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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바로 지금 여기서!

기자명 최원형

주변관계 바로 본다면 생활쓰레기 걱정도 줄어

먹을 만큼만 사고 담으면
굳이 비닐봉지는 필요 없어
일상의 변화 추동하는 것은
‘지금’ 직시할 수 있는 여유

파리에서 이십여 일 머무는 동안 참 좋다고 느꼈던 풍경이 몇 있다. 유난히 넓은 하늘 아래 이국적이면서도 나지막하고 고풍스런 도심 풍경이 그랬다. 조각난 하늘을 이고 있는 빌딩 숲이 익숙한 내게 그들의 공간은 그저 부러웠다.

그러나 애당초 넓은 땅을 가진 그들을 아무리 부러워한들 달라질 게 없었기에 오래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정작 부러웠던 것은 그네들이 채소며 과일을 파는 가게였다. 작은 가게든 대형마트든 그곳의 판매 시스템은 무게를 달아 팔도록 돼 있었다.

고른 물건을 비닐이 아닌 누런 종이 봉지에 담았다. 어릴 적 익숙했던 마닐라지 봉투가 떠올랐다. 어느 날은 사과 하나와 망고 하나, 오렌지 두 개가 먹고 싶을 때가 있었고 또 어느 날은 연시랑 배가 먹고 싶은 날이 있었다. 내 주머니 사정과 먹고 싶은 만큼 담으면 그만이었다.

물론 유럽이라고 음식물 쓰레기가 안 나올 턱이 없고 생분해라고는 하지만 비닐봉지도 여전히 쓰이긴 한다. 중요한 것은 언제든 내가 먹을 만큼 담으니 남아서 버리는 일이 좀체 드물었다. 이건 부러움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도 충분히 시도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개 이 땅의 마트든 동네 시장이든 작은 과일 가게든 이미 포장된 상품들이 우릴 기다린다.

사과 몇 개의 가격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도 왜 굳이 포장을 할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만지작거리기 때문에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좋은 것만 골라가기 때문에 밑지는 경우가 많다고도 했다. 빨리 팔고 빨리 사야하기 때문에 미리 포장을 해 두는 것이 편하다는 대답도 돌아왔다. 파는 이나 사는 이 어느 한쪽이 포기하기 쉽지 않은 이런 이유들로 단지 과일이 먹고 싶은데 랩이며 스티로폼이며 늘 따라왔다.

단지 과일을 먹었을 뿐이었는데 의도하지 않게 자꾸 쓰레기가 증가하는 이 구조, 분명 변화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변화를 추동할 수 있을까?

단풍의 계절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나무에도 단풍이 한창이다. 꼭대기부터 번지듯 물드는 화살나무며 중국단풍이 곱게 붉다. 남하하는 단풍을 따라가는 여행도 멋지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그러다가 이내 그 생각을 거둬들였다. 다들 비슷한 생각에 나선 산행은 단풍 구경이 사람구경으로 바뀐다는 걸 두어 번 경험했던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지라 이 계절 어디든 고갤 돌리면 짙게 물드는 단풍으로 날마다 달라지는 숲을 만날 수 있다. 오늘은 또 얼마나 가을이 깊게 물들고 있을까 기대를 품게 만든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굳이 먼 곳으로 단풍구경을 떠나려는 걸까? 어쩌면 지천에 널린 단풍에게 눈길을 줄 여유가 없는 탓은 아닐지. 계절이 오기 전에 미리 계절을 기다리고 계획하느라 정작 단풍이 지척에 당도한 것을 혹 놓치는 건 아닐지. 어떤 명분이든 붙여서 시간의 틈을 강제로 벌려놓고 난 뒤에야 단풍을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단풍으로 넘쳐나는 풍경 속에 있어도 내 눈으로 감상하기보다는 카메라 눈을 빌리기 바쁘다. 나중에 보려고, 이따가 누군가에 보내주려고. 그러니 우리에게 바로 지금 여기서 단풍잎 하나 제대로 감상하며 가을을 보내는 일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말이다.

나는 단풍 가운데 감나무 단풍을 특히 좋아한다. 어느 가을날 제법 도톰하고 반질거리는 감나무 잎사귀에서 빨강, 노랑, 초록의 오묘한 조화를 발견했다. 바삐 걷던 발걸음을 세우고 그 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감나무 단풍과 조우했다. 그 후로 가을이면 감보다 먼저 익어가는 단풍을 보는 즐거움이 크다. 단풍을 만나는 일은 발걸음을 조금 천천히 하는 걸로 충분하다. 사실 어려운 건 그 짤막한 시간이라도 마련하려는 마음의 여유다.

결국 여유가 변화의 바람을 추동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여유는 바로 지금 여기에 온전히 몰입할 때 가능하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마음을 챙길 수만 있다면 내가 만지작거리며 고르느라 과일이 상하지 않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치게 된다. 내게 좋은 것을 고르느라 손해 볼 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빨리빨리 서두르느라 과일과 함께 딸려올 비닐봉지의 다음을 생각하게 된다.

비닐봉지 한 장 만드는데 5초, 사용하는데 5분 그런데 그게 분해되는 데는 적어도 5백년이 걸린다는 걸 헤아리게 된다. 비닐봉지 한 장이 분해되면서 미세플라스틱 175만 개가 나온다는 걸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 미세플라스틱은 소금에 생선에 혹은 굴에 섞여 내 몸으로 들어오는 이치를 생각하기에 이르게 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마음 챙김 하는 여유, 딱 그만큼 나는 주변과의 관계를 알아차릴 수 있다. 바로 그게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아닐지.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461호 / 2018년 10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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