸이는 원인이 되었다. 민족갈등은 여전히 남아있는 족쇄다.

불치사리 앞에는 오늘도 꽃이 수북이 쌓여있다. 그렇다고 불치사리를 직접 친견하는 것은 아니다. 불치사리가 모셔져 있는 높이 60cm 크기의 황금 사리함을 친견하는 것이 전부다. 사리함은 모두 일곱 겹으로 돼 있고 그 안에 봉안돼 있는 불치사리가 직접 공개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저 황금사리함 안에 불치가 봉안돼 있음을 의심하는 이는 없어 보인다. 2300여년 싱할라왕국의 역사와 함께하며 불교는 찬란했던 영광과 서글펐던 쇄락의 시기를 모두 겪어왔다. 거대한 탑으로 눈앞에 나타날 때도 있고 사그라진 듯 보이지 않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절, 어느 곳에서도 법등은 이어졌다. 영취산에 머물면서도 상카시아로 하강하시는 부처님을 가장 먼저 마음으로 맞이했던 수부티존자처럼 볼 수 없는 불치사리 앞에 향기로운 꽃을 올리는 이들은 마음속으로 가장 먼저 불치사리, 여전히 살아있는 부처님을 친견한 이들이다. 그들에 의해 스리랑카의 법등은 이어진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61호 / 2018년 10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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